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 현재와 미래의 얼굴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8.1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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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시리즈 - 한국의 신 인맥 지도 | 카이스트·포스텍

 

▲ 포스텍 전경(왼쪽), 카이스트 정문(오른쪽) ⓒ연합뉴스·시사저널 박은숙

1972년 출범한 카이스트와 1986년 개교한 포스텍은 오래지 않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공계 고등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연구 수준으로는 이미 상위권에 오른 이들의 꿈은 노벨상 수상이다.  

우수한 교수와 학생을 유치하고 강의를 비롯한 캠퍼스 생활 전반에서 영어 공용화를 통해 학교 수준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끌어올리는가 하면, 연구 실적이 부진한 교수를 탈락시켜 이른바 ‘철밥통’에 철퇴를 가한 것이 두 대학의 공통점이다. 두 학교가 추진한 개혁의 돌풍은 국내 대학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는 대학원 대학으로 출범한 최초의 연구 중심 대학이다. 1980년대 말에는 학부 과정인 과학기술대학과 통합해 이공계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카이스트는 우리 산업계가 요구하는 고급 과학기술 인력의 양성과 산업 현장에서 직접 응용할 수 있는 연구에 비중을 두었다. 1990년대 초부터 국내 이공계 대학들이 연구 실적을 챙기고 해외 학술지 논문 발표를 중시한 점, 자체적인 박사 인력 증원과 자질 향상에 기울인 진지한 노력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카이스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6년 7월 취임한 서남표 총장은 국내에서 과학기술과 경영 분야의 최고 대학으로 성장한 카이스트를, 한 발짝 더 나아가 세계 최고의 연구 중심 대학으로 발전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영어 강의, 입학사정관제 도입, 교수 정년 보장 제도 개선, 종합 역량 평가 방식의 학사 제도 개편을 주도했다. 강화된 교수 정년 보장 심사로 4년간 1백48명의 교수 중 연구 실적이 부진한 24%를 탈락시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카이스트는 영국의 더 타임스와 대학 평가 기관 QS가 공동 발표한 ‘2009년 세계 대학 평가’에서 공학 및 IT 분야 세계 21위라는 국내 대학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는 하버드 대학 22위, 프린스턴 대학 23위, 코넬 대학 24위 등 미국의 명문 대학보다 앞선 성적이다. 종합 평가 순위에서는 2008년 85위에서 2009년에 26단계 올라선 69위를 차지해 미국의 조지아텍(86위), 퍼듀 대학(87위), 네덜란드의 델프트 공대(83위)를 앞질렀다.

카이스트에는 엄청난 규모의 기부금이 답지하고 있다. 지난 4년간 총 1천4백억원이 넘는 기부금이 모였다. 기부 건수는 2006년 1천여 건에서 지난해 3천3백4건으로 세 배 이상 늘어났다.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을 선도할 인재를 양성해달라”라는 것이 기부자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외곬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으로 행동하는 과학 인재’의 양성을 꿈꾸는 카이스트는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숱한 동문을 배출했다. 100 대 1의 경쟁을 뚫고 하버드 대학 의대 교수로 임용된 윤석현 박사(물리학과 졸업·카이스트 이학박사), 38세에 한국 여성 처음으로 MIT(메사추세츠 공과대학) 수학과 종신교수가 된 김주리 박사, 세계 최초로 물에 녹은 단백질 모양의 변화를 실시간 관찰해 대표적 과학 잡지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논문을 실은 이효철 박사(카이스트 화학과 교수),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현재 박사(항공우주공학), 현재 파견 근무 중인 김태민 박사(전산학)가 그들이다.

 

카이스트에서는 밤 11시 ‘땡’ 해야 여가 생활이 시작된다. 고시생들이 7시간 자고 11시간 공부해서 ‘세븐 일레븐’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하루 4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카이스트 연구원들은 스스로를 ‘나폴레옹’이라고 부른다. 카이스트의 2만9천여 동문은 대기업(23%), 중소기업과 벤처기업(18%), 대학 강단(13%), 정부 출연 연구소(10%), 정부 부처(1%), 유학과 해외 거주(6%) 등으로 분포되어 있다.

엔씨소프트의 최고전략책임자(CSO) 겸 부사장인 윤송이 박사는 갖가지 신기록 보유자이다. 서울과학고 2학년을 마치고 조기 졸업한 뒤 카이스트를 수석 졸업하고, MIT 미디어랩에서 3년6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녀가 세운 ‘만 24세 박사’는 아직까지 누구도 깨지 못한 기록이다. 미국 컴퓨터공학협회의 최우수 학생논문상도 수상했다. 휴대전화 서비스 회사인 와이더댄닷컴(SK그룹 자회사) 이사, SK텔레콤 상무를 거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지능 시스템(Intelligence System) 전문가인 윤박사는 월스트리트저널 선정 ‘주목할 세계 50대 여성 기업인’(2004년), 세계경제포럼(WEF) 선정 ‘차세대 지도자’(2006년), 보아오포럼(BFA) 선정 ‘차세대 지도자’(2007년)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동생인 윤하얀 박사도 서울대 자연대를 수석 졸업한 한국 최강의 과학 자매이다.

소속한 직장에서 제공한 연수 기회를 활용해 학위를 취득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황백 제일모직 대표이사 사장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물산에 입사하자마자 카이스트에 입학해 산업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삼성물산에 오래 몸담고 있다가 삼성SDS를 거쳐 제일모직으로 옮겨 현직에 이른 그는, 지난해 제일모직 창사 55주년을 맞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소재를 개발해 첨단 소재 전문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라는 청사진을 밝혔다.

 

학부 시절 문과를 전공한 사람이 이공 계통 일을 맡아보는 데는 카이스트에서 했던 연구가 밑거름이 된다.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의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이 TV용 차세대 LCD 사업과 LED TV 패널 사업을 지휘하는 것은 그가 카이스트에서 공부한 산업공학(석사)과 무관하지 않다. 김대훈 LG CNS 대표이사는 서울대 경영학과 학사와 카이스트 산업공학 석사 출신이다. 그는 금성사에 입사한 후 LG-EDS 시스템의 전자 사업 부문에 오래 관여했다(LG-EDS 시스템은 2002년에 LG CNS로 개칭되었음). 부엌 가구 전문 업체인 에넥스(ENEX)의 박진호 사장은 통신위성을 개발하던 과학자 출신이다. 서울대 항공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석·박사 과정을 마친 후 한국통신(현 KT)에서 무궁화위성 발사기술부장을 지냈다. 에넥스 창업주 박유재 회장의 차남인 박사장은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2002년 상무로 입사했고, 2005년 대표이사를 맡았다. 오리표 싱크대가 이 회사의 전신이다. 에넥스의 신제품에 적용되는 과학적인 유형 분석과 그에 따른 맞춤형 가구 제공이라는 아이디어는 박사장이 과학자 출신이라는 데서 연유를 찾아볼 수 있다.

 

젊은 과학자들, 해외 학계에서도 중추적 역할

철강 기업 포스코가 지속적인 연구 개발과 인재 양성을 위해 1986년에 설립한 포스텍(옛 포항공대)은 최근 들어 ‘대학 건물만 빼고 확 바뀌는’ 분위기이다. 포스텍의 이런 움직임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중심 대학으로 우뚝 서겠다’라는 취지로 마련된 ‘포스텍 비전 2020’이나 ‘국제화 3개년 프로젝트’에서 잘 나타난다.

포스텍은 그동안 ‘철밥통’으로 불렸던 교원 정년 보장 제도를 전면 개편하는 대수술을 단행했다. 그리고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신입생을 뽑았다. 지난해 포스텍은 점수 일변도의 선발 방식에서 탈피해 입학사정관들이 잠재력을 다면적으로 평가하고 이공계 분야에서의 성장 가능성을 따지는 방식으로 신입생 3백명 전원을 선발했다. 국내 최고의 연구 중심 대학을 지향하며 학생 1인당 교육비 지출 1위 등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포스텍은 최근 ‘국제화 3개년 프로젝트’를 마련해 ‘제2의 개교’를 방불케 하는 혁신적인 전략을 펼치고 있다. 우수 연구 인력을 적극 유치하고 최초로 캠퍼스 영어 공용화를 추진한 것이 그 한 예이다. 이 계획은 2020년까지 세계 20위권 대학으로 성장하겠다는 ‘포스텍 비전 2020’의 세부 실천 방안이다.

24년 역사를 지닌 포스텍은 첫회 졸업생들이 40대 초반이어서 저명 인사의 반열에 오른 동문은 아직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동문 중 박사학위 소지자의 30% 정도가 국내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뛰어난 연구 성과로 명성이 알려진 학자들이 적지 않다. 싱가포르 국립대가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며 스카우트한 장영태 교수는 지난 2000년, 32세에 미국 명문 뉴욕 대학의 화학과 조교수로 기용되어 화제를 모은 인물이다. 포항공대 1회 졸업생으로 모교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토종 포스테키언(Postechian)’이다. 통상 방학 기간 3개월을 제외한 9개월분의 월급을 지급하는 미국 대학 사회에서 당시 뉴욕 대학은 장박사에게 9개월분 월급 6만5천 달러에 2개월분을 더해 8만 달러를 제시했다. 특히 5년간 연구 후 종신교수(tenure track)가 되는 정규 교수 자격에 40만 달러의 연구 정착비(seed money)까지 제공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가 그때까지 발표한 논문 41편 중 31편이 외국 최고 권위 학술지에 실려 연구 업적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26세의 나이에 애리조나 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어 주위의 시선을 끌었던 손영준 교수(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학사,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석·박사)는 10년 만인 36세에 정교수로 초고속 승진한 기록의 인물이다. 손교수는 지난 2005년 미국 산업공학회가 수여하는 ‘젊은 산업공학자상’을 한국인 최초로 받는 등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상들을 수상했다.

나노 기술의 권위자 김광수 교수(포스텍 화학과) 연구팀의 초고집적 은(銀) 나노선 배열 합성 성공은 전산분자 설계와 물성분석 실험을 담당한 홍병희씨(화학과 박사 과정), 전자 현미경 사진을 해석한 배성철 박사(물리화학), 결정 구조를 만든 이치완 박사(유기합성), 나노선의 양자 현상을 계산해낸 정석민 박사(전산양자물리·전북대 교수)의 협동 연구가 이루어낸 개가이다. 이 밖에 포스텍 출신 토종 박사로서 영국 랭커스터 대학 컴퓨터학과 교수 이재준 박사, 미국 UC데이비스 기계항공학과 박재완 박사, 인디애나 주립대 의대 생화학 및 분자생물학과 임현석 박사 등 젊고 유능한 석학들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빛내고 있다.

포스텍은 작지만 강한 대학이다. 포스텍은 몇 가지 괄목할 만한 실적을 자랑한다. 우선 주목되는 시설이 1994년 준공된 방사광 가속기이다. 방사광 가속기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전자와 하전 입자가 원운동을 할 때 방출되는 전자기파를 이용해 단백질 결정 구조 분석, 광화학 반응 등 순수 과학적 연구와 응용에 활용되는 국내 유일의 범국가적 연구 시설이다. 많은 건설비와 가동 경비 및 연구비가 소요되므로 오늘날 가속기 과학은 우주과학과 더불어 거대 과학(big science)의 하나로 불린다. 이 가속기는 연구자, 연구소, 국가에 상관없이 누구나 필요하면 이용할 수 있다.

가속기를 통해 거둔 연구 성과는 순수 과학과 의학, 공학을 망라한다. 대표적인 것이 발기부전 치료제로 각광받은 비아그라의 구조 분석이다.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 잡은 삼성전자의 애니콜 휴대전화 단말기 역시 여기서 도움을 받았다. 제품의 고장 원인인 LCD 창과 회로 연결 부위의 접촉 불량을 밝혀냄으로써 품질을 개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증폭되는 것을 차단하는 단백질의 구조를 규명한 것도 방사광 가속기였다. 포스텍 오병하 교수는 가속기를 이용해 단백질 간의 상호 작용에 대한 연구 끝에 실체를 밝혀냈다.

지난 3월 포스텍은 ‘노벨상 사관학교’로 불리는 독일 막스 플랑크 재단의 연구센터를 유치했다. 포스텍의 연구 역량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결과인데, 이로써 막스 플랑크 연구진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더욱 수준 높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2005년 정원 1백20명의 전문 대학원으로 개원한 포스텍 철강대학원은 철강 분야 최고 수준의 세계적 석학들을 초빙하고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최첨단 연구 장비를 갖춘 철강 교육·연구 전문 기관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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