사극 속 경제 이야기, 옛이야기 아니다
  • 정덕현 | 문화평론가 ()
  • 승인 2009.10.1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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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왜 ‘민생 살리기’에 나섰나

▲ 에서 장사꾼 염종(왼쪽)과 그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비담랑(오른쪽). ⓒMBC


사극의 재미는 전쟁 같은 스펙터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극은 기본적으로 팽팽한 대결 구도를 재미의 근간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대결을 통한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가 강한 추진력을 만든다. 따라서 과거처럼 전쟁 스펙터클에 의존하지 않고 설전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이끌어내는 MBC 드라마 <선덕여왕>은 사극이 가진 특징을 가장 잘 구현해낸 작품이라 하겠다. <선덕여왕>은 서로 다른 통치 철학을 가진 덕만(이요원)과 미실(고현정)이 벌이는 말싸움이 칼싸움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사극이다.

그 말싸움은 정치가 된다. 정치란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니, 그 말싸움이 가진 흥미진진함이 어찌 칼싸움만 못하다 할 수 있을까. <선덕여왕> 속에서 현 난장판 국회의 주먹다짐을 발견하며 세태 풍자의 즐거움을 얻는 것은 이 정치적 대결 구도 속에서 얻어지는 덤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이 정치적 대결 구도가 끄집어내는 정치적 사안들이 대부분 경제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유는 극명하다. 민생 살리기가 가장 크게 대중의 이목을 끌 만한 정치적 사안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에서 귀족들은 흉작에 가격이 상승하고 있는데도 비싼 가격에 곡물들을 매점매석한다. 급기야 곡물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버리고 곡물을 사지 못해 가족들이 모두 굶어죽게 되자 흥분한 백성이 살인을 저지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덕만(이요원)은 귀족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에는 구휼미로 내놓을 것을 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비싼 값에 곡물을 매점매석하는 것일까. 필요하면 적에게도 답을 구하는 덕만은 미실(고현정)을 찾아가 그 이유를 묻는다. 그러자 미실은 덕만에게 농부들에게도 자영농과 소작농이 있다면서 가격이 오르면 그들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재차 질문을 던진다.

덕만은 그 질문을 통해 답의 단서를 얻는다. 귀족들은 자영농을 몰락시켜 그들의 소작농(노비)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덕만은 즉시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런데 그 해결책이라는 것이 정치적 해결이 아니라 경제적인 해결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가격이 오른 곡물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궁의 비축미를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실제로 가격이 떨어지자 비싼 값에 곡물을 사들인 귀족들은 당황해 손해를 보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곡물을 내다팔기 시작한다. 급기야 덕만은 군량미까지 시장에 내놓겠다고 말한다. 미실은 병부의 재가 없이 군량미를 시장에 내놓는 것은 불가하다고 반대하지만, 여기에 대해 덕만은 굳이 진짜로 그럴 필요까지도 없다고 말한다. 즉, 군량미가 시장에 나온다는 소문만 가지고도 곡물 가격은 떨어질 거라는 이야기이다.

계급적 장벽 극명하게 존재해…현실 이야기 적용해 몇 배 효과

▲ 개혁을 암시하는 말을 내비친 김춘추. ⓒMBC

어찌 보면 상식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처럼 민생을 앞에 놓고 벌이는 경제적인 대결은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는 돈이 있고 욕망이 있으며, 난관이 있고 해결책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해결이 한 사람의 치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간다는, 현실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이야기는 심지어 어떤 판타지를 제공한다. 저런 성군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아니 굳이 성군까지는 가지 않아도 저런 CEO, 저런 팀장이 있다면 하는 욕망.

이와 같이 돈에 대한 욕망을 전격적으로 풀어낸 사극은 MBC 드라마 <상도>였다. 이전까지 사극 속에 경제적인 이야기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고, 다루어진다고 해도 정치적인 이야기 속에서 부수적인 역할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도>는 ‘임상옥’이라는 거상을 통해 현대적인 의미에서도 충분히 공명할 수 있는 상인의 길을 제시했다. 이후로 시장통은 사극의 또 다른 배경이 되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돈과 생존을 위한 욕망의 변주곡은 사극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틀이 되었다. 신분제 속에서 세습되던 부를 넘어서 결국에는 신분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은 성공을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경제적인 부가 있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개념과 잘 맞아 떨어졌다. 경제적 성공 스토리가 사극 속으로 들어가면 몇 배의 효과가 나오는 이유는 바로 그 계급적 벽이 거기에는 극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KBS2 드라마 <해신>은 장보고(최수종)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상단의 이야기가 또한 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이 경제 코드가 힘을 발휘했다. 중국으로 팔려간 노예에서 해상왕, 아니 해신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그 근간을 마련해준 것은 바로 경제적인 힘이었다. 장보고는 상단을 일으키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기까지 하는 인물로 그려졌고, 그 과정에서 정치와 경제와 전쟁은 하나의 이야기로 묶일 수 있었다. 스펙터클한 전투신과 그 전투가 가져올 경제적 이익은 해신 장보고와 해적들과의 경쟁 구도 속에서 흥미진진하게 구현되었다.

MBC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가 될 세손 이산(이서진)은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준 전권을 가지고 개혁을 시도한다. 그런데 그가 제일 먼저 칼을 대는 곳이 시전 상인들이 틀어쥐고 있는 경제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시전 상인들과 부패한 신하들의 정경유착은 난전 상인들과 같은 백성들의 상업을 뿌리째 흔들어왔다. 게다가 백성들에게 가야 할 경제적 혜택이 부패한 신하들에게 가면서 그렇게 얻어진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상황이니 이산으로서는 이것이 일거양득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명분도 확실하고 백성들의 마음도 이산에게 기울어진 상황, 그러나 시전 상인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태워버리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을 매점매석해버리자 이산은 궁지에 빠진다. 경제가 돌지 않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다고 했던 일은 백성을 더욱 곤궁에 빠뜨리고 결국 이산은 모든 전권을 영조에게 다시 돌려주게 된다. 그때 영조가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 이야기의 요지는 ‘자신도 시전 상인들이 깡패 같은 자들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정치란 무릇 백성을 자식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러니 그 깡패 같은 자들도 또한 자식이라는 것’이다.

사극 속에 등장하는 경제적인 코드의 이야기들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주를 거듭하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왕은 늘 백성들을 구원하려 하지만, 신하들이 중간에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배를 불리고 그 힘을 가지고 정치를 하니 정치도 난항이고 백성들은 늘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이것은 바로 우리가 현재 겪는 상황의 연속이다. 현실과 조응하는 이 지점에서 사극 속에서나마 어떤 대리 충족을 꿈꾸는 이 이야기들의 존재 이유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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