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철’의 긍지 떨친 최고 지성의 큰 산맥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09.12.1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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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뜻으로 기약한 이 날 / 누가 조국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민족의 위대한 상속자 / 아 길이 빛날 서울대학교 / 타오르는 빛의 성전 예 있으니 / 누가 길을 묻거든 /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 서울대학교 정문 ⓒ시사저널 박은숙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기공식에 붙여 정희성(국문과 64학번) 시인이 쓴 <여기 타오르는 빛의 성전이>라는 46행짜리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 시가 말해주듯 서울대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민족의 나아갈 길을 열고 겨레의 앞날을 비추는 빛의 소임이 주어져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라는 대목에는 이들로 하여금 은연중에 팔뚝의 근육이 불끈 솟고 맥박을 뛰게 만드는 마력이 숨어 있다.

실제로 서울대 출신들은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견인차의 역할을 했으며, 세상 사람들은 그 공을 인정한다. 그런 과정에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가 있기도 했다. 초창기의 ‘국대안 반대 파동’은 험난한 출발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서울대는 1975년 캠퍼스를 관악산으로 이전하는 일대 변혁기를 맞았다. 끊이지 않는 학생 시위에 시달린 박정희 정권은 시위의 온상인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를 관악산 골짜기로 몰아넣는 기발한 발상을 하기에 이른다. 후일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동숭동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사를 할 당시는 힘에 밀려 쫓겨간다는 분노가 이들을 짓눌렀다. 캠퍼스는 의도대로 외곽에 환상도로를 만들어 시위 진압 병력을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형태로 설계되었고, 정문 앞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관악파출소’가 들어섰다. 대학본부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상주하고 신림동 하숙촌에서는 너덧 명의 학생만 모여도 문밖에 정보 형사들이 어른거리는 살벌한 시절이었다. ‘관악고등학교’라는 자조도 섞여 나왔다.

이보다 1년 전, 문리대는 인문대·사회과학대·자연과학대 3개 단과대학으로 분리되어 계열별로 신입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런 외형적인 변화 속에 예전 문리대의 분위기나 전통은 서서히 모습이 바뀌어나갔다. 단과대학이 재편되면서 과에도 변화가 생겼다. 고고인류학과는 고고학과와 인류학과로 갈리면서 고고학과는 인문대학으로, 인류학과는 사회대학으로 딴 살림을 차려 나갔고, 고고학과는 고고미술사학과로 또 한 번 문패를 바꿔 달게 된다. 이미 그 전에도 사학과는 국사 연구의 전문 인력 양성이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라 국사학과·동양사학과·서양사학과 3개 과로 분리된 적이 있다.


3개 단과대로 분리된 후 문리대 총동창회는 없어져

문리대에는 대개 두 부류의 학생들이 들어갔던 것으로 얘기된다. ‘학문다운 학문’을 해보겠다고 선택한 학생과 시험 성적은 조금 떨어지지만 서울대 배지를 달고 싶어 커트라인이 낮은 과를 고른 학생, 이 두 부류를 말한다. 후자인 학생들 가운데는 문리대를 다니면서도 콤플렉스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우울한 학창 생활을 보낸 것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전자는 경우가 달랐다. 문리대는 순수과학을 학습하는 곳이고 다른 대학은 응용과학이며, 기초 학문을 하는 것이 학문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자유분방하고 독창성을 추구하는 문리대 정신과 맞아떨어졌다.

그들은 ‘문(文)·사(史)·철(哲)’을 외쳤다. 당시만 해도, 비록 밥 벌어 먹기는 힘들지 몰라도 문학·사학·철학이야말로 학문의 본령이라고 믿는 풍조가 팽배했다. 문과 과목을 이수한 학생들 중 줄잡아 30% 정도가 교수, 학자의 길을 밟았다. 문리대를 ‘인류 지성의 본산’ 이라고 자부하기까지 했다. 정치·외교·영문과 등 일부 학과를 뺀 나머지 학과는 대체적으로 법대·상대·의대·공대보다 커트라인이 뒤졌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긍지를 느끼는 분위기였다.

서울대 법대 교수를 역임한 양창수 대법관(법대 70학번)은 스스로를, 대학을 선택할 때 철학과를 희망했으나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어쩔 수 없이 법대로 진학한 경우라고 말한다. 그는 법대 1학년을 마치고 사학과로 전과를 시도했지만 역시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리대가 3개 단과대학으로 나누어지면서 문리대 총동창회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 후 동창 모임은 각 과별로 움직이는 정도로 이어오다가 2008년 7월 인문대만 따로 동창회를 결성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현재 인문대 동창회 명부에는 1만5천명가량의 회원이 등재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경제학부는 사회대에 소속된 학부이지만, 졸업생들은 예전의 상대 동창회를 찾아 들어간다. 경제학과·경영학과·상학과·무역학과가 상과대학에 속했던 옛 뿌리를 의식한 듯하다.

문리대생들이 만들어낸 <형성(形成)>이라는 계간지가 있었다. 70학번의 배인준 동아일보 논설주간, 엄기영 MBC 사장, 이규형 주 러시아 대사 등이 편집위원을 맡아 열심히 잡지를 만들었다. <형성>은 뜻있는 학생들이 자유분방하게 의견을 개진하던 수준 있는 잡지였는데, 이것 역시 단과 대학이 재편되고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는 와중에서 흐물흐물 사라져버려 아쉬움을 남겼다.

문리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교이자 채문식 전 국회의장, 김형오 국회의장을 비롯한 수많은 국회의원이 젊은 시절 꿈을 키우던 곳이다. 관계에서 활약한 문리대생 출신으로는 노재봉 전 총리, 고건 전 총리, 이해찬 전 총리를 비롯해 이한빈 전 경제부총리, 이승윤 전 경제부총리, 최각규 전 경제부총리, 최영철 전 통일부총리가 있으며 장관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외무부 요직과 대사직은 한때 법대 출신들과 외교학과 출신들이 나누어 독차지한 적도 있었다.

마로니에로 상징되는 옛 동숭동 캠퍼스의 추억 아련

학계에는 박춘호 전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 박봉식 전 서울대 총장,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 한완상 전 한국적십자사 총재, 유재천 상지대 총장, 손봉호 전 동덕여대 총장, 라종일 전 주일대사, 이명현 전 교육부장관, 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노동일 경북대 총장 등 쟁쟁한 학자들이 많다.

▲ 옛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 ⓒ서울대학교 기록관

언론인으로는 신동호 전 스포츠조선 사장, 신우식 전 서울신문 사장,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등의 뒤를 이어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 김인규 KBS 사장, 변용식 조선일보 편집인, 문창극 중앙일보 대기자, 강천석 조선일보 주필, 배인준 동아일보 논설주간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명한 문인으로는 전광용·정한모·박완서·황동규·박태순·김지하·황지우·이인화 씨 등이 있고, 인기 배우인 이순재·정진영 씨가 동문이다.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씨는 미학과를 나왔고, 판소리 예술 총감독 임진택씨는 외교학과 출신이다.

지금은 사라진 동숭동의 문리대 캠퍼스는 갖가지 추억을 아스라이 간직하고 있다. 교정에는 총장 집무실이 들어 있는 대학본부와 강의실의 고색 찬연한 건물이 자리 잡았고, 그 앞의 두 그루 마로니에 나무는 당시로서는 매우 희귀한 문리대의 상징물이었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하는 박건의 노래는 문리대 출신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매년 봄 4월19일을 전후해서 싸늘한 밤공기에 코트 깃을 세울 때쯤 라일락 향이 코끝을 간지르면 어쩐지 알싸한 최루 가스가 뒤섞여 퍼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정문 앞을 따라 흐르는 개천은 밝은 낮에는 구질구질해 보여도 어둠이 깃들면 찰랑찰랑 빛을 반사해 막걸리 사발에 흐려진 눈에는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를 흥얼거리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서울대는 이르면 2011년 3월부터 국립대학이 아닌 독립법인으로 재출범하게 된다. ‘서울대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머지않아 국회로 보내진다. 서울대가 법인으로 바뀌게 되면 인사와 조직, 재정의 자율성이 확보될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대 법인화 아이디어가 뜻한 바대로 서울대의 자율성을 강화·보장해주는 방향으로 열매를 맺는다면 서울대를 세계 10위권 대학으로 육성·발전시키자는 목표를 달성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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