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다운 출시’, 배려인가 차별인가
  • 손재권 | 매일경제신문 기자 ()
  • 승인 2010.04.20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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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LG전자 등, 해외에 선보인 제품에서 일부 기능 제외한 휴대전화 단말기 내놔 논란

 

▲ LG전자의 ‘크리스탈폰’은 지난해 말 출시되자마자 ‘스펙다운’ 논란에 휩싸여 판매 부진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사진은 아이돌그룹 빅뱅과 배우 신세경(가운데)을 모델로 내세운 TV광고.

LG전자는 지난해 12월 ‘크리스탈폰(투명폰)’을 출시했다. 크리스탈폰은 LG전자의 야심작이었다. 세계 최초로 투명 키패드를 적용하고 팬시한 디자인으로 젊은 층을 공략하고자 했다. 당대 최고 아이돌 그룹인 빅뱅과 배우 신세경을 TV 광고 모델로 기용했다. 그러나 이 제품은 출시되자마자 ‘스펙다운’ 논란을 일으켰다. 스펙다운(Spec Down)은 외국에서 먼저 출시된 휴대전화 단말기를 한국에 도입할 때 일부 기능을 제외하고 출시하는 것이다. 크리스탈폰은 외양만 비슷했지 해외와 국내에서 출시된 제품은 천양지차였다. 소비자들은 “겉모습만 같고 내용은 전혀 다른 저가 폰이다” “국내 소비자들을 역차별한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스펙다운 논란은 판매 부진으로 이어졌다. 심혈을 기울인 제품이 스펙다운 논란으로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LG전자가 입은타격은 컸다.

크리스탈폰은 디스플레이에서 해외 모델은 높은 해상도(800×480)를 지원했으나 국내에서는 400×240으로 절반 이상 낮추었다. 카메라 화소도 해외 모델은 8백만 화소였지만, 국내 모델은 평이한 3백만 화소로 사양이 축소되었다. 내장 메모리 용량도 1.5GB에서 1백90MB로 8분의 1에 불과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국내에 출시된 크리스탈폰은 무선랜(Wi-Fi), 카메라 자동초점(AF), FM 라디오 등의 기능을 뺐고 디빅스(DivX) 동영상 재생 기능도뺐다. 외국에서 최고 사양으로 광고한 크리스탈폰이 한국에서는 평범한 모델로 전락한것이다. 국내 소비자 사이에서 “왜 사양이 같은 휴대전화인데 외국에서는 무선인터넷(와이파이)을 사용할 수 있고 국내에서는 못 쓰나?”라는 불만이 쏟아졌다.

다만, 한국에서만 서비스하는 ‘지상파 DMB’ 기능만 추가로 넣었다.국내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사들은 국내 전략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스펙다운 논란을 겪어야 했다. 삼성전자는 해외에서 출시한 ‘제트(ZET)’를 국내에 출시할 때 스펙다운 논란에 휩싸였다. 삼성 제트는 ‘스마트폰보다 더 똑똑한(Smarter than Smartphone)’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며 와이파이, 이메일 동기화 같은 스마트폰 기능의 상당 부분을 일반 휴대전화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난해 6월 영국, 싱가포르, 두바이에서 각각 동시에 공개 행사를 벌일 정도로 삼성의야심작이었다. 특히 삼성 제트는 ‘터치 위즈’ UI(사용자환경)를 적용하고 앱스토어에서 응용 프로그램(어플리케이션)을 내려받는 것처럼 위젯을 다운로드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었다.

▲ 삼성전자는 지난해 6월 영국, 싱가포르, 두바이 등 3개국에서 런칭 행사를 갖고 신개념의 풀터치스크린폰 ‘삼성 제트(SAMSUNG JET,S8000)’(위)를 공개했다.

하지만 이 제품은 한국에서 3.5인치 AMOLED 디스플레이를 내장한 ‘보는 휴대전화’라는 개념의 ‘햅틱 아몰레드’로 이름이 바뀌어 나왔다. 디스플레이 사양을 확대하고 DMB를 넣었지만 무선랜이나 이메일 동기화 기능은 뺐다. 완전히 다른 제품이 되어 한국에등장한 것이다. 삼성전자가 ‘햅틱아몰레드’를 국내에 출시할 때 외국에서 출시할 때처럼 ‘스마트폰 같은 일반 휴대전화’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으면 어땠을까? 지난해 11월28일 애플 스마트폰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되면서 갑자기 확 바뀐 무선인터넷 지형과 앱스토어 열풍이 한국에서 이미 선보였을지 모를 일이다. 6개월이 훨씬 지난 후 LG전자가 ‘스마트폰 같은 휴대전화’라는 개념의 맥스(MAXX)를 선보여 인기를 끌고 있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 시장의 특성이 미국·일본·유럽과 다르다고 판단해 나온 결과”

삼성전자나 LG전자가 글로벌 전략 폰을 국내에 선보일 때 예외 없이 스펙다운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한국 시장의 특성이 미국, 일본, 유럽의 그것과 다르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삼성전자는 전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판매하는 휴대전화 단말기 가운데 약 7%를 한국에서판매한다. 그러나 한국 시장은 얼리어답터가 많고 소비자 취향이나 요구 사항이 까다롭기 그지없다. 또,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한국에서만 서비스하는 DMB나 T머니 기능을 추가해야판매량이 늘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실제 조사에서도 소비자들은 지상파나 위성 DMB 기능이추가된 휴대전화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한국에서는 DMB를 넣지 않으면 휴대전화가 팔리지 않는다. 한국 휴대전화 가격이 외국에 비해 비싸고 출시가 늦어지는 것도 DMB 등 한국만의 서비스 때문이다”라고 해명했다. LG전자도 “해외에서 출시한제품의 고급 사양을 그대로 유지해 90만원대 가격을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는 60만원대에 합리적인 기능을 제공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회사의 전략적 차원의 판단일 뿐 스펙다운논란이 억울한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사와 이동통신사가 자기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스펙다운을한다는 논란도 있다. SK텔레콤, KT, LG텔레콤 등 이동통신 사업자가 사업상의 이유로 와이파이 같은 기능을 제외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와이파이 기능이 내장되면3G를 통한 무선인터넷 접속을 피하게 될 것을 우려한 이동통신사들이 와이파이 기능을 제외한 휴대전화 출시를 원하는 것이다.애플 아이폰이 출시되기 이전에는 와이파이내장 휴대전화는 국내에 한 대도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스펙다운 논란은 ‘폐쇄적 IT 환경’을 유발해 결국 ‘아이폰 열풍’을 부채질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동통신사와 제조사가 시장을 지키기 위해 합작한 ‘한국화(로컬화)’는 이용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한국 휴대전화의 세계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되었다는 것이다. 애플 아이폰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동일한 제품이며 사양도 거의 같다. 이같은 통일성은 애플 아이폰의 장점으로 부각된 반면 국내 휴대전화에는 단점이된 것이다.

세계화를 목표로 개발한 DMB와 위피(무선인터넷 표준)는 한국만의 서비스로 전락해 국내 기업의 세계화를 막았고 애플이나구글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지연시켰다.국내 휴대전화의 스펙다운 논란은 세계 IT 기업의 갈라파고스로 평가되는 한국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LG전자가 크리스탈폰을 한국에 출시하면서 외국과 같이 와이파이, 카메라 자동초점(AF), FM 라디오 기능을 넣은 휴대전화와 이런 기능을 빼면서 DMB 등의 국내 소비자에게 만족이 높은 휴대전화를 동시에 출시했으면 어땠을까? 소비자들에게 제품 선택권을 부여하면서 스펙다운논란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국을 특수 지역으로 인식하지 않을 때 한국 시장은글로벌화하고 한국 기업은 세계 무대에서애플이나 구글 같은 경쟁자와 한판 대결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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