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 텃밭’까지 탐내는 대기업
  • 이철현·이은지 기자 ()
  • 승인 2010.08.0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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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형 슈퍼·막걸리 업종에서 ‘불공정 경쟁 행위’ 잇따라…영세 업체들, 생존권 위협받아 집단 반발

 

▲ 7월30일 서울 노원구 상계6동 중계역 인근에서 노원구 SSM 입점 반대 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시사저널 윤성호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7월23일 중소기업 영역까지 침범하는 대기업들의 행태를 비난하고 그 사례로 기업형 슈퍼마켓(SSM; super supermarket)과 막걸리 업종을 지목했다. 대통령이 느닷없이 친서민 행보를 보이면서 대기업을 질타하자 검찰,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서 대기업이 저지르는 불공정 경쟁 행위를 조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해당 업종에 진출한 대기업들은 당혹스러워하고 영세 업체들은 대기업들의 행태를 질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7월30일 오후 5시, 서울 노원구 상계6동 하라스포츠센터 정문 앞. 영세상인 20여 명이 모여들었다. 하라스포츠센터 1층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 홈플러스에 입점 포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위해서다. 시민단체 관계자까지 가세한 시위대는 ‘삼성테스코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기습 입점 중단하라’ ‘영세상인 다 죽이는 기업형 수퍼마켓 반대한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들어오지 마’ 같은 팻말을 들고 이성노 상계6동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의 선창에 맞추어 구호를 외쳤다. 8월 첫째 주 홈플러스가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 하라스포츠센터를 중심으로 반경 5백m 안에는 대형 마트 일곱 곳과 영세 점포 27곳이 영업하고 있다. 이미 포화 상태인 소형 유통 시장에 삼성테스코가 운영하는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들어온다고 하니 영세상인들은 생존권 위협까지 느끼고 있다. 이성노 상계6동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이제 망하는구나 하는 생각뿐이다. 살길이 막막해 잠도 오지 않는다. 삼성테스코가 영세상인의 코 묻은 돈까지 욕심내야 하나”라고 말했다.

SSM은 1천~3천㎡ 규모의 가게를 일컫는다. 슈퍼마켓보다는 크지만 대형 할인점보다는 작다. 지난 1990년대에 처음 등장해 지난 6월 말 현재 전국에 7백93개로 늘어났다. 시장 규모는 연간 3조원 안팎이다. 롯데쇼핑의 롯데슈퍼, 삼성테스코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신세계 이마트의 이마트 에브리데이, GS리테일의 GS슈퍼마켓이 골목마다 들어서면서 소규모 가게는 하나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 졸지에 생존권까지 위협받게 된 영세상인들의 반발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지역 주민 민원 차원에서 중재에 나서고 있으나 별 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SSM 개설을 규제하는 법안이 상정되어 있지만 여당이 법안 처리에 적극적이지 않아 입법이 늦어지고 있다. 

비난 여론이 쏟아지고 영세상인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대기업 유통업체들은 한 발짝 물러서고 있다. 롯데쇼핑은 지역 소상인의 반발이 심해 시끄러운 곳은 점포 개설을 자제하고 있다. 삼성테스코는 직영점 대신 점주가 지분으로 참여하고 홈플러스가 운영을 지원하는 가맹점 방식을 확대하고 있다. 신세계 이마트는 동네 슈퍼마켓에 이마트 물품을 공급하는 도매업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성노 위원장은 “대기업이 내놓는 유화책은 ‘눈 가리고 아웅식’ 편법이다. 경영권이나 절대 다수 지분을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어 영세상인에게 돌아갈 몫은 미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지난 7월13일 서울올림픽파크텔에서 ‘한국막걸리제조자협회’ 준비 모임이 처음으로 열렸다. ⓒ한국막걸리 제조자 협회 제공

 “대기업의 막걸리 시장 진출, 유통망 확대와 연구·개발 위주라면 환영”

막걸리 시장에도 대기업들이 잇달아 진출하고 있다. 막걸리 산업을 키우기 위해서 대기업의 자본력과 유통망이 필요하다는 견해보다 막걸리 맛을 획일화하고 중소 제조업체를 도태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최근 중소 막걸리 제조업체 20여 곳은 ‘한국막걸리제조자협회’를 결성했다. 대기업들의 막걸리 시장 진출 움직임을 조직적으로 막기 위해서다.

막걸리 시장에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대기업은 진로와 롯데주류이다. 지난해 초 막걸리 열풍이 불자 진로는 지역 술도가와 주문자 생산 방식(OEM)으로 일본 수출 계약을 맺었다. 롯데주류 역시 몇몇 술도가와 함께 일본 수출에 나섰다. 내수 시장으로 바로 뛰어들면 ‘소주와 맥주처럼 막걸리 시장까지 장악하려드느냐’는 비난 여론이 일 것을 염두에 둔 우회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CJ가 오는 8월부터 내수 시장에 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CJ가 뛰어들면서 진로와 롯데주류 역시 국내 시장으로 뛰어들 가능성이 커졌다.

이 때문에 대기업이 내수 시장에 진입하면 중소 제조업체는 하청업체로 전락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소 제조업체들은 OEM 업체가 되기 위해 자기 브랜드를 버리고 진로와 롯데주류의 유통 정책에 맞춰 설비나 조직을 재정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지출이 따른다. 경기도 가평에 있는 막걸리 제조업체 ㅇ사는  진로의 OEM 업체로 선정되기 위해 60억원을 들였다. 박 아무개 대표는 “대기업과 손을 잡아야 유통망을 확보할 수 있으니 빚을 지더라도 설비 투자를 해야 했다”라고 털어놓았다. 자기 브랜드도 버렸다. 그러나 계약 기간은 길어야 1년이라 해마다 재계약해야 한다. 재계약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투자 비용을 회수할 길이 막힌다. 하명희 한국막걸리제조자협회장은 “대기업에 의해 선택되는 제조업체는 소수에 불과하다. 선택받지 못한 제조업체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선택된 제조업체도 기간 연장이 되지 않으면 납품할 곳을 잃어버려 도태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납품업체 선정 과정에서 막걸리 제조 비법까지 새어 나간다. CJ는 유통을 맡을 세 개 업체를 선정하기 위해 26개 제조업체를 실사했다. 제조업체는 이 과정에서 제조 비법을 털어놓아야 한다. ㅂ 막걸리업체 역시 롯데·오리온·농심 등 막걸리 산업에 관심이 있다는 대기업들은 모두 한 번씩 실사를 나왔다고 한다. ㅂ 막걸리업체 대표는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이것저것 다 알려주었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아차 싶더라”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중소 제조업체들이 대기업과 손잡지 않을 수도 없다. 규모의 경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공급처를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오리온 자회사 미디어플렉스와 합병한 참살이탁주의 윤진원 참살이L&F 상무(당시 공동대표)는 “서울탁주와 국순당처럼 자본력을 가진 업체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유통망을 확보해야 하고 시설을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중소 제조업체가 주주들의 투자를 받아 사업을 진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회사를 키우기 위해 대기업과 합병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대기업이 막걸리 시장에 뛰어들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탓이다. 윤진원 참살이L&F 상무는 “프랑스 와인, 독일 맥주, 일본 사케가 성공한 것은 지역 농민과 술 제조업자들이 긴밀히 공조하고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지역 전통성을 가진 막걸리 제조업체의 역사성을 살려주면서 친환경 쌀 등 재료의 고급화를 꾀해야 한다. 정부는 제조업체들이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고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대기업과 중소 제조업체가 공생할 수 있는 시장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임준선
▶한국막걸리제조자협회가 결성되었다. 계기가 무엇인가?   

이전에 비슷한 성격의 단체로 ‘탁·약주중앙회’가 있었다. 하지만 유명무실화하면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에 여러 막걸리 제조업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왔다. 그러다가 대기업의 막걸리 시장 참여가 뚜렷해지면서 업체 내에서 ‘이러다가는 살아남을 길이 없겠구나’ 하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그러던 찰나 지난 6월21일, 농수산물유통공사(aT) 주관으로 ‘막걸리수출협의회’가 만들어졌다. 막걸리수출협의회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오면서 막걸리수출협의회 소속 사람들끼리 3~4번 정도 준비 모임을 가졌다. 그러다 지난 7월13일 ‘한국막걸리제조자협회’를 결성·출범했다.  오는 8월11일에 전국 제조업체 대표들이 모여서 전국대회를 열 계획이다.

▶이때 모여서 어떤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가?

대기업이 막걸리 제조에까지 뛰어들면 절대 안 된다는 내용이 주요 의제가 될 것이다. 물론 대기업이 막걸리 시장에 참여하는 데에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유통망을 확보해 막걸리 시장을 확대할 수 있고, 대기업 자본이 연구·개발(R&D)에 투자되어 막걸리의 질적 향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여야 한다. 대기업이 제조에까지 손을 대면 맛이 획일화되어 막걸리의 다양성이 무너진다. 그렇게 되면 어렵게 살아난 막걸리 열풍도 시들어질 것이고, 결국 막걸리 시장 전체가 도산되고 말 것이다.

▶정부는 대기업의 진출을 제한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독과점을 방지하고 영세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독점 규제 및 공정 거래에 관한 법률’이나 ‘중소기업 진흥에 관한 법률’ 따위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주류는 중소기업 진흥에 관한 법률에 해당되지 않는다. 막걸리 역시 중소기업 보호 산업으로 지정하는 방안 등을 고려해볼 수 있다.

▶대기업이 막걸리 시장에 뛰어들지 않았던 과거에 막걸리업체는 많았지만 제조법이라든지 발효 공법, 재료 등에서의 다양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나?

주세법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제법과 발효 방법, 첨가물 사용 여부 등 모든 것이 법으로 규제되어 있었다. 당연히 다양화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제조업체가 영세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제 조금씩 규제가 풀리면서 ‘과일 첨가’는 가능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규제가 많다. 정부가 제조업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규제를 하나씩 풀어주어야 한다.

▶막걸리 시장을 키우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로 대기업의 참여는 불가피하다는 시각이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기 위한 방안은 없을까?

영세한 막걸리업체의 처지에서는 회사를 키우기 위해 대기업과의 제휴가 불가피하다. 내수 시장에서는 OEM 방식이 아닌 자사 브랜드를 살려야만 막걸리의 다양성을 해치지 않을 수 있다. 막걸리 산업을 키우면서 막걸리의 세계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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