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되풀이될 수 있다”
  • 광주·안성모·조현주 기자 ()
  • 승인 2010.05.1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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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현장 지킨 사람들이 말하는 ‘5월, 그날을 잊어선 안 되는 이유’

“30년 전 암울함, 다시 갖게 된다”

정동년 5·18 30주년 행사위원회 공동상임위원장

5·18 30주년 행사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정동년 공동상임위원장(66)은 이른바 ‘5·18 사형수’였다. 그해 5월18일 자정 무렵 보안사 지하실로 끌려간 그는 갖은 고문에 시달리며 ‘5·18 배후 세력’으로 내몰렸다. 2년8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후 군사 정권과 맞섰던 그는 두 차례 더 감옥 신세를 졌고, 지역을 대표하는 재야 인사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광주 남구 구청장을 지내고, 참여정부 때는 무소속으로 광주시장에 도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칩거 생활을 해왔다.

그런 그가 다시 ‘5월 광주’로 돌아왔다. 지난 5월4일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 위치한 행사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30년 전 느꼈던 암울함을 요즘 다시 갖게 된다”라고 말했다. 정위원장은 “MB(이명박) 정권은 국민의 상당한 지지를 받은 합법 정권이다. 그런데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강화된 분단 이데올로기로 국민을 옥죄고 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보다 더 견디기 힘든 배신감을 갖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그는 ‘5월 정신’의 계승은 잃어버린 ‘공동체 정신’의 실현에 있다고 강조했다. 정위원장은 “치안이 부재하면 흔히 폭동이 일어나는데, 그해 광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민들이 밥을 지어 나누어주고, 부상자를 위해 너나없이 헌혈했다. 어느 때보다 공동체 정신이 강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개인의 이익만 우선하는 공동체는 깨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회는 점점 더 개인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에서 ‘부자 되세요’라고 인사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사회가 개인화하는 배경에는 기득권 세력이 갖는 ‘민주화에 대한 공포’에 있다고 보았다. 정위원장은 “교육부터 뒤틀려 있다. 남을 지배하고, 조그마한 권력도 남용하려는 교육을 걷어내야 한다. 결국, 5·18 정신의 계승은 정치권력을 올바로 세우는 것이 시작이고 또 끝이다”라고 강조했다.

ⓒ시사저널 임준선

“5월 광주는 아픔 아닌 영광의 기억”

5·18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 음반 낸 가수 김원중씨

“30년 전 5월의 광주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역사이다. 5월18일 그날의 평화로운 시위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난 5월4일 광주 무등산 원효사 인근에서 <바위섬> <직녀에게>로 알려진 가수 김원중씨(51)를 만났다. 얼마 전 ‘5·18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 음반을 발매한 그는 자연스럽게 ‘5월 광주’에 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당시 전남대 2학년에 다니던 그는, 광주 금남로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80년 5월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간 벌어진 광주 학생 시위는 전남대 학생 6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민주성회였다. 이 시위는 1970년대 이후 광주에서 수없이 벌어졌던 시위 가운데 가장 모범적으로 치러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 신군부는 이를 ‘대규모 시위’로 규정해 대학 점거에 나섰다. 김씨는 “18일에 착검한 공수부대원들이 정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우르르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고 거기서 폭력이 시작되었다. 닥치는 대로 곤봉을 휘두르던, 얼굴이 유독 벌건 군인들의 모습이 아직도 떠오른다”라고 회상했다.

김씨가 이번에 기념 음반을 내놓게 된 것은 ‘5월 광주’의 아프지만 영광스러운 기억이 퇴색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이번 음반에 실린 곡 중 김씨가 직접 작사·작곡한 <춤춘다>라는 곡에는 이러한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러운 것 모두 바람에 던져버리고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 춤춘다. 내 춤을 춘다. 춤춘다. 춤춘다’라는 노랫말은 ‘5월 광주’는 아픔의 기억이 아니라 영광의 기억임을 상기시킨다.

김씨는 “민주화의 봇물을 터뜨린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는 일이 광주의 일로만 여겨지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에게 주권 의식을 가지게 한 5·18이 이제는 대한민국의 역사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5월 광주’는 마치 임진왜란처럼 아주 먼 과거의 일로 느껴질 것이다. 왜곡된 기억들을 끊임없이 수정해나가면서 진실을 규명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감추어진 채 상처로 얼룩진 5·18의 모습은 언제고 다시 반복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5월 광주가 만든 공동체의 기억 회복해야”

5·18 30주년 기념전 ‘흰빛 검은물’ 연 홍성담 화백

광주 시립 상록전시관에 걸린 펼침막에 낯익은 이름이 올라왔다. 30년 전 5월의 광주에서 시민군의 한 사람으로, 이후 민중미술의 대표적 작가로 활동해 온 홍성담 화백(55)이다. 홍화백은 1980년대부터 ‘횃불’과 ‘대동 세상’ 등을 담은 목판화로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그려왔다. 5·18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전으로 열린 ‘흰빛 검은물’ 전시회는 그의 개인전이다. 주제는 ‘거룩한 여성성’이다.

홍화백은 “국가주의의 폭력에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쓸쓸한 대중, 어린이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이다. 시커먼 국가주의에 고통받는 이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고통스러운 이들을 전면에 내세울 때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상상력이 나온다. 성스럽고 거룩한 모성, 여성성과 같은 것들이 시대의 어둠을 밝혀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30년 전의 ‘5월 광주’를 직접 체험하고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홍화백에게 ‘5월 광주’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5월의 광주는 피로 맺어진 도시 공동체였다.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에 거대한 국가와의 싸움에서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도시, 가족, 마을과 같은 공동체가 깨지면 결국 개인은 파편화되고 만다. 해체된 개인들 틈 속에 다시 새로운 국가 폭력이 생겨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홍화백은 “지금 광주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5월 광주’가 만든 공동체의 기억을 회복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5·18’ 주역들, 지금은…

5·18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름이 익숙한 많은 이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5·18 최후의 수배자로 알려진 윤한봉씨는 1980년 비상계엄 확대 이후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3년 만에 귀환해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윤씨는 폐기종에 걸려 투병하다 지난 2007년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에 앞서 지난 2006년에는 재야 원로였던 홍남순 변호사가 94세의 일기로 숨졌다. 5·18 당시 옥살이를 했던 윤영규 초대 전교조 위원장은 2005년에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광주의 어머니’로 불렸던 조아라 광주 YMCA 명예회장 역시 지난 2003년 92세를 일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껏 ‘5월 광주’의 주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왕년의 투사들도 있다. 1980년 5월 공수부대와 계엄군은 광주를 고립시켜 외부와의 소통을 완전히 차단했다. 이때 광주 시민들의 언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유인물’이었다. 당시 전남대 국문과 4학년생으로서 유인물 제작과 배포에 참여했던 김태종씨(51)는 현재 ‘5·18 30주년 기념 뮤지컬 추진위원회’ 추진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오는 5월15일에 막을 여는 뮤지컬 <화려한 휴가>의 예술감독을 병행하고 있다.

5·18이 일어나고 난 뒤 거리 방송을 했던 차명숙씨(49)도 있다. 차씨는 영화 <화려한 휴가> 신애 역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그녀는 현재 경북 안동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종종 5·18과 관련된 행사에 참여하며 당시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옛 전남도청 앞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기지 역할을 했던 ‘녹두서점’이 있었다. 이곳의 안주인이었던 정현애씨는 낮에는 삼계중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민주화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며 생활했다. 광주항쟁 지도부의 여성 대표이기도 한 그녀는 현재 민주당 광주광역시당 비례대표 후보자이자 사회운동가로 일하며 여전히 광주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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