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유대감으로 ‘똘똘’ 대통령 이어 의원 25명 배출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09.10.20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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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제1 야당 수장도 교우 출신…대학원 등 포함하면 의원 수 75명으로 늘어나

▲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시사저널 박은숙


고려대가 변하고 있다. 100년여 동안 내걸어온 슬로건 ‘민족 고대’를 한 단계 뛰어넘은 ‘세계 고대’로의 비상을 꾀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고려대에 불어닥친 새바람이 ‘세계화‘라면 그 구체적인 사업은 ‘국제화’와 ‘정보화’이다. 고려대 특유의 ‘막걸리’ 이미지에서 ‘와인’으로의 변신이라든가, 꽹과리·농악이 주류를 이루던 문화에 서양 클래식을 끌어들인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지난 2005년에 맞이한 개교 100주년을 계기로 전체 동문의 결집과 협력은 유감없이 발휘된 바 있다. 그 2년 후에는 마침내 대망의 교우 대통령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제1회 졸업생 71명을 중심으로 ‘보전(普專)교우회’가 결성된 지 꼭 한 세기 만의 일이다. 이만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려대가 배출한 인물들은 역사에 걸맞게 사회 각계에 포진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무시 못할 영향력을 보여왔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고려대 인맥 가운데 첫 번째로 정치권의 현황을 들여다보았다.

고려대가 동문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2007년, 교우회 창립 100주년을 맞은 해였다. 국내 사립대학으로는 최초의 일이다. <고려대 교우회 100년사>는 이를 두고 ‘MB의 성공은 모교의 성공이자 교우들의 성공’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마침 고려대는 개교 1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른 여세를 몰아 유례가 드문 상승의 기운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시점에서 대통령(경영 61)을 위시해 정세균 민주당 대표(법학 71), 오세훈 서울시장(법학 79), 허남식 부산시장(심리 68)으로 이어지는 주요 포스트의 구도는 미묘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고려대 파워의 강세를 상징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만하다.

▲ 18대 국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고려대 출신의 재선 이상 의원들(가나다 순).

고대교우회, 호남향우회·해병전우회와 함께 3대 모임으로 일컬어져

고대인들의 결속력에는 남다른 데가 있다. 고려대교우회는 세간에서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와 더불어 특별한 유대와 결속을 자랑하는 3대 모임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그만큼 고려대 교우들 사이에는, 불의에 맞서 항거했던 시대정신과 고유의 학내 전통을 공유한다는 강한 연대 의식에서 비롯한 자부심이 강하다.
또한 ‘민족 대학’을 추구했던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민족의식도 남다르다. ‘우리가 나서서 나라를 구하고 바로 세워야 한다’라는 일종의 소명 의식이 그들을 하나로 묶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4·18 의거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하고 좌절했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데도 그같은 의식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대 출신들에게 교우들의 응집력의 배경을 물으면 하나같이 역사를 얘기하고 민족과 민주를 말한다. 고대인들은 이런 학풍 속에서 뚜렷한 독자적 정체성을 키워나갔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떨쳐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함양했다고 말한다.

고려대에 지방 출신 학생이 유난히 많았다는 점도 결속의 강도를 더해주는 한 요인이 되었다. 고려대에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지방 학생과 서울 학생의 비율이 6 대 4 정도였다. 일제 강점기인 보전(普專) 시절에는 지방 출신이 75?80%까지 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지방 학생들이 하숙이나 자취를 하면서 함께 어울리며 상부상조하던 전통이 졸업 후에도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는 풀이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이런 고대인들의 전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막걸리이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주종(酒種)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고대인들의 막걸리 사랑은 유별나다. 혹자는 고대인들의 강한 단결력을 막걸리의 끈끈함에 비유하기도 한다. 막걸리처럼 걸죽하고 투박한 맛이 고대인의 속성과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대인들은 언제 어디서든 일단 선후배·동문임이 확인되는 순간 하나가 된다. “그때부터 ‘우리끼리는 서로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뭉치게 된다.(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 이는 정치의 장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며 심지어 여야 사이에도 통하는 논리이다. 이세기 회장은 자신의 민정당 원내총무 시절을 돌이키며 이렇게 말했다. “대야(對野) 관계가 꼬일 때 이중재(경제 43) 선배를 찾아가 상의하면 뜻밖에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중재 의원은 6선의 야당 이론가였다. 당시 유준상 의원(경제 61)은 야당 부총무를 맡고 있어 수시로 마주쳐야 하는 카운터파트였다. 소속 당을 떠나 고려대 선후배라는 유대감으로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했던 유의원은 당내에서 “여당과 너무 친하다”라는 이유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고려대 출신 정치인들 사이에는 대체적으로 4·19 세대와  6·3 세대라는 큰 축이 형성되어 있다. 4·19 세대의 주역 중 대표격인 이기택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상학 57, 전 민주당 총재·한나라당 총재 권한대행)은 상대 학생위원장으로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4·18 고려대 시위를 주도했다. 정경대 학생위원장이었던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정외 57, 통일원·체육부장관 역임)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힘을 합쳐 4·18을 이끌어나갔다. 이기택 부의장은 1961년 졸업과 동시에 민주청년회 경남위원장으로 정치를 시작해  7대(1967년)부터 등원했으며,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이세기 회장은 1980년 이종찬, 권정달, 윤석순 등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정외과 클래스메이트인 박명환 전 의원(정외 57)도 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정계에 발을 들였다. 신상우 전 의원(정외 56, 15대 국회 부의장)은 대학 중퇴 후 기자로 활동하다 1970년 경남도당 부위원장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12대를 제외하고 8대부터 15대까지 7선을 기록하고 해양수산부장관, 평통 수석부의장,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를 역임했다. 법학과 59학번인 김중권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으로 재직하다가 1981년 11대 의원(민정당)으로 정계에 들어섰다.

역대 국회를 보더라도 고려대 출신들의 원내 진출 숫자는 항상 20명을 웃돌았으며 30명, 많게는 40명에 육박했던 시기도 있었을 만큼 두드러졌다. 언제라도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인원은 확보하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다수가 원내에 진출했음에도 연세대와는 대조적으로 국회의장을 내지 못해 못내 아쉬워했던 고려대는 임채정 의장(법학 60)이 17대에서 선출됨으로써 숙원을 풀었다. 첫 동문 국회의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고려대 교우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명박(경영 61), 김덕규(정외 61, 17대 국회 부의장), 유준상(경제 61), 조홍규(정외 61,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 김충조(법학 61, 5선 의원) 등은 4·19 세대이다. 이들은 다른 대학의 학생 대표들과 더불어 6·3 세대의 주축을 이룬다. 4·19 세대가 주로 여당 쪽으로 모인 반면,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한 6·3 세대의 주류가 야당인 민주당 계열에 몸을 담은 것은 그들의 출신 지역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학생운동 출신들은 두 갈래의 흐름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한쪽이 정치권이었다면 다른 쪽은 기업이었다. 이대통령은 기업 쪽으로 나간 졸업생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고려대는 거목처럼 우뚝 선 정치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고대인 가운데는 성곡 김성곤(보성전문 상과, 전 공화당 재정위원장)의 좌절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1967?70년 신민당 당수를 지낸 유진오 박사(고려대 총장 역임, 경성제대 법과 졸업)는 고려대 출신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으면서 대권 도전을 시도했으나 미완에 그쳤다. 유신 독재 시절 이철승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정치학과 49년 졸업, 9대 국회 부의장)의 중도통합론은 김영삼의 선명성에 밀려 외면당했다.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0년간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김상협 교수(도쿄 대학 정치과 졸업, 인촌 김성수 조카)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발탁되었다.

현 18대 국회에도 25명의 의원이 진출했다. 이 숫자는 학부 출신만을 꼽은 것이고, 경영대학원(석사 과정)·행정대학원(최고관리 과정)·고위정책개발 과정 등 장·단기 코스를 거친 50명을 포함하면 75명의 현역 의원이 고려대와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그밖에 여의도 의사당에는 사무처, 도서관, 예산정책처, 입법조사처를 망라해 총 1백4명의 교우가 근무하고 있다. 이들의 정점에는 박계동 사무총장(정외 72)과 안병옥 입법차장(법학 72)이 자리하고 있다. 의원 보좌진(보좌관과 비서관) 1백11명은 장래 의석을 꿈꾸며 의원들을 돕고 있다.

한나라당 18명·민주당 6명·무소속 1명 현역 활동

학부 출신 의원 25명의 당적(黨籍) 분포를 보면 한나라당 18명, 민주 6명, 무소속 1명이고, 선수(選數)로는 5선 1명, 4선 2명, 3선 5명, 재선 7명, 초선 10명이다.

제일 맏형격인 5선의 김충조 의원은 현재 정치개혁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초·중·고교를 모두 수석 졸업한 기록을 갖고 있다.

정세균 현 민주당 대표(법학 71)와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지낸 홍준표 의원(행정 72)은 4선이다. 정대표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가장 신사적인 국회의원에게 주는 백봉신사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슬롯머신 수사 검사’ 홍의원은 ‘돈키호테형’이라는 우려를 들을 만큼 강단이 있다는 평을 듣는다. 3선 의원으로는 김성곤·송훈석·원유철·이병석·정진석 의원이 있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 대학 철학박사인 김성곤 의원은 영산대에서 종교학을 강의하고 있다. 17대에는 국회 국방위원장을 지냈고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을 거쳤다. 속초·고성·양양을 지역구로 둔 무소속의 송훈석 의원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15년간 검사 생활을 한 율사 출신이다. 원유철 의원은 15·16대 의원을 지내고 경기도 정무부지사를 거쳐 18대에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한나라당 경기도당 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병석 위원은 포항시 북구를 지역구로 두고 있으며 포항 동지상고를 2년 수학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고려대 중문과에 입학한 이력을 갖고 있다. 현재 포항 동지상고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으며, 18대 국회의 국토해양위원장이다.

한국일보 기자, 워싱턴 특파원, 논설위원을 지낸 언론인 출신의 정진석 의원은 16대에는 자민련으로, 17대 재·보선에서는 무소속으로 공주·연기에서 금배지를 달았다가 국민중심당으로 합류했다. 18대에 와서는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의석에 앉았다. 

재선으로는 이계진·문학진·전병헌·주성영·김영우·백원우·박순자 의원이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계진 의원은 고등학교 교사와 KBS·SBS 아나운서를 거쳐 17대에 원주에서 당선했다. 한나라당 대변인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을 맡고 있다. 문학진 의원은 조선일보·한겨레 기자 출신이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 하남·광주 지구당 위원장,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거쳤고 17대에 이어 18대까지 2선을 기록했다.

전병헌 의원은 의원 보좌관과 평민당 전문위원, 민주당 편집·조직국장, 총선 기획단 부단장을 맡아 정치 경험을 쌓은 후에 금배지를 달았다. 열린우리당 대변인을 지냈고 지금은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이다. 정치권에서 ‘홍보 아이디어맨’ ‘꾀돌이’로 통한다. 주성영 의원은 13년간 검찰에 재직한 뒤 대구고검 검사를 끝으로 17대 국회에 입문했다. 한나라당 원내 부대표를 지내고 제1정책조정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영우 의원은 YTN 기자를 하다 2004년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캠프에 합류해 한반도대운하 등 정책 분야를 맡았던 측근이다. 

▲ 고려대 국회 교우회의 2006년도 임시총회 모습.

백원우 의원은 노무현 의원 비서관, 노무현 해수부장관 보좌역, 대통령직인수위 전문위원, 민정수석실 행정관을 지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박순자 의원은 고려대 경제학과를 42세의 늦깎기로 학사 편입해 학업을 마쳤다. 한나라당 부대변인, 원내 부대표를 거쳤으며 현재 여성위원장과 최고위원이다.

초선 10석. 이대통령 당선 후 젊은 피가 대거 수혈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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