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방중 언동에 성난 ‘오랜 동맹’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09.12.0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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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미-중 공동성명에 대해 불편한 심기 표출

▲ 11월24일 만모한 싱 인도 총리(왼쪽)가 미국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한 나라의 국가 원수가 다른 나라를 방문한 후에 발표되는 공동성명은 대체로 좋은 말로 포장된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후 나온 공동성명은 의외의 후폭풍을 가져왔다. 이 성명은 “양국이 앞으로 남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얼핏 보면 조금도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원론적 이야기이다.

만모한 싱 인도 총리는 11월24일부터 백악관을 국빈 방문했다. 오바마 취임 후 미국을 국빈 방문하는 외국 정상은 싱 총리가 처음이다. 인도에 대한 미국의 각별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싱 총리의 마음은 편치 않다. 오바마가 중국과 너무 밀착함으로써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의 우방임을 자처하던 인도는 뒷전으로 밀렸다. 향후 인도와 미국의 관계가 험난해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발단은 ‘남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중국에 주문한 미·중의 성명서 때문이다. 인도의 시각에서는 인도의 뒷마당 문제에 중국이 개입해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비친다. 인도의 한 칼럼니스트는 그동안 남아시아에서 인도에 적대적인 역할만 해 온 중국에게 어떻게 이 지역의 평화를 맡길 수 있느냐고 흥분했다. 사실 중국은 인도와 숙적 관계인 파키스탄과 공고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사건건 인도의 비위를 건드렸다. 인도가 파키스탄과 두 차례 국경 전쟁을 치를 때 중국은 파키스탄 편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의 급부상에 신경이 곤두선 마당에 오바마의 방중 행보는 뇌관을 건드린 꼴이 되었다. 오바마 행정부와 더욱 끈끈한 관계를 구축해 중국을 견제해보려던 인도의 꿈은 공동성명의 한 대목으로 산산이 깨어졌다.

워싱턴 주재 인도 대사를 역임한 랄릿 만싱 전 외무장관은 “오바마의 눈에 인도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라며, 이것이 대다수 인도인들이 오바마의 방중을 보고 느끼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오바마의 언동은 인도를 끔찍하게 편애했던 부시 전 대통령의 정책과도 너무 대조적이다. 뉴델리 거리에서 뉴욕타임스 기자를 만난 한 인도인은 전통적 우방 관계가 어떻게 하룻밤 새에 돌변할 수 있느냐고 분개했다. 인도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국에 8천억 달러의 빚을 진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중국을 너무 두려워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오바마는 지난 10월 워싱턴을 방문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면담하지 않았다. 방중을 앞두고 중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인도도 워싱턴의 분위기를 눈치 채고 인도의 분쟁 지역을 방문하려는 달라이 라마를 만류했다. 그래도 달라이 라마가 방문을 강행하자 외국 기자들의 취재를 금지해 방중을 앞둔 오바마의 입장을 배려한 바 있다. 이 모든 기대는 오바마가 중국에서 보인 행동으로 허사가 되었다. 인도인들은 배신당한 기분이다. 

인도와 미국의 관계는 부시 시절에 전에 없이 돈독했다. 특히 부시가 인도의 핵무기를 묵시적으로 합법화해주고 핵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기술 도입을 허용했을 때 화목한 양국 관계는 절정을 이루었다. 부시는 인도를 남아시아에서 유일하고 필수적인 동맹으로 보고 이 나라를 고무시킴으로써 중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군사·경제적으로 미국의 적수 G2로 등장하는 중국을 다루기 위해 인도를 소중한 균형자로 간주했다. 오바마는 이 구도를 송두리째 뒤집었다. 인디언 익스프레스의 사설은, 오바마에게 파키스탄이 남아시아의 주축이고 인도는 부스러기에 불과하다고 비꼬았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3국이 다투는 남아시아에서 미국의 핵심 축 역할을 했던 인도의 위상은 초라해졌다. 오바마가 등장하면서 나타난 냉랭한 분위기를 인도가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수렁에 빠진 데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좌왕우왕하는 파키스탄의 혼란까지 겹쳐 남아시아의 지정학적 그림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예상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인도와 거리 두고 중국과 밀착하기 위한 예비 공작으로 생각해

미국은 티베트, 인권, 민주주의 등 주요 문제에서 중국과 맞서기를 꺼렸다. 오바마는 중국에서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라고 아부하면서 티베트의 독립이나 인권 문제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결국, 미국과 인도가 그동안 공유했던 보편적 가치들은 찰떡같은 미·중 공조로 대체되었다. 일본 천황에게 90˚로 고개를 숙인 자세는 차라리 에티켓 문제로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에 보인 저자세는 거의 아첨 수준이다. 적어도 인도인에게는 그렇게 비칠 수밖에 없다.

인도와 미국의 동맹 관계는 역사가 깊다. 영국의 오랜 식민 지배에서 인도의 독립을 지원한 것도 미국이었다. 두 나라는 광대한 영토와 다민족 인구, 종교적 다양성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그래서 마치 하늘이 맺어준 인연처럼 자연스럽게 동맹이 되었다.

물론 양국 관계가 늘 순탄하지는 않았다. 냉전 시절 미국이 파키스탄을 우선시하자 인도는 중립을 표방하면서 은근히 소련에 추파를 던진 적도 있다. 그래도 인도는 동서 이념의 틈바구니에서 미국과 선린 관계를 유지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미국도 양국 관계를 현상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가끔은 애매모호한 인도의 진로를 수용했다. 

지난 10월 인도를 방문한 윌리엄 번스 국무차관은 미국과 인도 관계는 21세기의 글로벌 질서와 번영에 필수적인 요인의 하나라고 다짐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지난 7월 인도를 장시간 방문했다. 지난해 파키스탄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받은 뭄바이의 타지마할 호텔에 투숙하기까지 하면서 우의를 다졌다. 지금 인도인들은 이 요란한 제스처들이 결과적으로 인도와 거리를 두고 중국과 밀착하기 위한 예비 공작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불신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싱 총리가 나서서 오바마 행정부와의 불협화음을 달랬다. 그는 11월22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행정부가 바뀌었다고 해서 미국과의 관계에 어떤 퇴행도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인도의 분위기를 의식한 듯 중국도 인도와 파키스탄 간 분쟁에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천명했다. 또한, 미·중 공동성명에도 파키스탄의 내정에 간섭할 의향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이 나오는 자체가 미국, 인도, 파키스탄, 중국의 상호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신호이다.

하지만 긴 역사적 고비를 통해 다져진 ‘자연적 동맹’을 감안할 때 양국 간 유대가 통째로 흔들릴 가망은 없다. 오바마는 싱 총리와의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미국 외교의 우선 순위 상위에 인도가 있음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 그러나 싱 총리는 오바마의 다짐에 화답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말만의 우의 다짐으로는 미국을 믿을 수 없다는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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