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녀·자본에 때묻는 함성
  • 하재근 | 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0.06.2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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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축제로 자리 잡은 거리 응원, 각종 마케팅 등으로 순수성·열정 훼손될 우려

월드컵 거리 응원은 이제 국민의 축제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4년에 한 번 월드컵이 돌아올 때마다 한국인은 열병에 걸린다. 일제히 빨간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서 함성을 내지른다. 월드컵 응원은 한국인의 권리이자 의무가 되었다.

 

▲ 한국이 월드컵 사상 원정 첫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6월23일 새벽, 시민들이 서울광장과 인근 도로를 꽉 메우고 있다. ⓒ시사저널 윤성호

 

시작은 2002년이었다. 그때 한국인은 과거와 결별한 새로운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폴란드전에서 한국팀은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경쾌하게 뛰었고, 절묘하게 골을 넣었다. 유럽팀을 상대로 한국팀이 그런 능력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충격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한국인은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에너지의 분출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고, 그에 고무된 한국인은 거리 응원을 한국만의 국가적 축제로 만들었다.

한국은 응어리진 것이 많은 나라이다. 식민지를 겪고 내전을 겪었다. 가난, 배고픔, 서양에 대한 열패감 속에서 반세기를 살았다. 월드컵은 한국인에게 열패감을 느끼게 하는 대표적인 종목이었다. 2002년에 대표팀이 보여준 경기력은 한국이 더 이상 열패감에 찌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확인시켰다. 이것은 21세기 승리의 한국, 그림자에서 벗어난 한국, 당당한 한국을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1990년대에 배고픔을 모르는 한국인이 나타나 대중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었다. 매체는 그들을 일컬어 ‘신세대’라고 했다. 2000년대에는 과거의 어두움과 완전히 결별한 신인류 한국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감에 넘쳤고 당당했으며, 신체적으로도 과거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세대였다. 신세대의 얼굴이 서태지라면 신인류의 얼굴은 박태환·김연아라고 할 수 있다. 월드컵은 신인류 한국인들이 자신감을 만끽하고 과시하는 이벤트가 되었다. 

인간은 원래 타자와 소통하고 공동체 속에서 유대감을 느껴야만 행복한 존재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모든 개인을 고립시키면서 무한 경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것은 스트레스를 초래했다. 월드컵 때 거리로 뛰쳐나갔던 사람들은 그곳에서 타자와 하나가 되고 거대한 전체가 되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경험인지를 알게 되었다. 또, 월드컵은 평소에 억눌렸던 것들을 4년에 한 번 마음껏 분출하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더욱 월드컵 거리 응원은 국민의 축제로 승화되었다.

국민의 축제는 자본에게 거대한 상업적 기회로 보였다. 자본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던 거리 응원이었는데, 이제는 기업이 응원 노래를 가르쳐주고 구호도 다 알려준다. 장소도 지정해준다. 그러자 순수성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울광장의 상징성도 퇴색했다. 중계 전광판에서도 수익을 뽑아내려고 하고, 거리 응원 촬영을 간섭하는 등 독점 방송사의 행태도 축제를 오염시키고 있다. 거리 응원을 통해 자긍심을 대내적으로 확인하고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한국인의 열정은 초유의 뜨거우면서도 안전하고 질서 정연한 선진 축구 축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승리의 한국을 요구하는 지나친 열기는 결국 그런 분위기마저도 침식하고 있다.

한국팀이 지거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 열정은 증오로 변질된다. 감독이나 선수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선수의 가족마저 증오의 표적이 된다. 김남일 선수의 부인인 김보민 아나운서는 김선수의 실수 때문에 네티즌의 맹폭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식으로 증오의 싹이 자라면서 그것이 사회적 불만과 결합하게 되면 축제가 악몽으로 타락할 수 있다.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다. 

 

▲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열린 6월17일 오후 서울광장에 응원하러 나온 한 여성의 옷에 한국팀의 승리를 기원하는 문구가 쓰여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상업주의와 욕망 뒤범벅되면 남는 것은 ‘막장 카니발’

국민의 축제를 상업적인 기회로 여긴 것은 대자본만이 아니었다. 연예기획사들과 몸매를 뽐내는 젊은 여성들도 월드컵에서 신천지를 발견했다. 월드컵 거리 응원은 신인류 한국인이 신체적 당당함을 과시하고 억눌렸던 것을 분출하는 장이기 때문에, 이 기회를 틈타 연예인 지망생들은 옷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기획사들과 ‘응원녀’들의 노출 전쟁이 시작된다.

2002년에 적당히 벗은 한 응원녀가 네티즌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받은 것이 그 출발이었다. 2010년에 이르러서는 거리 응원이 섹시 화보 촬영장이 되었다. 누가 더 선정적으로 맨몸을 보여주느냐 하는 경쟁이 날로 치열해진다. 어떤 응원녀가 노출로 화제가 되면 곧 그녀의 신상이 뜨고, 연예인이거나 지망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넌더리를 내기 시작했다. 순수한 열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상업적 마케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출 응원녀는 경기가 있을 때마다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한다. 망사 한복에 티팬티라는 성인 쇼걸 수준의 콘셉트까지 등장했다. 섹시 노출 마케팅이 연일 매체를 장식하고 사람들의 짜증도 극에 달했다.

종합하면, 월드컵 응원을 빙자한 상업적 마케팅, 월드컵 응원을 이용한 대자본의 이익 추구, 월드컵 응원을 틈탄 무분별한 열정의 폭주 등이 모두 축제를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열정이 집단적 증오와 폭력, 무질서로 폭주하는 것은 현재 그 싹이 보이는 정도의 수준이고, 노출 마케팅과 자본의 개입은 이미 실질적인 스트레스의 요인이 되고 있다.

월드컵 응원이 상업주의와 욕망, 증오가 뒤엉킨 막장 카니발로 변질되는 것을 막으려면 사회적 각성과 의지가 필요하다. 욕망은 그대로 두면 필연적으로 폭주하기 때문이다. 네티즌은 월드컵이 꼭 한국이 최고임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단지 스포츠 경기일 뿐이다.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월드컵 응원이 국민 된 의무도 아니다. 타인에게 응원과 열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좋아하는 사람만 즐기면 그만이다. 응원을 빙자해 노출 마케팅에 몰두하는 것이나, 월드컵을 독점적 이윤 추구의 장으로 삼으려는 상업주의에 언론이 경종을 울려야 한다. 월드컵에 과몰입하거나 이것을 이용하려는 것을 멈추고 모두가 좀 더 ‘쿨’해질 때 월드컵 응원은 축제로 지켜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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