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이마’에 새겼던 일제의 ‘광기’
  •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
  • 승인 2010.09.1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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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암벽에 ‘동아청년단결’이라는 글씨 남겨…1939년 서울에서 열린 ‘대일본청년단대회’ 기념한 것

서울 인왕산에 올랐다가 창의문 방향으로 하산 행로를 잡고 철제 계단 등산로를 내려서자마자 이내 오던 길로 눈길을 되돌려 보면, 인왕산 정상의 동편으로 흘러내린 듯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암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것이 곧 ‘병풍바위’이다. 아직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이곳에는 간혹 정식 허가 절차를 거친 몇몇 산악회 회원들의 발길만이 찾아들 뿐인 상태이다. 

▲ 경복궁 옛 국립박물관(지금의 자선당 터) 자리에서 담아낸 풍경으로 근정전 지붕 너머로 인왕산의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울의 어디에서나 쉽사리 올려다 보이고, 그 전면에 크고 널찍한 암벽을 갖추고 있는 탓에, 이곳은 끝내 일제에 의해 기념각자(記念刻字)가 새겨지는 수난의 공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우두커니 웅장한 암벽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바위의 아래쪽에 보일 듯 말 듯 무슨 글씨의 흔적 같은 것이 여러 개 눈에 들어온다. 알아 보았더니 그것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1874~1955)가 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구호를 새겨놓은 바위 글씨였다.

어쩌다가 수도 서울의 이마와 같은 곳에 저렇게 흉측한 몰골의 글씨가 남겨지게 되었을까?

이 바위 글씨가 처음 등장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의 일이다. 1939년, 그해 가을에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에서 이른바 ‘대일본청년단대회(大日本靑年團大會)’가 개최되었고, 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한 사업의 하나로 인왕산 암벽에 기념각자(記念刻字)로 남겨놓은 것이 바로 이 글씨였다.

이와 관련해 동아일보 1939년 2월24일자에는 서울에서 이러한 대회가 열리게 된 연유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작년(1938년) 9월, 전 조선 15만명으로 조직된 조선연합청년단(朝鮮聯合靑年團)은 그동안 대일본연합청년단(大日本聯合靑年團)에 가맹이 진섭되던 바 드디어 최근 정식 가입되었다. 따라서 금년은 전 일본청년단대회를 경성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그것을 중심으로 구체적 방침을 협의 중에 있다. 현재 대일본연합청년단은 약 3백만명이 되는 것으로 가을에 약 1주일간의 대회는 실제로 캠프 생활을 하면서 청년 훈련을 하려는 방침이라 한다.’

▲ (왼쪽)이른바 ‘지나전쟁(중일전쟁)’ 이후 전시 동원 체제가 한창 노골화하던 때인 1939년 9월16일과 17일 양일간에 걸쳐 서울에서는 ‘대일본청년단대회’가 개최되었고, 그 바람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인왕산 바위 글씨가 새겨지게 되었다. (오른쪽)매일신보 1939년 9월17일자에 수록된 인왕산 기념각자의 기공식 관련 기사.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이 당시는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의 발발 이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제정, 육군특별지원병령의 공포, 국가 총동원법의 확대 시행,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회 등으로 이어지는 전시 동원 체제가 가속화하던 상황이었다. 1938년 9월24일에 거행된 ‘조선연합청년단’의 결성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중국·만주·몽고·타이완·일본 등지에서 두루 모인 ‘제15회 대일본청년단대회’는 1939년 가을 경성부민관과 경성운동장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일정 가운데 ‘기념 사업 기공식’이라는 것도 있었다.

이것은 곧 인왕산 병풍바위의 암벽에 ‘석각(石刻)’을 하는 일을 말한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인왕산에 이러한 글씨를 새기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동아일보 1939년 4월11일자에 수록된 ‘일만지청년대회(日滿支靑年大會), 경성 성벽에 기념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참가 청년 대표들은 대경성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적당한 장소에 대비석(大碑石)을 세워 본 대회의 역사적 사명을 영구히 기념할 터이라 한다’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청년단 대회의 개최가 결정된 후부터 이미 이러한 계획이 수립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러다가 대회가 가까워지면서 기념비를 새길 장소로 ‘인왕산’이 선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역시 이곳이 ‘서울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새길 여러 가지 문구도 함께 거론된 바 있었는데, △흥아청년결맹기념(興亞靑年結盟記念) △일만지청년결맹기념(日滿支靑年結盟記念) △신동아건설(新東亞建設) △흥아건설(興亞建設) △광명(光明)은 동방(東方)으로부터 △궐기(蹶起)하라 동아청년(東亞靑年) 등이 그것이었다.

▲ 인왕산 병풍바위에는 1939년 가을에 일제가 새겨놓은 ‘동아청년단결’이라는 바위 글씨의 흔적이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1950년에 82만원 들여 삭제 공사 추진했다는 기사 있어

하지만 실제로 여기에 새기기로 확정된 문구는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 여섯 글자였다. 매일신보 1939년 9월17일자에는, 그 전날 인왕산 현지에서 거행된 기념각자 기공식의 장면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 기념문자는 인왕산 허리의 높이 39m, 폭이 40m 되는 큰 바위에다 사방이 아홉 자(즉 2백73cm) 되는 ‘동아청년단결’의 여섯 자를 새기기로 한 것이며 오는 10월부터 착공하야 명년까지 마치기로 하고 경비의 일부를 의연금으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기념문자로서 신동아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상징이 되게 하며 이 글자를 생각함으로써 동아(東亞)의 오족(五族)을 대표한 청년들은 더욱 단결을 굳게 할 것을 맹세하기로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일제 강점기 유리 원판 자료에는 인왕산 바위 글씨를 새기는 공사 장면이 담긴 사진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당시의 광경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이 자료를 살펴보면, 바위 글씨의 구성은 오른쪽부터 첫째 열에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 둘째 열에는 ‘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 십육일(皇紀 二千五百九十九年 九月 十六日)’, 셋째 열에는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朝鮮總督 南次郞)’라는 큰 글씨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보다 약간 왼쪽으로 사이를 띄어 ‘한 열에 28글자씩, 네 줄 길이’로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과 기념각자를 남기는 연유를 한자(漢字)로 서술한 내용이 잔뜩 새겨져 있었으며, 그 말미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 토키사부로’라는 한자 글귀가 자리했다.

그렇다면 ‘동아청년단결’이라는 인왕산의 바위 글씨는 광복 이후 어느 시점에서 지워지게 된 것일까? 이에 관해 드물게 찾아낼 수 있는 기록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선일보 1950년 2월25일자에 수록된 ‘82만원의 왜식소탕(倭色掃蕩), 인왕산의 남차랑(南次郞) 글 삭제(削除)’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인왕산 절벽 암반 위에는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던 때 새겨놓은 ‘대동아청년단결(大東亞靑年團結) 황기(皇記) 2599년 9월16일 남차랑(南次郞) 운운’이라는 문구가 그냥 남아 있는데 이번 서울시에서는 민족정신 앙양과 자주정신 고취에 미치는 바 영향이 많다고 하여 82만원을 들여 삭제 공사를 추진 중이라 하며 3월 말까지는 끝날 것이라는데 이와 아울러 일반 시민도 왜색 간판을 자진 없애주기를 바란다 한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 예고한 대로 바위 글씨를 지워내는 일이 실제로 진행되었는지의 여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아무쪼록 그 시절을 겪었던 관계자들의 증언이나 별도의 기록 자료를 통해 정확하게 검증되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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