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차별’하는 방송
  • 하재근 | 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0.05.3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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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남아 비하 발언 무심코 내뱉는 프로그램들 많아

지난주 TV 쇼 프로그램인 <엠카운트다운>에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상상을 초월하는 방송 사고였다. 미운 오리에서 백조로 변신한 연예인들을 소개하는 코너에서였다. 사고는 2PM의 택연을 소개할 때 터졌다. 프로그램은 ‘완벽한 그에게도 과거는 있다. 2PM의 택연’이라고 말문을 열더니, 택연이 데뷔 전 오디션에서 중국인으로 오해받은 사건이 있었다며 그럴 정도로 외모가 2% 부족했던 그가 지금은 카리스마 넘치는 스타로 변신했다고 소개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충격적인 멘트였다. ‘중국인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2% 부족한 외모’라는 말이 방송을 탄 것이다. 택연이 과거에는 촌스러웠다가 지금은 세련되고 멋있어졌다는 얘기였는데, 그 말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인을 싸잡아 외모가 촌스러운 사람들로 비하했다. 놀랍도록 노골적인 인종 차별이다.

만약 일본의 방송에서 어떤 연예인을 소개하면서, ‘이 사람이 데뷔 초에는 한국 사람처럼 보였다가 지금은 멋있어졌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네티즌 사이에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엠카운트다운>에서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이 나온 것은 아무런 이슈가 되지 않았다. 그런 방송을 한 제작진의 무신경도 놀랍고, 그런 방송이 아무런 논란도 일으키지 않고 지나간 한국 사회도 무섭다. 우리가 비하되는 것에는 민감하면서 남을 비하하는 것에는 무심한 사회. 이런 사회는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싸잡아 열등한 민족이라고 하며 인종 학살을 저질렀다. 일본은 과거에 자신들을 제외한 아시아인이 열등하다며 침략을 저질렀다. 미국 백인들은 흑인이 열등하다며 비인간적인 인종 차별을 저질렀다. 20세기에 이런 일들을 겪고 나서 인류는 인종이나 민족, 국적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싸잡아서 낙인찍는 것이 반인륜적 범죄라는 데에 합의했다.

그리하여 언론이 대놓고 인종 차별적 발언을 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금기시되었다.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케이블TV이기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는 쇼 프로그램에서 이런 일이 태연히 벌어졌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타락했다는 말인가. 탄식이 절로 났다.

한국 방송은 이미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루저녀’의 발언이 방송된 후 방송사와 프로그램은 난타당했다. 타고난 키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했기 때문이다. <엠카운트다운>은 타고난 국적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했다. 루저녀의 발언이 한 개인의 생각인 데 반해, <엠카운트다운>의 그것은 정식 방송멘트이므로 훨씬 중대한 사태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국 남성을 차별한 루저녀의 발언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중국인을 차별한
<엠카운트다운>에는 그냥 넘어갔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또 언제 차별적인 방송이 터져나올지 모른다. 사회 분위기 자체가 인종 차별·국가 차별에 둔감한 상황에서 방송 제작진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무심코 차별적인 방송을 내보냈다가 국가 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한국의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의 시청권이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끼리만 보는 우리 방송이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자막까지 처리되어 동아시아에 뿌려진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온 수많은 유학생도 한국 방송을 본다. 그러므로 방송 제작진은 국가 문제를 다룰 때 매우 주의해야 한다.

<강심장>에서 장나라가 무심코 중국에 돈 벌러 간다는 식으로 말했다가 중국인들의 항의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우리끼리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극명히 알려준 사건이었다. 드라마 <카인과 아벨>도 중국의 감옥을 무법천지처럼 묘사했다가 중국측으로부터 항의를 받았었다. 마치 미국이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영화에서 제3 세계를 미지의 모험의 땅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한국 드라마가 중국을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활극의 세계로 묘사한 사건이었다. 중국인들이 항의했을 때 한국인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평소에 중국을 저개발 국가라고 무시했던 마음이 하도 커서, 그렇게 묘사하는 것의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 예능에서는 과거부터 연예인의 외모를 두고 동남아 사람 같다거나, 중국 사람 같다고 놀리는 일이 종종 있어왔는데, 이런 관행도 언제 문제를 일으킬지 모른다. 마치 지뢰밭을 걷는 느낌이다. 과거에
<해피투게더>에서는 못생긴 조연 배우를 앉혀놓고 동남아 사람 같다고 말하며 웃는 장면이 방영되기도 했다.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X맨>에서는 미남이 아닌 출연자들에게 중국 현지인 같다고 놀리는 것이 방송된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동남아 순회 공연’이라는 표현이 있다. 별로 인기도 없고 멋있지도 않은 가수를 비웃을 때 쓰는 말이다. 코미디언들도 방송에서 이 표현을 많이 쓴다. ‘동남아 순회 공연을 막 마치고 돌아온 아무개’라고 소개하면 언제나 멋있지 않은 인물이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반면에 미국 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하면 칙사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든다. 동남아 사람들이 언젠가 ‘동남아 순회 공연’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들의 마음은 어떨까? 택연이 촌스러워서 중국 사람 같다는 말을 들었다는 방송이 한국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중국 청년들은 어떤 마음이 될까? 칼을 갈 것이다. 분노가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 혐한의 씨를 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객’에게 침을 뱉다니…

황당한 것은 우리가 떠받드는 미국은 우리에게 상품을 파는 사람들임에 반해, 우리가 알게 모르게 경멸하는 중국과 동남아는 우리의 상품을 사주는 ‘손님’이라는 점이다. 세상에 물건을 사주면서 굽신거리고 물건을 팔면서 뻣뻣하게 구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우리의 모습이 딱 이런 꼴이다.

한국 대중문화 산업이 미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가능성은 매우 작다. 반면에 중국과 동남아 시장은 우리 대중문화 산업의 핵심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무시해도 좋은 ‘가난하고 촌스러운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대중문화 산업을 지탱해주는 소중한 고객들이다.

인종 차별에 사로잡혀 미국에게는 문화 상품을 사주면서도 어려워하고, 정작 고객인 아시아 사람들은 경멸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널리 알려진다면 결국 아시아 사람들은 등을 돌릴 것이다. 아시아 사람들이 한국인을 인종적으로 경배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의 태도가 뻣뻣하면 그들도 냉담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류는 끝이다. 이렇게 이해관계로 따져도 우리 방송의 중국·동남아 차별은 문제가 심각하다. 방송 제작진과 일부 네티즌의 엄중한 자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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