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반란, 죽음으로 저항했다
  • 한기홍 | 자유기고가 ()
  • 승인 2010.08.0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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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출간 평전에 비친 12·12 사건 당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고 김오랑 중령의 일생

 

▲ 생전의 김오랑 중령(가운데)은 체력이 강했고 후배들에게 ‘냉철한 사나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1979년 12월13일 오전 0시15분,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전사령부에 총성이 울렸다. 전날 저녁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불법 연행한 합수본부측의 3공수여단 병력 10여 명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벌인 ‘활극’이었다. 당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던 김오랑 중령은 권총 한 자루로 반란군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온몸에 M16 총탄을 맞고 숨졌다. 당시 나이 35세.  

김오랑 중령(육사 25기·김해농고 졸)의 죽음은 장태완 장군과 비슷하게 일가족의 풍비박산을 초래했다. 김중령의 어머니는 2년 뒤 세상을 떴고, 삼촌과 큰형 등도 김중령의 죽음을 애통해하다 세상을 등졌다. 특히 부인 백영옥씨의 죽음은 비극적이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평소 앓았던 시력 약화증이 더욱 심해져 결국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1991년 6월 거주하던 불교 시설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장님이 된 눈으로 남편의 묘소를 자주 찾아 비석을 부여안고 통곡하곤 했다.

김중령의 죽음은 12·12 반란 진압의 꽃이라 할 만하다. 반란 진압은 실패했지만 김중령은 반란군에 맞서 가장 철저하고도 ‘의식적인’ 저항 정신을 보여주었다. 죽음을 각오한 거의 유일한 저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 김충립씨, 정병주 사령관의 체포를 지휘했던 박종규 당시 3공수 15대대장의 증언을 통해서도 김중령의 저항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김충립씨(미국 거주)는 “당시 김중령이 체포조가 들이닥칠 것이라는 정보를 파악하고 권총의 실탄 장전 상태를 확인하는 등 진입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라고 증언했다. 체포팀을 이끌었던 박종규 3공수 15대대장은 “최세창 여단장으로부터 김오랑 비서실장만이 무장한 채 준비하고 있으니 정병주 사령관을 연행할 때 그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라고 증언했다. 특전사의 보안부대에서 합수본부측에 김중령의 동선과 대비 태세를 보고했다는 증거이다.

김오랑은 1944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4형제 중 막내로 큰형과는 15년, 셋째형과는 8년 터울이다. 늦둥이로 자라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당시 김해의 유일한 고등학교였던 김해농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1965년 육사 입학 시험에 합격했다. 김오랑의 육사 합격은 김해농고 34년 역사 중 최초의 ‘사건’이었다. 학교 정문에 그의 육사 합격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렸고 당시 김해농고 조희순 교장은 직접 김오랑의 집을 방문해 기쁨을 나누었다.

입학 당시 육사 교장은 정래혁 중장, 참모장은 백문 준장, 생도대장은 조재준 준장이었다. 교수 요원으로는 김대중 정권 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육사 13기 출신 임동원씨가 있었다. 임씨는 비교사회학을 가르쳤는데, 비교사회학의 내용은 공산주의 비판이었다. 그 외 민병돈 소령(독어), 강재륜 중령(철학), 김종헌 대위(물리) 등이 있었다.

“인맥 관리보다 임무 완수에 철저했던 비서실장”

그는 왜소했지만 체력이 강했고, 과외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당시 생도훈육지도부의 종합 평가에는 “가정 환경은 경제적 여유는 없으나 화목하였고 향후 다른 생도보다 인생관과 국가관 확립의 전망이 뛰어날 것으로 보임”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재학 시절 ‘사랑과 투쟁’을 생활 신조로 삼고 있었는데 이 신조에 대해 졸업 때 한 후배가 풀이한 글은 소박하지만 인상적이다.

「 ‘사랑과 투쟁’ 이것이 그의 4년이며 또 일생이 될지도 모른다. 공과 사의 구별이 엄격한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 레슬링으로 단련, 태권도의 권위자였던 그는 불의와의 타협을 모르는 냉철한 사나이. 」

김오랑 소위는 임관을 하자마자 강원도 양구에 있는 2사단 32연대 수색중대로 전입 명령을 받았다. 1970년 맹호부대 소대장으로 베트남에 갔고 1974년 특전사에 배치되었다. 서울 송파구 오금동에 부대가 있는 3공수여단 16대대 19지역대 중대장이 공수부대에서의 그의 첫 보직이었다.

1979년 3월 그는 특전사령부 행정장교로 보직을 받게 된다. 특전사령관의 행정장교 보직은 사령관 비서실장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의 주요 임무는 사령부로 보고되는 정보 보고와 작전 상황을 판단해 중요한 상황만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사령관에게 올라가는 문서는 비서실장을 거쳐야만 한다.

특전사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를 가장 먼저 알고 이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비서실장의 역할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정치적 역할’에는 익숙지 않은 야전 군인이었다. 사령관 비서실장은 분에 넘치는 사치였을 수 있었으나 정병주 사령관은 그의 이런 측면을 오히려 더 높이 평가했다. 

▲ 고 김오랑 중령의 부인 백영옥씨는 생전에 남편의 묘소를 자주 찾아 통곡했다. ⓒ한겨레
1967년 공수단장을 거쳐 1974년 3대 특전사령관으로 돌아온 정병주 소장은 7·9·11·13공수여단 창설을 마무리하며 당시 특전사의 체계를 완성한 인물이다. ‘특전사의 전설’로 존경받던 정사령관 역시 무인의 길만 고집했던 인물로서 김오랑과 성향이 같았다. 당시 특전사 작전과장으로 지휘통제실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중환씨(육사 20기·당시 중령)는 김오랑 소령을 ‘예의 바르고 똑똑한 후배, 인맥 관리보다 임무 완수에 철저했던 비서실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12·12 당일 그의 행적은 정병주 사령관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특전사령관으로 상징되는 특전사를 보위하기 위한 임무 수행이었다는 것이다.

김오랑 중령에 대한 추모 사업은 특전사 20년 후배 김준철씨가 주도하고 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지난해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건의안’이 여야 국회의원 48명에 의해 공동 발의되기도 했다. 김씨는 김중령의 동기생과 선후배, 가족과 지인들을 수년간 취재해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김오랑이 없었다면 우리 군의 역사, 현대사는 비겁하고 참담한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공훈장 추서와 추모비 건립 건의안이 국회를 거쳐 실현될 날을 그는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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