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기업 금고에 3백5조원 쌓여 있다
  • 이철현 기자·손유리 인턴기자 ()
  • 승인 2010.08.1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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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 상당수가 지난 2분기에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면서 ‘어닝서프라이즈’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청와대와 재정경제부는 국내 대기업들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면서도 투자와 고용을 늘리지 않아 그 혜택이 중소기업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시사저널>은 국내 대기업이 올해 상반기에 거둔 영업 실적이 어느 정도인지, 추가 투자 여력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위해 국내 100대 기업의 이익 잉여금 누적액을 추산했다. 조사 결과 국내 100대 기업이 쌓아둔 이익 잉여금은 3백5조원에 이르고, 상위 10대 기업의 경우에는 1백7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러스트 이경국

‘3백5조원.’ <시사저널>이 국내 100대 기업의 이익 잉여금(2010년 6월 말 기준)을 추산한 금액이다. 사상 최고치이다. 상당수 국내 대기업이 올해 상반기 사상 최대 영업 실적을 거두면서 이익 잉여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사상 최대 영업 실적은 엉뚱하게 청와대와 재정경제부가 ‘대기업 때리기’에 나서는 빌미가 되고 있다. 국내 대기업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고 있으나 투자나 고용을 늘리지 않아 그 혜택이 중소기업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대기업 때리기’의 요지이다.

<시사저널>은 국내 대기업이 거둔 영업 실적이 어느 정도인지, 추가 투자 여력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위해 국내 100대 기업의 이익 잉여금 누적액을 추산했다. 1분기 재무제표에 나온 이익 잉여금 누적액에 2분기 당기 순이익을 합산해 2분기 이익 잉여금 누적액을 산출했다. 28개 업체는 아직 2분기 잠정 영업 실적을 공시하지 않은 탓에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2분기 실적 추정치를 사용했다. 증권사마저 추정치를 발표하지 않은 업체 9개사는 1분기 이익 잉여금 누적액을 사용했다. 증권사 추정치는 실적치와 비교해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추정치가 없는 9개사는 증권사 애널리스트로부터 관심을 끌지 못하는 만큼 2분기 실적에서 1분기와 비교해 유의미한 변화는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따라서 전체 오차 금액은 2천억~3천억원을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100대 기업 중 상위 10대 기업이 쌓은 이익 잉여금은 1백72조8천억원이다. 10대 기업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기업은 대한민국 최대 기업 삼성전자이다. 삼성전자는 분기 실적 기준으로 사상 최고치 행진을 거듭한 덕에 이익 잉여금 누적액이 78조2천억이나 된다. 국내 100대 기업 이익 잉여금 누적치의 25%가 넘는 액수이다. 보유 현금 자산만 9조2천억원이다.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단기 투자 자산까지 합치면 20조원이 넘는다. 포스코는 30조원을 쌓아두고 있다. 삼성전자에 이어 2위이다. 이 가운데 현금성 자산과 단기 투자 자산은 6조원이 넘는다. 현대차는 17조원이 넘는 이익 잉여금을 갖고 있다. 현대·기아차그룹 3인방인 현대차, 기아차(3조원), 현대모비스(7조원)가 쌓은 이익 잉여금 합계액은 27조원으로 포스코에 육박한다. 이 밖에 국내 최대 이동통신사인 SK텔레콤이 10조원의 이익 잉여금을 얻었다. 전체 100대 기업 가운데 이익 잉여금 누적액이 마이너스인, 즉 영업 손실액이 많아 이익 잉여금으로 보전해도 결손금이 남아 있는 업체는 7곳밖에 없었다.

 

▲ ‘대기업 때리기’에 앞장선 이명박 대통령과 윤증현 재정경제부장관이 국무회의에 참석해 경제 정책 기조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익 잉여금은 기업이 영업 활동으로 벌어들인 순이익에서 임원 상여금이나 주주 배당액을 빼고 남은 것이다. 경기 하락 탓에 발생할 수 있는 영업 손실을 보전하거나 신규 사업에 진출할 때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된다. 이익 잉여금 누적액은 기계 설비나 시설 매입에 지출되었으나 아직 감가상각이나 감모손실 비용으로 처리하지 않은 금액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익 잉여금 전액을, 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모아둔 돈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 잉여금은 주주 배당이나 사업 확장에 쓰고자 기업 내부에 유보한 금액이다. 이익 잉여금 누적액이 사상 최고치에 이른다는 것은 국내 대기업들이 주주 배당을 적게 하고 사업 확장이나 신규 투자에 나서기를 주저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윤석민 안진딜로이트회계법인 회계사는 “미국 대기업들은 이익 잉여금을 많이 쌓지 않는다. 주주에게 배당하거나 신규 사업 투자에 사용한다. 이와 달리 경기 변동성이 큰 탓인지 국내 대기업들은 신규 투자를 꺼리고 있다. 더욱이 배당까지 소홀히 하다 보니 이익 잉여금이 사상 최고치로 쌓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 78조원이 넘는 이익 잉여금을 쌓아놓고 있는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 ⓒ시사저널 유장훈

이명박 대통령이 일관되게 유지한 경제 정책은 트리클다운(trickle down·낙수) 이론에 기초했다. 트리클다운은 ‘물이 넘쳐 바닥을 적신다’는 뜻이다.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가 늘어나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고 결국 국가 경기를 자극해 경제가 발전하며 국민 복지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수출 기업을 위해 인위적으로 고환율 정책을 유지하는가 하면, 법인세 실질 부담을 크게 줄였다. 덕분에 국내 대기업 상당수가 지난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잇달아 사상 최고치 실적을 발표하면서 ‘어닝서프라이즈’ 사태를 일으키고 있다. 지금 대기업 금고마다 돈이 넘쳐나고 있다. 이쯤이면 대기업 금고 밖으로 돈이 흘러나와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돈은 흘러넘치지 않고 대기업 금고 안에서 계속 쌓이기만 한다. 이 탓에 중소기업은 여전히 힘들다고 불평한다. 실업률은 미세하게나마 낮아지고 있으나 청년 실업률은 여전히 높다. 대기업마다 채용 인원을 크게 늘리고 있으나 청년 실업자는 넘쳐난다. 세계 금융 위기 와중에 국내 대기업이 거둔 실적은 놀랍다. 몇 가지 경기 불안 요인이 잠재되어 있기는 하나 지난 상반기 경제 성장률이 잠재 성장률을 넘어설 정도로 경기 회복 징후가 뚜렷하다. 그 혜택을 대기업과 부유층이 고스란히 가져간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정부·여당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완패하자 이명박 정부가 정책 기조를 ‘친(親)서민’으로 바꾸면서 정부 각료들이 대기업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 국내 대기업 집단은 느닷없이 시작된 대기업 때리기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산발적으로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투자와 고용 확대에 나서고 있다. 기업마다 신규 채용 인원을 10~30% 늘리고 투자 금액도 상향 조정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투자 의사 결정이 수익성이나 안정성 같은 사업 논리가 아니라 정치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대기업이 나서서 사회적 기업가들을 키워라”

국내 대기업들은 세계 금융 위기 탓에 전세계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휘청거렸으나 국내 대기업들이 오히려 약진할 수 있었던 것도 내부에 유보한 자금 덕이라고 강변한다. 세계 자동차업계 1위 자리를 다투던 GM과 도요타가 사상 최대 위기에 빠져들 때 현대·기아차그룹이 시장 지위를 높일 수 있었던 것도 투자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심상달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원은 “국내 100대 기업이 가진 누적 이익 잉여금이 3백5조원이 넘으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가 투자나 고용을 늘리라고 무조건 압력을 가하는 것은 그 효과가 제한적이다”라고 말했다. 성낙인 서울대 법대 교수는 “추가 투자 여력이 있는 기업으로 하여금 산업 발전과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에 투자하도록 유도해야겠지만, 기업이 얼마나 내부 유보할지에 대한 판단은 기업이 가장 잘 안다. 따라서 정부가 나서 투자를 재촉하는 모양새는 적합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정부와 대기업이 스스로 나서 ‘사회적 기업가’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회적 기업가는 소득 하위 계층에게 주택이나 서비스를 공급하는 시장을 만들어낸다. 시장 논리로서는 형성되기 힘든 사회 공헌 차원의 틈새시장이 만들어지면 국민 복지가 늘어나고 일자리도 만들어진다는 논리이다. 심상달 선임연구원은 “사회적 기업가 지원은 기업 이미지나 수익성 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 (대기업에 의한 사회적 기업가 지원을) 전략적 사회 공헌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고용과 투자 없는 성장, 왜?

올해 2분기 실질 국내 총생산(GDP)은 전년에 비해 7.2% 증가했다. 국내 100대 기업이 사상 최고의 실적을 거두면서 누적 이익 잉여금 규모도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에 반해 경제의 기반이 되는 고용과 투자가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경기가 회복세이지만 아직까지 시장 곳곳에 불안 요소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경기의 불확실성 탓에 기업은 아무리 수익이 나도 지출하지 않고 유보 자금을 쌓아놓는다. 투자 자체를 꺼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투자를 위한 물색 과정이 길어졌다는 것이다. 이찬영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예전과 달리 기업들은 첨단 산업 중심으로 수익을 창출한다. 그만큼 기술 진보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기업들이 좀 더 신중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익 발생과 투자 사이에 시차가 필요하다. 지금이 그 시기이다”라고 설명했다. 

산업의 구조적인 변화로 인해 투자와 고용의 연결 고리도 미약해졌다. 예전에는 노동 집약적인 산업 중심이었다. 일정량의 투자를 하면 곧바로 고용으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 집약적인 산업 중심으로 첨단 기재에 의한 생산이 주를 이룬다. 그로 인해 투자시 더 많은 금액이 요구되는 반면,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는다. 고부가가치 산업과 첨단 기술 발달로 인해 예전처럼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고용 및 투자 부진은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 단기간 내에 해결하기 어렵다. 이찬영 연구원은 이에 대해 “국내 투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이다. 또, 국내 산업 구조를 고용 친화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금융, 디자인, 물류 같은 제조업 연계 서비스업을 집중 육성해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서로 도우며 발전하는 상생 구조를 형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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