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으로 다진 ‘최고’의 힘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5.3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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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시리즈 - 한국의 신 인맥 지도 | 경기고Ⅰ

 

▲ 옛 경기고등학교 교정.

KS 마크는 정부가 정한 표준 규격에 ‘미달하지 않는’ 공산품에 붙여지는 증표이다. 그것이 반드시 최고의 품질임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KS 마크가 붙어 있는 상품은 대체적으로 신뢰하는 경향을 보인다. 고교 평준화 이전에 세간에서는 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를 거친 학력의 소유자를 가리켜 두 학교 교명의 두 문자를 따 ‘KS 마크’라고 불렀다. KS 마크가 엄격한 의미에서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지만, 경기고 출신을 그렇게 부를 때는 그냥 ‘최고’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경기고는 올해 개교 1백10주년을 맞았다. 대한제국 고종 광무 4년(1900년) 10월3일, 4년제 관립중학교로 문을 연 경기고는 그동안 5만명에 가까운 영재를 배출했다. 1백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월 동안 최고의 인재들이 수학했으니 정·관계, 법조계, 재계, 학계를 망라해 사회 각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세력을 형성한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다. 예컨대 서울대학교가 총장을 선거로 뽑는 한 경기고 출신 이외의 교수가 당선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특정 졸업 회수의 경기고 출신 교수 숫자가 몇십 명에 이르는 데 반해, 같은 연도 학번의 다른 고등학교 출신 교수들은 고작 10명에도 못 미치는 현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너나 할 것 없이 똑똑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경기고 출신들은 잘 뭉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곤 한다. 지방 고등학교 출신으로 고시에 합격해 오랫동안 경제 관료 생활을 하고 장관까지 지낸 한 인사는 “공무원 사회에 경기 출신이 워낙 많다 보니까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더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업체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예전에 대우그룹이 융성했을 때, 혹은 현재 한화그룹의 경우처럼 “경기 출신이 아니고는 어렵다”라는 말이 나오는 곳도 적지 않다. 정상에 서면 주변의 질시가 심하고 쓸데없는 말이 나기 쉽다. 경기고의 경우 워낙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서인지 동창회에서조차 분야별 동창 현황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경기고 출신들이 ‘각개약진’을 하는 편이라고는 하지만, 이회창 현 자유선진당 대표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뭉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최규하씨가 대통령으로 잠깐 재임하는 데 그쳤을 뿐이므로 동문들 사이에 ‘대통령을 만들어내자’라는 염원이 작동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를 도와 뛰던 몇몇 인사들은 후에 재판정에 서기까지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후보의 패배 요인을 분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설이 나왔으나, 다 이긴 것 같았던 두 차례 선거에서 이후보가 패하자 일부 경기고 동문들 사이에서는 “목포상고·부산상고에 졌다”라고 자탄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정치권에서는 동문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지난 18대 총선 최대 격전지로 꼽혔던 서울 종로 선거구에서는 통합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격돌했다. 두 사람은 9년 차이의 선후배로 서울대도 동문으로 이어지고 옥스퍼드 대학 정치학 박사라는 공통점도 지녔다.

경기 출신 가운데 총리를 역임한 동문도 상당수이다. 경기중학교를 수료하고 국회의원, 보건사회부장관을 지낸 진의종씨(작고)가 전두환 대통령 시절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이 그의 맏사위이다. 49회 졸업 동기 중에서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이회창(1993.12~1994.4)·이홍구(1994.12~1995.12) 두 총리가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말과 노무현 대통령 취임 초기 두 차례 총리직을 맡았던 고건 전 총리는 장관, 서울시장 등 화려한 관운을 자랑하는 인물로 노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시기에는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맡기도 했는데 “적절히 해냈다”라는 평을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를 지난해 말 신설된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불러들였다. 상공부에 오래 몸담았고 통상교섭본부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국무총리를 지낸 한덕수 현 주미 대사는 대단히 우수한 경기고 동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현재는 정운찬 총리가 경기고 출신 국무총리의 맥을 잇고 있다.

현역 의원 18명…“이번에는 교섭단체 못 만들겠다” 우스갯소리도

2008년 5월, 국회 개원 60주년을 맞아 제헌 국회부터 17대 국회까지 역대 의원 4천3백98명을 분석한 보고서가 발표된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제일고보를 포함한 경기고 출신이 2백42명으로 압도적인 숫자를 차지했고, 경복고와 경북고가 각 85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18대 국회에 들어 문화일보가 조사한 출신 고교별 분포를 보아도 경기고 18, 경복고 10, 경북고 9의 순서로 나타나고 있다. 경기고 출신 국회의원들은 서울을 지역구로 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소속 정당은 거의 한나라당이다. 이주영·공성진·박진·정두언·고승덕·이종걸 의원 등이 활발하게 의정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 중 한 명인 정두언 의원은 그의 언행 하나하나가 화제를 뿌릴 만큼 주목을 받는 권력 실세로 통한다.

18대에서는 20명에서 두 명 못 미치는 18명이어서 “이번에는 교섭단체 못 만들겠다”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는데, 지난 17대 때는 21명을 배출했었다. 소속 정당 별로는 열린우리당 10명, 한나라당 8명, 민주당 2명, 민노당 1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18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유재건·김근태·유인태·신기남·이원영·민병두 씨, 민주당의 신중식씨, 민노당의 노회찬씨 등이 고배를 마셔 숫자가 줄어들었다.

행정부에는 청와대에 김성환 외교안보수석비서관과 경제수석비서관이 있고, 내각에서는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장관과 김태영 국방부장관이 현직에 있다. 관계야말로 전통적으로 경기고 출신들이 맹활약을 펼치는 분야인데, 워낙 그 숫자가 많다 보니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데 어려운 점이 있다.

군문에서도 중요한 자리에 기용된 경기고 출신들이 많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인 이상훈 전 국방부장관은 재향군인회장을 연임한 군 원로이다. 김태영 현 국방부장관은 직전 이상희 장관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았는데 두 사람 모두 합참의장에서 장관으로 승진했다. 4성 장군인 도일규 전 육참총장, 김병관 전 1군사령관이 동문이고, 국방부 국군의무사령관인 김록권 중장도 눈에 띈다. 김병관 사령관은 육사를 수석 입학·졸업한 수재로 유명하다. 육사에서 오래 교수 생활을 지낸 한 예비역 대령은 “육사에 경기고 출신들이 그리 많이 들어오는 편은 아닌데 그때그때 요직에 다수 기용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저력에 놀라게 된다”라고 말한다.

법조계 역시 경기고 출신들의 진출이 두드러진 분야이다. 고등학교가 평준화되기 전 서울대 법대 입학생 중 경기고 출신이 가장 많았고, 사법시험 합격자에서도 압도적이었다. 법원과 검찰에서 수적으로 우세를 점하는 경기고-서울대 법대 출신들이 법원장과 검사장 같은 요직에 많이 진출했다. 조규광 헌법재판소 초대 소장, 이세중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김두희 전 법무부장관, 김영무 법무법인 김&장 대표변호사 등 쟁쟁한 법조인들이 많다. 특히 56회에서는 권성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현 언론중재위원회위원장), 김영일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서성 전 대법관 등 최고위 법관이 3명이나 탄생했다. 현 대법원에도 이홍훈·김능환·박시환·안대희 대법관이 재직하고 있어, 대법원장을 포함한 전체 14명 대법관 중 4명이 경기고 동문이다.

헌법재판소에는 송두환·목영준 재판관이 있다. 각급 법원장으로는 최진갑 부산지법원장, 이재홍 서울행정법원장, 이진성 서울중앙지법원장, 안영률 광주지법원장, 이동명 의정부지법원장이 있다.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 소장과 권오곤 국제유고전범재판소 소장과 같이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동문이 있는가 하면, 권성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장, 강지원 어린이청소년포럼 대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처럼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보이는 인물도 많아 경기고 출신 법조인들의 다양한 활동상을 엿볼 수 있다. 

검찰에는 김준규 검찰총장을 필두로 김학의 서울남부지검장, 박영렬 수원지검장, 황교안 대구고검장이 있다.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는 이주영·진영·고승덕·이종걸·강용석 씨는 18대 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고 있어 이들의 힘을 짐작케 해준다.

다채롭고 화려한 경력을 지닌 경기고 동문은 이 밖에도 수없이 많다. 위로는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이 있고, 장관을 지낸 권이혁 성균관대 이사장도 빼놓을 수 없다. 권이사장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 교수·학장, 서울대병원장, 서울대 총장, 문교부장관, 보사부장관, 환경처장관, 학술원 회장을 차례로 역임하고 현재 87세의 고령임에도 현직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2, 3대에 걸쳐 선후배되거나 ‘형제 동문’인 집안도 많아

현홍주 변호사도 그와 비슷한 경우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검사로 첫발을 내디뎠고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냈다.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12대 국회에 들어가 민정당 정책조정실장과 사무차장을 지냈다. 이후 법제처장을 거쳐 주유엔 대사-주미국 대사로 기용되어 정통 외무부 출신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관계를 떠난 후에는 국내 최대의 로펌인 김&장 소속 변호사로 있으면서 브룩킹스 연구소 자문위원 등 대미 관련 단체에서 활동해 오다가 이번 천안함 사태 이후 발족한 대통령 직속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에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태섭 전 과학기술처장관은 경기중·고 6년간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당시 이공계 최고 학과로 꼽혔던 서울대 공대 화공과에 들어가 서울대 총학생회장까지 지냈다. 미국 MI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젊은 나이에 대우엔지니어링 사장을 맡았으며 국회의원, 정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한때 수서 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겪기도 했지만 재기해 한국인 최초로 국제 라이온스협회 국제회장에 선출되었고, 지금은 한국원자력의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를 두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승리로 이끈 ‘한국의 우등생’이라고 부르는 의미를 이해할 만하다.

경기고 동문 중에는 2대, 3대에 걸쳐 선후배가 되거나 여러 형제가 모두 동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청량리 뇌병원 원장을 지낸 최신해 박사 3형제가 부친인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11회)과 더불어 2대, 4명이 경기인이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의 부친 이홍규 전 대검 검사와 이회정·이회성·이회경 등 이대표의 4형제가 동문이다. 정운갑 전 농림부장관(28회)의 슬하에는 정성택(57회), 정승택(60회), 정지택(65회), 정우택(68회·충북지사) 등 동문 4형제가 있다.

홍진기 전 법무부장관(31회)의 경우에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사돈을 맺어 이건희 회장의 처남이 된 아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64회), 광주고검장으로 검찰을 떠난 후 보광훼미리마트 대표이사 회장을 맡은 홍석조씨(67회),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69회), 홍석규 보광 대표이사 회장(70회)까지 포함해 5부자가 경기인이다.

이호 전 내무부장관의 다섯 아들도 경기고가 자랑하던 형제인데, 이동 전 서울시립대 총장(55회), 이량 전 주아일랜드 대사(58회), 이은 서울대 화학부 교수(61회), 이단(63회), 이춘(73회)이 그들이다. 시골에서는 동네 소년 하나가 경기고에 들어가면 동네 어귀에 플래카드를 내걸던 시대에 여러 형제가 모두 경기고에 입학한 것은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가족 경영의 모범을 보였던 박두병 전 두산 회장의 경우에도 여섯 아들 중 차남 박용오(52회), 삼남 박용성 대한체육회장(55회), 4남 박용현 두산 회장(58회), 5남 박용만 두산 회장(69회) 등 네 명이 경기고를 졸업했다. 이상훈 전 국방부장관(48회)의 5형제도 집안 동문으로 유명하다. 이상진(51회), 이상문(53회), 이상융(57회), 이상철 LG텔레콤 대표이사 부회장(63회)이 모두 경기고를 나왔다.

경기고 출신들은 동문끼리, 저명 인사들끼리 혼맥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서대원 2022 월드컵유치위 사무총장은, 최규하 전 대통령의 사위이고 한대현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한성수 전 대법관의 장남이며,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 부인인 한인옥씨의 동생이다. 손지열 전 대법관은 부친 손동욱 전 대법관에 이어 2대에 걸쳐 대법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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