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매뉴얼’이다
  • 김재태 기자 (purundal@yahoo.co.kr)
  • 승인 2010.05.0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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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게 폴란드의 카친 숲은 오랫동안 수치와 오욕의 역사가 묻힌 곳이었다. 옛 소련군은 2차 대전 중 이곳에서 폴란드인 2만2천명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내내 감춰오다 고르바초프 시대에 와서야 마지못해 시인했다. 지난 4월28일 러시아는 역사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비밀 서신의 이미지 파일을 정부 문서보관소 홈페이지에 올린 것이다. 이 일을 주도한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도 덧붙였다. 과거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적반하장식의 억지를 부리곤 하는 일본과는 분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일병합은 한국이 원해서 이루어졌다”(이사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 같은 망언도 여전히 그칠 날이 없다.

우리가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침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에 일본에서는 또 하나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가 초등학교 검정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는 것을 승인한 데 이어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외무성의 외교청서(外交靑書)를 확정한 것이 그것이다. 하토야마 연립 정권은 과거사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낙관에 빠져 있던 우리 정부는 천안함 사태의 와중에서 크게 일격을 당했다. 뒤늦게 독도와 관련해 ‘조용한 외교’ 노선을 버리고 ‘시끄러운 외교’에 나서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사실 일본의 이같은 ‘뒤통수 때리기’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이미 알려졌다시피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회부까지 염두에 두고 그동안 치밀하게 움직여왔다. 그와 달리 우리 정부의 독도 정책은 저강도의 대응 차원에 머물러 있다. ‘정부가 한국 바로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는 민간 단체 반크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난달 약탈 문화재 환수 운동을 벌이는 인사들과 함께 일본에 다녀온 <시사저널> 기자는 그곳에서 두 가지 놀라움을 겪었다고 전해주었다. 하나는 도쿄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우리 문화 유산의 수가 실로 엄청났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정치인들이 보인 의외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의 일행은 일본에서 다수의 정치권 인사들과도 접촉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문화재 환수 운동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 오지 않는 것을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 선제적인 행위가 있어야 자신들이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이번 천안함 사건에서도 나타났듯이 위기에 대처할 가장 기초적이고 효율적인 무기는 ‘매뉴얼’이다. 독도 문제와 천안함 사건은 사실 성격이 전혀 다른 사안이지만, 천안함 사건 대응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와 군 당국의 잘못된 부분들을 잘 따져 복기해보면, 독도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도 유추해낼 수 있을 듯하다. 중요한 것은 늘 말보다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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