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관객과의 소통 멈추지 않는 ‘살아 있는 무대’의 전설
  • 현수정 | 공연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09.10.20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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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박근형씨, 상식 뒤엎는 작품들로 눈길 끌어

연극 분야 차세대 인물로는 연극연출가 박근형씨가 30%의 지목률로 1위를 기록했다. 국내 연극계에서 그만큼 개성이 뚜렷한 연출가는 흔치 않다. 그의 작품들에는 어김없이 뒷골목 인생들이 등장하며, ‘출구 없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 묘사된다. 그런데 그 방법이 매우 독창적이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인물들은 기대와 전혀 다른 행동들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죽음을 눈앞에 두거나 배우자가 눈앞에서 외도하고 있어도 인물들은 투쟁 의지나 치열한 내적 갈등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상냥하고 상식적인 얼굴로 ‘금기’라는 것 자체를 무시해버리는 식이다.

▲ 연출가, 극단 골목길 대표. 연출. 동아연극상 작품상, 희곡상 수상.

<눈사람>의 인물들은 집단 자살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모자 색깔에 대해 말다툼을 벌이고 “대관아, 관이나 짜”와 같은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돌아온 엄사장>에서 인물들은 한 사람을 고문하는 와중에 커피 타임을 갖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이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있고, 벌을 받기는커녕 끝까지 승승장구한다. <너무 놀라지 마라>에서는 한술 더 떠서 자식들이 자살한 아버지의 시신을 방치한다. 영화감독인 첫째아들은 영화 한 편을 다 찍고 나면 ‘처리’하겠다고 하고, ‘히키코모리’인 둘째아들은 시신의 눈에서 고름이 흐르지 않도록 검은 테이프를 붙여놓는다. 노래방 도우미인 맏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시신이 매달려 있는 집으로 남자 손님을 끌어들이기까지 한다.

이처럼 상식을 뒤엎는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웃으면서도 불편함을 느낀다. 지금까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온 윤리 기준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같은 상황 묘사 자체가 아니다. 그 속에 차마 소리 내어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상황 설정은 매우 극단적이지만, 그것이 비현실적이라기보다는 사회의 고름 엑기스를 모아놓은 듯 ‘응축된 현실’을 느끼게 한다. 그런가 하면 TV 미니시리즈로도 방영된 <경숙이, 경숙 아버지>에서처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따뜻하게 풀어나가는 작품도 있다. 박근형은 초기 작품인

<청춘예찬>에서 폭력적이고 직선적인 표현들로 충격을 주었다면, 해를 거듭할수록 세련된 은유와 역설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뒤통수 맞는 재미를 맛보게 하고 있다.

연출가들이 배우들보다 더 많은 지지 받아

공동 2위에 오른 이는 연극연출가 위성신·양정웅 씨이다. 위성신은 정공법으로 삶을 묘사하는 연출가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인생을 건강하게 바라보려는 촌스러운 연출가’라고 정의하고 있다. 스스로는 ‘촌스러움’이라 했지만, 달리 말하면 소박함과 진실함이라 할 수 있다. 트렌디한 소재 여부에 개의치 않고 삶에 대해 진솔하게 묘사하는 그의 작품들은 젊은 관객층에 한정되지 않은 인기를 누려왔다. 위성신의 연극들은 대부분 어떤 상황 속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담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라는 것은 주변을 둘러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종류들이다.

<술집>에서는 연극배우들이 대학로의 어느 골목에 있을 법한 작은 술집에서 다양한 고민들을 털어놓는다. 연극인들의 일상적인 고민을 담은 자기 반영적인 공연인 것이다.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에서는 나이도, 사연도 다채로운 사랑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보여준다. 또한, 위성신은 종종 황혼기 노인들의 삶을 칙칙하지 않은 색깔로 묘사한다. <늙은 부부 이야기>에서는 황혼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순수하고 안타까운 ‘마지막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염쟁이 유씨>는 노인 염쟁이가 염을 하는 과정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두 작품 모두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유머러스하고 밝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위성신의 작품들은 초연 이후 거의 쉬지 않고 롱런하거나 리바이벌을 거듭하고 있다. 일상의 이야기를 쉽고 위트 있게 풀어낸다는 점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객 참여를 유도하며 소통을 추구한 것이 한 이유이다. 근래에는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에 이어 이근삼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락시티>를 뮤지컬로 선보여 인기를 얻었다. 그의 작품이 지닌 대중적인 힘은 뮤지컬이라는 장르로 재확인되고 있다.

양정웅은 ‘국제적인’ 감각과 실험 정신을 갖춘 연출가이다. 그는 ‘여행자’라는 극단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영국, 일본, 폴란드 등 해외에 수없이 초청 공연을 다녔다. 이것은 그가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체험하고 용감하게 실험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국의 바비칸센터에 초청받아 화제가 되었던 <한여름 밤의 꿈>은 ‘한국의 전통 연극이 발전했다면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라는 치열한 고민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한국적’으로 매끄럽게 재구성한 이 연극은 원작의 핵심 플롯만 취하고 해학과 놀이성을 극대화했다. 

양정웅은 상징적이고 압축적인 이미지를 활용한 작품들로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었다. 명망 있는 ‘카이로 국제 실험연극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우리 연극계를 깜짝 놀라게 한 <연-카르마>는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통과 의례를 움직임과 이미지 중심으로 표현한 제의적인 연극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드>를 원작으로 한 <환>은 언어를 축약하고, 시청각적인 이미지를 극대화시켰다는 평가를 들었다. 양정웅의 작품들은 종종 제의성을 강하게 풍기는데, 그로토프스키가 이야기한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서서 영접인 교섭이 가능한 그곳’과 같은 근본적인 소통과 교감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간혹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그의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들 이외에도 존재감 있는 연기와 다양하게 활동하는 연출가 최용훈, 이성열, 고선웅 씨 등과 배우 이상직·조재현·김태훈 씨 등이 연극계 차세대 리더에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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