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 지혜의 오아시스를 만나다
  • 김세희 기자 (luxmea@sisapress.com)
  • 승인 2010.07.20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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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의 근원 / “정의에 대한 논의 부족한 세태 반영”

‘남대서양을 표류하는 구명 보트가 있다. 이 보트에는 네 명의 선원이 타고 있다. 이들이 표류한 지 여드레째 되던 날, 가지고 있던 비상 식량이 바닥났다. 막내 선원이었던 열일곱 살 리처드 파커는 바닷물을 마시다가 병이 나 구명 보트 구석에 누워 있었다. 표류한 지 19일째 되던 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나머지 선원 세 명은 파커를 죽여 나흘간 이 아이의 살과 피로 연명했다. 후에 극적으로 구조된 이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당신이 판사라고 해보자. 어떤 판결을 내리겠는가. 한 사람을 죽여 세 사람을 살린 것이 옳다고 판단하겠는가, 아니면 본인의 동의 없이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 생을 연명한 사람들을 벌할 것인가. 어떤 행위가 더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공리주의자 벤담, 밀 그리고 칸트를 거쳐 미국의 정치철학자 롤스에 이르기까지 묵직한 정치철학적 고민을 담고 있는 책이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이 책은 ‘정의(Justice)’에 대한 화두를 던지며 상식적인 소재에 대해 낯선 의문을 제기한다. 소재가 아무리 상식적이라지만 고대와 근현대의 철학자들을 통해 ‘정의’의 참뜻을 밝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은이인 마이클 샌델 교수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정의’에 다가간다. 그가 20여 년 동안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아 펴낸 책이다.

 

▲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에서 종합 부문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마이크 센델의 베스트셀러 . ⓒ시사저널 윤성호

 

현재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키며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책 <정의란 무엇인가>의 인기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것이다. 출판계에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있다. 지난 5월24일 출간 직후부터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 3위에 올랐던 이 책은 상승을 거듭해 지난 7월8일 교보문고의 온·오프라인 주간 판매 집계에서 신경숙의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를 제치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전국 10개 대형 서점의 판매 현황을 집계한 한국출판인회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마찬가지 결과이다. 지난 30년간 베스트셀러를 집계해 온 교보문고를 기준으로 보면, 인문학 분야의 책이 종합 1위를 차지한 것은 지난 2002년 5~6월 4주간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1> 이후 8년 만이다.

이 책을 펴낸 김영사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김영사에 따르면 7월15일 현재 출판사 출고 기준으로 하루에 1만부씩 판매되고 있다. 이로써 판매량은 전체 합계 13만5천부를 넘어섰다. 1만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로 불리는 인문학 서적으로는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 일반적으로 인문서의 주요 독자층은 30~40대 남성인 데 비해 20대와 여성 독자층이 두터운 것도 특징이다. 김영사 장재경 팀장은 “이 책은 특이하게 20대 독자의 비율이 높다. 한 달 판매량을 보았을 때 20대가 1위를 차지했다. 사회적인 박탈을 경험한 세대에게 속 시원히 설명해주는 무언가가 없었는데, 20대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사회와 정의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정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나간다는 설명이다.

사회 이슈에 대한 옳고 그름을 좀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판단할 잣대 필요해

출판계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분석도 대체로 비슷하다. 지난 6월30일 김영사가 주최한 출판 기념 간담회에서 금태섭 변호사는 “이 책이 잘 팔리는 것은, 정의에 대한 수요가 있는데 정의에 대한 논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샌델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정의’가 궁극적으로 옳든 그르든, 이 책은 논의를 만들어내는 기폭제로서 그 상징성을 갖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는 갖가지 이슈가 끊이지 않았다. 광우병 파동, 촛불 집회, 용산 참사, 4대강 사업 그리고 최근 민간인 사찰 등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팽팽히 맞섰다. 대중들은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어 좀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판단하는 잣대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사회학과 교수는 익명을 전제로 “이명박 정부 들어서 대중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물론 인터넷상의 감시까지 심해지니 대중은 쌓인 불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이 20대의 열독서가 된 것은 다른 의미의 풍선 효과가 아닐까 싶다”라고 해석했다.

2000년대 들어 도서 시장의 주류를 이룬 것은 소설과 자기 계발 도서였다. 김용옥의 <노자와 21세
기>와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 같은 책이 가끔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인기가 유독 눈길을 끄는 이유는 한국 사회의 맥락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려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인 김서현씨는 “‘정의’라는 주제 자체가 주는 뭉클함이 있다. 요즘은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확연히 갈라져 있어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나는 진보를 추구하지만 아무런 준거 기준 없이 진보만 외칠 수는 없지 않나. 누구도 나서서 답해주지 않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얻었다. 가려운 곳을 긁어줄 때의 시원함이랄까. 토익, 자격증에 파묻혀 있다가 오랜만에 오아시스 같은 책을 만난 것 같다”라고 말했다.

혹자는 마이클 샌델 교수를 우파라고 말하지만, 그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개인의 권리와 선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도덕적 믿음에 뿌리를 둔 ‘공동선의 정치’를 지향하는 공동체주의자로 보는 것이 맞다. 그의 책 한 권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킬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정의’가 한국 독자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얻어낼지도 아직 불분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정의’가 20~30대 한국 독자들을 자극시켰다는 사실이다. 이 시점에 왜 ‘정의’의 문제가 젊은이들에게 강한 흡인력을 갖게 된 것일까. 우리 사회에 던지는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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