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정계에 ‘여성 영웅’ 떴다
  • 소준섭 | 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09.12.0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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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인 민진당의 차이잉원 주석, 현 총통보다 앞서는 지지도 조사 결과 나와 미래에 대한 기대 높여

▲ 지난 5월17일 차이잉원 타이완 민진당 주석(가운데)이 군중 대회에 참가해 손을 들고 있다. ⓒREUTERS


지난해 타이완 총통 선거에서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보수 정치 세력이 마잉주(馬英九)라는 걸출한 인물을 앞세워 두 번 연속 진보정치 세력에게 당했던 패배를 설욕했다. 뿐만 아니라 진보 정치 세력의 구심점이었던 천수이볜 전 총통이 부패 혐의로 구속됨으로써 타이완 야당인 민진당(민주진보당)은 그야말로 존폐의 위기까지 몰리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뜻밖에도 그렇게 고사해가던 타이완 야당 대표의 지지율이 현 총통인 마잉주의 지지율을 넘어선다는 놀라운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즉, 민진당 주석인 차이잉원(蔡英文, 여·53)에 대한 지지도가 현 총통이자 국민당 주석인 마잉주의 지지도를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중국시보’가 11월 중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차이잉원 주석에 대한 지지율은 35.1%로서 마잉주 주석의 32.5%보다 2.6% 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그녀에 대한 지지도가 마잉주 총통보다 높게 나온 이유에 대해서 중국시보는 국민당 지지층 가운데 일부와 중립 성향 국민의 지지를 흡수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차이잉원 주석은 국립 타이완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해 카넬 대학에서 법학 석사를 받고 다시 영국 런던 대학 정경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재원으로서, 타이완으로 귀국한 뒤 경제부 국제경제기구 수석법률고문을 역임했으며 국립 정치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녀는 일찍이 1990년대 말부터 타이완국가안전회의 자문위원으로서 당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타이완은 중국과 독립적인 국가이다’라는 이른바 ‘양국론(兩國論)’을 기초하는 데 중심적으로 참여했고, 이러한 인연으로 리덩후이 타이완 전 총통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왔다. 그녀는 민진당이 집권하던 시기의 4년 동안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이라는 직책을 맡으면서 대중국 양안 관계 정책을 주도했으며, 2004년 민진당에 가입해 민진당의 비례대표 입법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2006년에는 행정원 부원장에 임명되었다.

 민진당이 국민당에 패배해 정권을 넘겨준 뒤, 2008년 5월 그녀는 민진당 주석 선거에 출마해 큰 표 차이로 주석에 당선되었다. 그녀는 민진당 역사상 최초의 여성 주석으로 기록되었다.

민진당 내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만신창이가 된 민진당을 이끌면서 오히려 마잉주 현 총통보다 높은 지지율을 얻게 된 그녀를 타이완 사람들은 ‘소용녀(小龍女)’, 혹은 ‘백장미’라고 부르고 있다. ‘소용녀’는 우리에게도 유명한 김용(金庸)의 무협소설 <신조협려>에 나오는 여주인공으로서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산뜻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며, 타이완에서 ‘현명한 여성’이나 ‘여성 영웅’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무명 정치인에서 강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발돋움해

▲ 11월6일 마잉주 타이완 총통이 총통 관저에서 내각의 각료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REUTERS

지난 8월8일, 태풍 모라꼿이 타이완 남부를 강타하자 차이잉원은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피해 지역을 일일이 방문하면서 위로와 지원에 나섰다. 이러한 차이잉원의 움직임과 반대로 마잉주 정부는 뒤늦게 대처에 나섰다가 마잉주의 지지도가 취임 후 최저로 폭락한 바 있다. 특히 타이완 남부 지역은 북부 지역과 달리 타이완 원주민이 다수를 점하는 지역으로서 민진당의 지역적 기반이기도 하며, 이곳에서 마잉주 정권이 보여준 일종의 ‘푸대접’은 이곳 주민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일으킨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어서 9월에 치러진 윈린(雲林) 현 입법위원 보궐선거에서 차이잉원은 “이 선거는 차이잉원에 대한 신임 투표이며, 동시에 마잉주에 대한 불신임 투표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그 위에 태풍 모라꼿 사태 때 보여준 차이잉원과 마잉주의 차별성을 뚜렷이 대비시키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다. 결국, 이 선거에서 류젠궈(劉建國) 민진당 후보는 7만4천2백72표를 얻어 무려 58.81%의 득표율로 국민당 장량후이(張艮輝) 후보가 얻은 2만9천2백78표, 23.18% 득표율을 압도적인 격차로 제압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무명 정치인’에 불과했던 차이잉원이 정식으로 민진당 주석에 취임한 후 승리를 거둔 첫 번째 선거였다. 이 선거는 마잉주에 맞서는 차이잉원이라는 대중 정치인의 정치적 잠재력이 처음으로 강력하게 표출된 사건이기도 했다.

 그녀는 차분하고 온화한 데다 행동과 말에 꾸임이 없고 모라꼿 태풍 피해 현장에서 심어진, 대중과 고통을 함께하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부각되면서 더욱 크게 신뢰를 얻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 소개한 여론조사에서 정당 지지율에서는 국민당에 대한 지지율은 36.7%인 데 반해, 민진당 지지율은 22.1%로서 여전히 야당인 민진당이 14.6% 포인트나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민진당에 대한 대중적 불신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차이잉원이 출현함으로써 보수 정치 세력의 압도적 우위로 정착되는 듯이 보였던 타이완의 정치적 지형은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다. 차이잉원이 민진당 주석에 취임할 때의 연설 제목은 ‘희망’이었다. 이제 그녀가 그 제목처럼 ‘희망’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반면, 국민당은 최근 마잉주 총통의 오른팔 격이던 ‘미남’ 입법위원 우위성의 섹스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그 ‘동요’가 현실화되고 있다. 확실히 누군가의 말처럼 ‘정치는 생물(生物)’이다.

거칠 게 없는 것처럼 보였던 마잉주 국민당 보수 정권 앞에 혜성처럼 나타난 차이잉원 민진당 진보 세력, 이것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은 과연 ‘진보 야당’의 재기인가, 아니면 ‘여성 영웅’의 출현인가.

최근 타이완에서 전개되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항의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선 차이잉원의 모습에서 또다시 우리나라 정국이 오버랩되면서, 우리의 ‘닮은꼴 정치’인 타이완 정국의 다음 장면이 어떠한 모습으로 펼쳐질지, 과연 어떤 결말을 보일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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