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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 앞에서 두 손 든 러시아

5월에 시작된 산불, 8백 곳으로 번져…푸틴 대통령 시절에 산림 관리자 7만명 해고한 것이 ‘원죄’

조명진 | 유럽연합 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8.30(Mon) 13: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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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8일 스모그가 자욱한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 한 쌍의 남녀가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이례적인 폭염으로 5월부터 번지기 시작한 러시아 산불로 인해 짙은 스모그가 모스크바를 뒤덮었다. 모스크바 시민들에게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연속 34일간 계속된 30℃가 넘는 러시아의 기록적인 폭염은 산불을 더 방대한 지역으로 번지게 만들었다. 산불 연기는 지상뿐만 아니라 지하철 안에까지 스며들어, 마치 지구 종말을 연상케 하는 영화 장면처럼 모스크바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러시아 내에서는 정부가 산불이 번지는 것을 제대로 못 막은 데에는 푸틴 총리가 대통령 재임 시절 7만명의 산림 관리자들을 해고해 산림청의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켰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러시아의 전체 소방관 숫자는 2만2천명으로, 러시아보다 훨씬 면적이 좁은 독일의 2만7천명보다도 적다. 더욱이 러시아 소방 장비의 낙후성을 제쳐 놓더라도, 독일은 자원 소방관으로 100만명을 동원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러시아는 자원 소방관이라는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5월 러시아 당국은 100여 군데, 19만㏊의 모스크바 근처의 광범위한 지역이 산불의 화염에 휩싸여 있고, 산불로 인해 50명이 죽고 5백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한 달 뒤인 6월에는 5백 곳에서 산불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8월 초에는 8백 곳에서 산불이 나서, 50만㏊가 피해 지역이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수치는 러시아 정부가 아니라 외신들의 보도에 이어 러시아 당국이 발표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화재가 발생한 뒤 며칠간 러시아 정부는 산불의 여파가 모스크바에 얼마나 심각한 위험이 되는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이터통신 8월6일자의 제목은 ‘산불 숨기기(Covering Up the Wildfires)’였다. 크렘린이 산불을 진화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산불 피해 규모를 감추려는 연막 전술에만 연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러시아 정부가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방사능 누출 사건으로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이 이번 산불의 피해 지역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은 7월 말이었다. 실제 위험이 서방 언론을 통해서 알려진 것은 6월 중순을 한 달 이상 넘긴 뒤였다.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블라디미르 추프로브는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체르노빌 사태의 재발이 아니라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역에 산불로 인해 방사능 분진들이 퍼지게 되면 소방수와 지역 주민들이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는 점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그린피스가 체르노빌 산불의 피해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했을 때, 러시아 당국자는 “체르노빌의 숲이 불길에 휩싸였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 퍼뜨리지 마라. 체르노빌은 아주 평온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린피스 관계자들은 러시아 당국이 이렇게 중대한 문제를 쉬쉬하는 것은 산불 피해 보상을 청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더불어 러시아 산림청도 모스크바 주변의 모든 산불은 진화되고 있다고 발표하는 등, 러시아 정부는 진실을 알리기보다는 피해 규모를 축소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스크바의 서방 외교관들은 러시아 국민들이 현 푸틴-메드베데프 정부에 갖는 신뢰가 이번 산불 재난으로 바닥에 떨어졌다고 본다.

피해 규모 조작·은폐 의혹…부실한 대응에 국내외 질책 잇따라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8월10일 소방용 항공기의 부조종석에 앉아 산불이 발생한 러시아 중서부 라진 지역에서 진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AP연합

러시아 정부는 모스크바 동쪽으로 4백km 떨어진 사로프에 위치한 핵연구소는 더 이상 위험 지역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지금도 핵탄두를 제작하는 이 핵연구소에 산불이 4km까지 근접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러시아 핵개발국 로사톰(Rosatom)의 국장인 세르게이 키리옌코는, 폭발물과 방사능 물질은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핵 재난의 위험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90개의 정유소들은 여전히 산불의 여파로 인한 화재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어떤 정유소도 자동 소화기를 갖춘 곳이 없다. 따라서 정유소 화재로 인한 대형 재난을 막는 길은 원유를 다른 곳으로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것이라고 키리옌코 국장은 덧붙였다. 

한편,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산불과 관련해 책임자들을 문책하기 시작해서, 해군 항공부대장과 적어도 일곱 명의 장교를 포함한 군부 인사를 해고했다. 죄목은 산불이 군 기지를 엄습한 것을 방조했다는 혐의였다. 실제로 모스크바에서 남동쪽으로 100km 떨어진 콜롬나에 있는 해군 병참기지의 헬리콥터와 항공기 2백대가 화염에 파손되었다.

이같은 문책을 두고, 반정부 성향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인터넷 신문 가세타(www.gaseta.ru)는 정작 책임을 질 최고 책임자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그동안 크렘린의 나팔수 역할을 해 온 프라우다 신문조차 ‘국가 리더십의 몰락(the collapse of state leadership)’이라는 제목으로 산불 재난에 나타난 정부의 대응을 비난했다.

러시아 정부의 산불 대응과 관련해 외신 중에 특히 독일 언론은 러시아 정부의 근본적인 문제를 언급하며 가차 없이 두들기고 있다. 디타케스자이퉁은 전권을 휘두르는 정치 리더십은 자연에 관한 한 제한된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꼬면서, 동시에 진짜 재난은 정부가 기본적인 역할도 못하는 상황에서 푸틴이 러시아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힐난했다.

다행히도 산불은 8월20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와 10℃까지 떨어진 온도로 인해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산불이 낳은 재앙은 환경뿐만 아니라 러시아 경제에도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물론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다. 체제 유지에 급급해 과거 KGB 출신들이 주축이 된 러시아 권력 체제는 비민주적이며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이 이번 재난 대처 과정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났다. 

기만과 은폐 그리고 조작이 실로비키(정보 기관·군인·경찰 출신 정치인)의 속성인 이상, 산불과 폭염으로 인한 정확한 사망자 수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다. 러시아 병원 의사들에게 폭염에 따른 일사병을 사망 원인으로 기록하지 말라는 금지령까지 내려진 사실은 현 러시아 정권이 비밀 유지에만 익숙한 권력 체계여서 투명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결국 내년 예정된 차기 대통령 선거에 푸틴이 출마하고, 유코스의 호로도스키 회장이 형 만기로 내년에 출마하거나, 반정부 인사를 지지할 경우 실로비키는 선거 부정 또는 무력이 아니고서는 정권을 지키기 힘든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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