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에 만난 50만년 전 조상 전쟁통에 어디 가고 흔적만 남았는가
  • 이종호 |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문위원 ()
  • 승인 2009.12.15 16: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석기 전기에 활동했던 원시 인류의 유골, 발견과 실종으로 두 번 ‘충격’

▲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구점 북경원인 유적지 입구. 왼쪽의 흉상은 발견된 두개골로 추정해 만든 북경원인의 모습이다. ⓒAP


1929년 12월, 베이징 주구점 근처를 발굴하던 중국인 책임자 배문중은 지상에서 40m 깊이의 동굴에서 한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마한 입구를 발견했다. 그는 그곳에서 거의 완벽한 상태의 흰 뼈, 즉 사람의 두개골을 발견했다.

당시까지 인류학자들이 발견한 최초의 인류는 독일의 네안데르탈인이었다. 다시 말해 배문중이 ‘북경인’의 두개골을 발견하기 전까지 인류는 겨우 10만~20만년의 역사만 갖고 있었다. 중국협화의 학원의 해부학 교수로 있던 블랙은 이 유골이 50만년 전, 즉 구석기 전기에 활동했던 인류의 유골임을 확인했다. 1929년 12월20일 중국의 <신보>는 ‘50만년 전 인류의 조상이 깨어나다. 주구점에서 완벽한 원인 두개골이 발견되었다’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북경인은 원시인과 현대인의 특징을 함께 갖고 있다. (중략) 북경인은 발전 유형으로 볼 때 원시 인류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네안데르탈인이나 남아프리카 인종의 원형(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로 추정)에 속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대 진인(眞人, 호모사피엔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북경인은 소설처럼 계속 발견되었다. 북경인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또 다른 이유는 당시까지 논란의 와중에 있던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에서 진화론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류의 진화를 알려줄 화석이 많지 않다는 것이 결정적인 단점이었는데, 북경인은 그 당시까지 발견된 어떤 화석과 달리 인간이 진화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었다. 즉, 인류 발전 단계에 원인(猿人) 단계가 존재했으며, 인류의 역사가 5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다행히 진품과 다름없는 모형 전해져 연구 자료로 쓰여

▲ 주구점 유적지에서 북경원인 두개골과 함께 출토된 타제 석기들.

출토된 인골의 경우 남자의 키는 1백56cm, 여자는 1백44cm로 현대인보다 다소 작다. 그러나 팔다리 모양은 별 차이가 없다. 뇌의 용적량도 현대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현대인을 대체로 1천4백50cc라고 할 때 북경 원인은 약간 적은 1천2백50cc이다. 북경원인들이 사용하던 도구는 타제 석기류가 주이다. 자갈들을 한쪽 또는 양쪽에서 떼어내어 만든 찍개류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것은 주먹도끼류를 주로 사용한 유럽과 아프리카와는 사뭇 다르다. 즉, 북경원인은 ‘자갈돌 찍개 문화권’에 속한다. 이는 한국 구석기 문화와 상통하는 점이 많다.

북경원인의 후두골에는 작은 화산형 돌기가 있는데 이것은 현재의 황색인종(몽골로이드)의 특징과 같다. 또 숟가락 모양의 상문치(上門齒)를 갖고 있는데, 이 점도 몽골로이드의 특징 중 하나이다. 물론 북경원인이 몽골로이드의 직접 선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주구점 위에서는 ‘산정동인(山頂洞人)’이라 불리는 대략 2만년 전에서 1만년 전의 구석기 시대 말기 인골도 발견되었다. 산정동인을 중국 고고학사에서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하는 것은 중국에서 구석기 시대 초기·중기·말기의 인류가 모두 발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산정동인의 발견은 중국인의 선조가 서방에서 이전해 온 것이 아니라는 ‘다지역 기원설’을 지지하는 증거로 학계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주구점 발굴이 세계적으로 주목되었지만, 전쟁의 여파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군이 베이징의 코앞까지 진격해 오자 1937년 7월 주구점의 발굴 작업은 전면 중지된다. 그러나 북경인 화석에 대해서는 세계를 뒤흔든 발굴만큼 세계를 놀라게 하는 제2막이 준비되어 있다. 그것은 북경인의 진짜 화석이 중국과 일본 간의 전쟁 와중에서 실종되어 아직도 어디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황이 점점 나빠지자 신생대연구실의 명예주임이었던 유대인인 바이덴라이히는 북경인 화석의 안전에 대해 배문중과 상의했다. 북경인을 미국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 잠시 보관하기 위해 옮기자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정세가 점차 복잡해짐에 따라 북경인 화석을 중국에 놔둔다면 설사 아무리 안전한 금고에 잘 보관한다고 해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본이 남태평양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자 북경인의 안전 문제는 하루를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바이덴라이히 교수는 자신의 중국인 조수 호승지(胡承志)에게 북경인의 모형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가 만든 모형은 형태나 색깔이 거의 진품이나 다를 바 없었다. 호승지의 모형은 북경인 화석 실물이 사라진 뒤 세계 과학자들이 북경인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되었다. 세계 인류사에서 실물이 아닌 모형이 북경인의 그것처럼 많이 연구되고 우대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부터 북경인 화석이 지상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50만년 동안 땅속에 묻혀 지내다가 겨우 12년 동안만 이 세상에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북경인의 실종은 발견할 때와 마찬가지로 세계인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으며 분노케 했다.

그 후 60년 이상 중국,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 거의 전세계의 과학·정보 기관은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북경인의 행방을 추적했지만 아직도 묘연하다.

세계 각국의 ‘잃어버린 조상’을 찾으려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었지만, 북경인의 화석이 우리들의 눈앞에 정말로 나타날지는 미지수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