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신정’에 쏟아지는 핏빛 절규 30년 호메이니 체제 뿌리째 흔드나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10.01.0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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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보안군·경찰, 이슬람 순교자 추도 행사장에 발포해 10여 명 사망…반정부 시위, 극렬 양상으로 치달아

▲ 지난 12월27일 이란 테헤란에서 반정부 시위자가 피를 흘리며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EPA

혁명은 스스로 부패한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1979년 왕정을 무너뜨린 호메이니 혁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다. 이란 국민들은 30년을 참았다.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근엄한 성직자들의 약속을 한때는 믿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폭정과 잔혹한 탄압이었다. 지도층의 부패는 왕정 시대를 능가한다. 

지난 6월 부정으로 얼룩진 대통령 선거를 무효화하고 다시 실시하라며 반정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까지도 잠시 지나가는 바람이려니 했다. 정권의 파수꾼임을 자처하는 혁명수비대는 그래서 시위대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발포로 여러 명이 죽고 수많은 사람이 투옥되었다. 선거를 다시 하라는 요구는 묵살되었다. 그럭저럭 사태는 진정되는 듯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흘렀다.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득의만만했다. 혁명의 영원성을 확신하면서 더욱더 권력을 조이고 불만 세력을 소탕했다. 서방이 그토록 만류하는 핵개발도 밀어붙였다. 안에서는 신정에 대한 거부감이 화산의 마그마처럼 팽창하고, 밖에서는 국제적 압력이 가중되었다. 이란은 고립의 수렁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12월에 들어와 반정의 불길은 다시 치솟았다. 2009년 12월7일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의 사진을 찢는 사건이 발생하더니, 20일에는 개혁파의 정신적 지주인 아야톨라 호세인 몬타제리가 타계하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드디어 운명의 날인 12월27일이 왔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이슬람 순교자들을 추도하는 아슈라(Ashura) 성일(聖日)이었다. 1953년 왕정에 항거하다가 죽은 세 명의 학생 순교자들을 위한 추모 행사도 이날 열린다. 아슈라는 이슬람 달력 무하람의 10번째 날이라는 의미이지만 신이 이슬람에 가장 중요한 축복을 내린 날이기도 하다.

이 성스러운 날 테헤란에서 일이 터졌다. 중심가에는 수만 명이 운집했다. 전국 10여 개 도시에서도 추도식이 시작되었다. 추도 의식이 반정 시위로 변질될까 우려한 보안군과 경찰은 군중을 향해 무자비하게 발포했다. 10여 명이 피살되고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그동안 정부를 옹호하던 일부 신정 지도자들과 엘리트 계층이 개혁 세력에 가담하자 사태는 돌변했다. 테헤란을 비롯한 일부 도시에서는 보안군과 경찰이 시위 진압을 거부하거나 현장에서 도주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왔다는 웅성거림이 도처에서 들려왔다.  

▲ 지난 12월28일 프랑스 파리의 이란 대사관 근처에서 이란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자들이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의 포스터, 이란 국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신정 타도”로 확대돼

두 달 동안 계속되는 아슈라는, 전쟁 중에도 추도 모임을 존중해주는 신성 불가침의 종교 의식이다. 혁명 세력이 폭정으로 매도했던 왕정마저 이 행사만은 방해하지 않았다. 이 성일이 총탄과 경찰봉에 유린되었을 때 마침내 군중의 입에서는 결코 나와서는 안 될 구호가 튀어나왔다. “독재자에게 죽음을!” 독재자는 하메네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자신들의 지도자에 대한 저주로 바뀌었다. 혁명의 아버지이자 신으로 추앙받던 호메이니의 사진이 훼손되었을 때 예감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경찰은 관련자들을 마구 검거했다.

이번 시위의 특징은 정부나 반정 세력이 모두 극렬해졌다는 점이다. 그만큼 분열의 강폭은 넓어졌다. 불신과 모함과 조작이 난무한다. 부정 선거로 재선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을 규탄하는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반정부 시위의 목표는 어느새 신정 타도로 격상되었다. 최고 지도자들은 아슈라 탄압으로 국민의 권리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보존을 우선하고 있음을 스스로 입증한 꼴이 되었다. 국민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일요일의 발포로도 10명이 죽고 그 이후 계속된 시위에서 다시 몇 명이 더 죽었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체포된 사람은 수백 명을 넘었다. 대통령 선거 당시 야당 후보였던 후세인 무사비의 조카가 암살되었다는 루머도 나돌았다. 반정 세력의 웹사이트에는 개혁파 지도자 여러 명이 검거되었다는 글들이 올라왔다. 그중에는 전 외무장관, 인권운동가, 무사비의 측근 인사 세 명도 포함되었다.

이란 정부는 국내에서 비극의 현황을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외국 특파원들은 입국이 금지되었고, 국내에 남은 일부 기자들은 목숨을 걸고 취재를 해야 했다. 두바이 TV의 시리아인 기자는 실종되었다. 이란의 현재 상황은 용감한 일부 기자, 블로거, 시민, 반정부 웹사이트, 그리고 휴대전화 카메라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외부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

지난 6월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 침묵을 지켰다가 구설에 오른 오바마 대통령도 태도를 바꾸었다. 하와이에서 휴가 중인 그는 아슈라 사태가 터지자마자 입을 열었다. “정의롭고 더 나은 삶을 요구하는 이란인들의 염원을 공포와 폭정으로 탄압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부당하게 구금된 시민들을 즉각 석방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취임 후 이란과의 대화를 강조했던 그가 내정 간섭에 가까운 입장을 밝힌 것은 이례적이다. 유럽 지도자들도 일제히 이란 정부를 규탄하고 나섰다. 미국의 고위 관리들은 미국의 대이란 정책이 ‘결정적 순간’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정책 변화를 가져온 요인은 핵 야망을 협상을 통해 해결하자는 서방의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민주화 열망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이란 지도자들의 처사에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종착역을 알 수 없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이란 정부가 국정 장악력을 상실한 단계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입지가 크게 약화된 것은 확실하다. 미국과 서방 분석가들은 이 사태가 서방에 축복이 될지, 독이 될지를 계산하느라 분주하다.

일부 전문가들은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처지를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비유했다. 고르바초프는 병든 공산당 체제를 종식하기보다는 수선하려다 체제 붕괴를 초래했다. 아마디네자드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이다. 한 가지 결정적 변수는 반정 시위의 정신적 지도자 무사비가 쥐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야당을 이끌면서 개혁은 하되 호메이니 혁명의 유산만은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 개혁 세력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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