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암시했던 마지막 황제 행차로
  •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
  • 승인 2010.06.0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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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출어’ 관련 기록에 덕수궁 빈번하게 등장…국권 피탈로 인한 ‘마지못한’ 일정 소화 엿보여

1907년 10월12일, 이날 아침 서울의 종로거리에는 이른 시각부터 화려하고 장엄한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새로 막 등극한 순종 황제가 한·일 경찰과 일본 기병대를 앞세우고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능행을 나서는 길이었다. 보신각 앞쪽에는 이미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고등학교, 보통학교 등 서울 시내 관·사립학교에서 총출동한 교원과 생도들이 가지런히 배열해 황제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고, 길옆의 민가와 점포들은 국기를 높이 달아 황제에게 경의를 표시했다.

 

▲ 1906년 덕수궁 ‘대안문’은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래는 고종의 행차 사진. 고종과 순종의 행차 모습은 기우는 국운만큼 사뭇 달랐다. ⓒ이순우

 

그 시절의 관보(官報)에 수록된 황제의 행로와 일정을 살펴보면, 순종 황제가 덕수궁 대한문을 나선 때는 아침 8시였다.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에 해당하는 황토현 신교에서 길을 꺾어 종로로 접어들고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 홍릉에 당도해 이곳에서 행례를 한 것이 두 시간 남짓 후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용두동에서 길을 바꿔 살곶이다리 너머 유릉(裕陵)을 살펴보고 다시 행차로를 거슬러 저녁 6시에 덕수궁으로 되돌아왔다.

일찍이 영국인 여행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1894년 첫 방한 때 우연히 서울의 거리에서 목격했던 조선 국왕 고종의 행차가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이를 두고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1897)을 통해 “이제껏 본 것 가운데 가장 경이로운 스펙터클이었다”라고 자신의 감상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여러 페이지에 걸쳐 그때의 목격담을 서술하면서, 단조로움과 무색으로 가득 찬 서울 거리에서 임금의 거동(擧動)은 태양처럼 활짝 빛난다고도 설파했다.

이때의 행차에 비해 순종 황제의 행렬은 세태의 변화 탓인지 상당히 신식으로 바뀌고 간소화했으나, 그 위세만은 여전했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탈것이 가마에서 마차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차가 등장한 것은 1902년 고종 황제의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 때가 처음으로 알려져 있다. 편리성과 더불어 탑승자의 권위를 한껏 높여주는 도구였기 때문에 마차는 황실과 귀족들이 즐겨 애용했던 교통 수단이다. 실제로 순종 황제는 경술국치 이후 창덕궁에 최첨단 서양 문물인 자동차가 도입되었음에도 1910년대 후반까지 여전히 마차를 일상의 나들이 수단으로 고수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황제의 행차라고 해서 매번 위엄과 영광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거듭되는 국권 피탈이 말해주듯이, 이미 기울어가는 나라의 황제는 때로 ‘마지못한’ 행차를 해야만 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 군복 입은 고종과 순종. ⓒ이순우

 

‘효황제’라는 시호답게 덕수궁의 고종 황제에게 자주 문안 올려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가 방한했을 때에는 격에 맞지 않게 인천까지 행차해 몸소 마중을 나갔다. 1909년 정초에는 당시의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이끄는 대로 기차를 타고 저 멀리 부산과 마산까지 나아가 일본 군함의 위용을 시찰한 끝에 일본 천황의 건강을 축원하는 축배를 든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9년 가을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피격되어 절명했을 때에도 순종 황제의 발걸음은 남산 왜성대에 있던 ‘통감관저(統監官邸)’로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한국 황태자의 태사(太師)라는 직함을 지닌 그의 죽음을 직접 조문하기 위한 행차였다. 1909년 10월28일자 ‘관보 호외’에는 이날의 행차로를 이렇게 적고 있다.

“오후 3시에 돈화문으로 출어하사 파조교, 포전병문, 수표교, 영희전 앞길, 본정 5정목, 수정 3정목, 일출정을 따라서 통감관저에 방림하옵신 후 일출정, 수정 3정목, 본정 5정목, 영희전 앞길, 수표교, 포전병문, 철교, 종로, 황토현 신교, 포덕문 앞길, 대한문으로 덕수궁에 문안하옵시고 오후 5시에 환어하심이라.”

일반적으로 황제의 행차로로는 ‘종로’나 ‘광교’와 같은 대로가 선택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날만큼은 폭은 좁으나 그나마 행차 거리가 짧은 수표교 쪽의 통로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이 당시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 황제까지 이토의 장례식에 맞춰 통감관저로 위문 행차를 했다는 기록도 눈에 띈다.

그런데 위의 행차로 말미에 “덕수궁에 문안하옵시고…운운” 하는 구절이 들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순종 황제의 행차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공간은 바로 덕수궁이었다. 창덕궁으로 이어한 이후에도 틈만 나면 부황(父皇)인 고종 황제가 거처하는 덕수궁을 찾아 문안 인사를 올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대목에서도 순종의 시호가 왜 ‘효황제(孝皇帝)’가 된 것인지 그 까닭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 (1911년 간행)에 수록된, 통감관저에 순종 황제가 마차를 타고 들렀다는 당시 사진. ⓒ이순우

 

그렇다면 과연 순종 황제의 마지막 행차는 언제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대한제국 시절 궁내부 사무관을 지낸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가 남긴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1926)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로부터 30분 후에 전하께서는 답례를 올리기 위해 칙사의 숙소인 총독관저를 방문하였다. 그럴 제에 노부(鹵簿; 행차 때의 행렬과 의장)는 여하히 하느냐의 문제가 있었으나 이번에 한하여 ‘한국 황제’로서의 노부를 사용하기로 되어 새하얀 깃털에 덮인 영국식의 군모에, 푸른 상의에다 붉은 즈봉(바지)이라고 부르는 화려한 기병이 전후에 호위하여 금색의 오얏꽃문장(李花紋章)이 찬연한 황제기(皇帝旗)는 마차의 선두에 펄럭였다. 그때 하늘은 별안간 흐려져 비가 숙연히 내렸다. 이것이 황제로서 최후의 노부가 되었던 것인데, 궁중의 시신이랑 궁녀들은 일종의 비장감에 복받쳐서 눈물을 글썽이며 노부의 자취를 전송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한일 병합 조약’이 발표된 경술국치일의 3일 후 상황으로 1910년 9월1일 일본 천황이 보낸 칙사가 창덕궁 인정전에서 종전의 한국 황제에 대해 이왕책봉식을 거행했고, 이에 대한 답례로 순종 황제가 직접 그의 숙소인 총독관저로 찾아가 인사를 전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비록 황제의 깃발을 앞세우고 황제의 격식에 맞추어 행렬과 의장이 갖춰지기는 했으나, 이때는 이미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이 격하된 뒤의 상황이었다.

망국의 황제는 경술국치 이후 허울뿐인 존재가 되었으나, 그렇다고 이처럼 마지못한 행차가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식민 통치의 개시와 더불어 시시때때로 총독관저를 찾아야 했던 처지는 전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때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원유회와 만찬회에 참석하는 일로, 또 어느 때는 천장절이나 기원절 같은 국경일을 경축하는 일로, 또 어느 때는 일본 천황과 황태후의 죽음을 조문하는 일로, 또 새해를 맞아 꼬박꼬박 천황에게 올리는 신년 하례 전보를 의뢰하는 일로, 또 다른 때는 총독의 하례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창덕궁에서 총독관저로 거동하는 일은 그칠 새 없이 이어졌다. 황제의 위엄과 광영의 행차는 사라지고 어느 새 그 자리는 고난과 굴종이라는 놈의 차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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