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에 고개 숙인 초고층 빌딩, ‘한국판 타워링’ 불씨가 큰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0.10.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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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건물에 공포가 덮쳤다. 부산 해운대 고층 빌딩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는 자칫하면 대형 인명 피해로 번질 뻔한 아찔한 사건이었다. <시사저널>은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의 고층 건물이 얼마나 화재에 취약한지, 외국의 고층 빌딩들은 어떤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는지, 고층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피해야 하는지 등 고층 건물의 화재 안전 문제를 심층 취재했다.

 

▲ 지난 2월 발생한 서울 중구 대연각빌딩 화재 현장. ⓒ연합뉴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다. 지난 1985년 서울 여의도에 63빌딩이 완공된 후 대형 건설사들은 앞다투어 마천루(고층 빌딩) 짓기 경쟁을 벌였다. 좁은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초고층 빌딩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전국에 세워진 16층 이상 고층 빌딩은 3만9천2백11개동이다. 이 중 31층 이상의 초고층 빌딩(건축법상은 50층 이상을 초고층으로 분류)은 7백16개동에 이르고, 서울 지역에만 76개동이 있다. 오는 2015년에는 잠실에 1백23층짜리 제2롯데월드가 들어서고, 상암동에 아시아 최고층인 1백33층짜리 상암DMC 랜드마크 빌딩이 완공된다. 건물 높이만 해도 6백40m이며, 5만2천8백여 명을 수용하는 첨단형 주거 단지가 될 전망이다.

이처럼 전국 시·도에는 고층 빌딩이 경쟁적으로 세워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어진 고층 빌딩은 정작 화재가 났을 때는 속수무책이다. 각종 현황과 지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래서 건물 높이는 ‘선진국’이지만, 화재 안전은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경우 거주자가 많은 만큼 화재가 날 가능성도 크다. 조망권을 넓히기 위해 창을 확대했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면 불길이 위층으로 쉽게 번진다. 고층은 또 소방 장비가 미치지 못하고, 구조 인력이 진입하기도 어려워 재산이나 인명 피해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국내에서 대표적인 초고층 빌딩인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타워팰리스를 보자. 타워팰리스는 강남 부촌의 상징물이다. 63빌딩보다 13개층이 높은 73층으로 우리나라 최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이다. 지난 2002년 완공된 타워팰리스에는 4개동에 약 3천여 세대가 살고 있다. 최고의 시설과 마감재를 사용한 초호화 주거 공간을 자랑한다.

큰불 나면 1~2시간 내 붕괴될 수도

그렇다면 타워팰리스는 화재에 어느 정도 안전할까. 소방 안전 전문가들은 대형 화재가 일어나면 타워팰리스도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지난 2007년 10월 국정감사에서 타워팰리스 등 초고층 아파트의 안전이 도마에 오른 적이 있었다. 당시 건설교통부 산하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타워팰리스 등의 초고층 건물에 대형 화재가 났을 때 1~2시간 내에 붕괴될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40층 이상 초고층 건축물에 사용되는 40MPa 이상의 고강도 콘크리트가 화재 때 열에 견디는 내화 성능이 급격히 저하되어 빠르면 한 시간 이내에 무너진다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다. 일반 고층 건물(30층 이하)의 경우 강도의 세기가 약한 27MPa 미만으로 설계되어 있어 고층 건물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현행 ‘내화 구조의 인정 및 관리 기준 고시’에는 화재 때 건축물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12층 이상인 경우 기둥과 보는 3시간 이상의 내화 성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3시간’은 사실상 ‘생명 시간’이다.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건물 붕괴를 피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에 사용된 고강도 콘크리트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법적 기준에 훨씬 못 미치고 있었다. 즉, 대형 화재가 났을 경우 주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하기 전에 건물이 붕괴될 확률이 높다는 계산이 된다. 고강도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고층 건물들이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타워팰리스에서는 지금까지 크고 작은 화재가 두 번 있었다. 2008년 9월과 같은 해 12월에 발생했다. 9월에 난 화재는 2차 타워팰리스 F동 54층에서 발생했으며, 당시 강남소방서는 불이난 지 10여 분만에 진화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 54층까지 사다리차가 올라가지 않아 엘리베이터를 통해 이동한 후 불을 끈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았다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사고였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소방차에서 뿌린 물이 닿을 수 있는 최대 높이는 15층 정도이고, 소방 고가 사다리가 닿을 수 있는 최대 높이도 52m(15~18층)에 불과하다. 소방 살수차도 최대 15층까지만 도달할 수 있다. 즉, 타워팰리스 20층 이상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할 경우 고가 사다리나 살수차가 무용지물이라는 얘기이다.

같은 해 12월에는 타워팰리스 1층 상가에 불이 났다. 당시 1층 제과점과 2층 전기제어실이 탔으나 자체 스프링클러가 작동해 10여 분만에 진화되었다. 현행 ‘소방 시설 설치 유지 및 안전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11층 이상 고층 건물에는 전 층에 스프링클러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 지난 2009년 원주 오크밸리에서 열린 재난구조 종합훈련. ⓒ연합뉴스

고층 건물이 화재 안전의 사각지대인 이유

타워팰리스와 같은 초고층 건물은 20층 이상의 고층에서 불이 났을 경우 자체 설치된 소방 시스템과 소방방재청의 화재 진압용 소방헬기가 화재를 진압하는 유일한 장비이다. 타워팰리스도 자체 소방 설비를 갖추고 있다. 화재가 일어나면 스프링클러와 제연 설비가 자동으로 작동되도록 되어 있고, 초기에 진압이 되지 않으면 전실(현관과 복도 사이에 두는 여유 공간)과 피난처가 구분되도록 방화 구역이 정해져 더 이상 화재가 번지지 않게 제어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형 화재를 막는 데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고층 건물의 화재를 진압하는 1t 이상의 급수 시설을 갖춘 전용 헬기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일본의 경우 70대를 보유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소방방재청이 7대를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고층 건물이 화재 안전의 사각지대인 이유는 또 있다. 건물의 방재 시설이 허술하다는 것이다. 우선 우리나라 고층 건물에는 필수적인 피난 대피층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현행법에는 피난 대피층이나 물탱크 및 연결 송수관 등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다. 국내 고층 빌딩 대부분은 이러한 화재 대비 기초 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면 대형 인명 피해가 발생할 위험에 놓여 있다. 현재 국회에는 ‘초고층 및 지하 연계 복합건축물 재난 관리에 관한 특별법’이 계류 중에 있다. 여기에는 50층 이상 높이 2백m 이상인 초고층 건물의 경우 30층마다 대피층을 만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소방 안전 전문가들은 피난층의 기준을 50층 이하로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재욱 부경대 안전관리학과 교수는 “피난층을 만들면 건축주가 손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난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기본적으로 입주민들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각 층마다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25층이나 10층으로 확대 적용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보통 사람이 계단을 내려오는 속도는 0.25m/초이다. 이에 반해 화재가 났을 때 연기가 수직 방향으로 확산되는 속도는 3~5m/초이다. 연기가 사람보다 빠른 것이다. 이 때문에 화재가 일어나면 입주자들이 위나 아래로 대피하기 곤란할 경우가 생기게 된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수평 대피를 할 수 있는 ‘피난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타워팰리스의 경우도 피난층은 1단지에만 있고, 2, 3단지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목동 하이페리온도 피난층이 없고, 비상용 승강기가 화재 대비용으로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대형 상업용 시설인 63빌딩도 피난 안전 구역이 없고, 승강기도 비상용으로 전환이 불가능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의 고층 건물 대다수는 피난층을 확보하거나 비상용 승강기 등 화재를 대비한 안전 대책이 없거나 미흡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G20 정상회의가 열리는 아셈타워에도 피난층이 없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나라 고층 빌딩의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선진국이 건물 중간 중간에 피난층 설치를 법으로 의무화하고 있는 것과도 상반된다.

지난 2005년에 허용한 아파트 발코니 확장도 문제가 되고 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인명 사고의 80~90%는 연기에 질식되는 것이 원인이다. 연기가 계단을 타고 순식간에 건물 상층부로 치솟으며 건물 전체로 퍼진다. 외국에서는 연기가 퍼지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계단을 지그재그로 설계하지만 국내 고층 빌딩에는 수직으로 연결된 경우가 많다. 곧바로 안전 구역으로 대피하지 않으면 질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때문에 발코니는 불이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거주자가 대피하는 장소로 이용되는 최소한의 안전 구역이다. 그런데 발코니 확장이 허용되면서 최소한의 대피 장소가 없어졌다. 이것이 화재가 일어나면 인명 사고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재욱 부경대 교수는 “최소한 60cm 정도의 발코니는 있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최소한의 대피 공간을 마련하도록 법을 다시 개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소방 선진국인 일본이나 미국 등에서는 발코니 확장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현관과 복도 사이에 두는 전실은 불이 났을 때 번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전실이 개별 가구의 전용 공간처럼 사용되면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공간이 되고 있다. 오히려 물건을 쌓아두는 등 실제 불이 났을 때  빠르게 퍼지게 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아예 방화문을 달고 잠금 장치를 하는 가구도 있는 등 화재를 대비한 ‘전실 확보’ 또한 시급한 과제이다.

‘고층’ 관련 법규 제정·전문 인력 양성 시급

현행법에도 전실 확장은 명백한 불법이다. 개인이 사용하는 전용면적에 포함되지 않는 공용면적에 해당한다. 그나마 소방 당국이 지난 7월부터 전실을 전용 공간으로 사용하거나 물건을 쌓아놓는 것 등을 법으로 규제하면서 전실 전용 가구가 대폭 줄어들고 있다.

부산 우신골드스위트 화재의 최초 발화 지점인 4층 미화원 탈의실은 원래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건축 허가를 받을 당시에는 주거·업무 시설이 없는 곳이어서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분리 수거장과 미화원 탈의실 같은 업무용 시설로 불법 개조하면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고층 빌딩에서 화재가 일어났을 때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법을 강화해서 규정을 까다롭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법이 취약해 건물이 지어질 당시부터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그 이전에 지어진 고층 건물은 여전히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고층 건물 입주자나 건설사들의 불만도 여기에 있다. 한 대형 건설사 간부는 “고층 건물이 문제가 있다고들 하는데, 그 이전의 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건설사들이 건축물을 시공할 때는 법에 준해서 하는데, 지금 기준으로 하면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은 모두 문제가 있는 것이 된다. 애초부터 법이 완벽했으면 건설사들도 당연히 그 법에 맞게 건축을 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위험’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항변했다.

건물 외벽을 불연재로 교체하는 방안도 검토되어야 한다. 부산 우신골드오피스텔이 4층에서 순식간에 38층까지 불이 번진 것은 건물 외벽에 황금색을 내기 위해 가연성 페인트를 발랐기 때문이다. 가격이 비싼 불연재 대신 값싸고 화려하게 보이는 가연성 페인트가 화재를 키운 셈이 되었다.

박형주 경원대 소방방재공학과 교수는 “현재 상태에서 소방 안전 대책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건물 외벽에 외장재를 쓰지 않도록 예방 차원에서 초고층 빌딩에 적용되는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소방 관련 법률은 30층 이하의 저층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제도적인 보완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초고층 건물에 맞는 관리 조직을 두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초고층 관리가 어렵다. 자체 방화·방재 관리자를 두고 피난에 대비하는 훈련과 교육을 시키는 등 전문 인력 양성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초고층은 피난이 중요하다. 하루빨리 관련 법률을 개정해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에 기준을 두고 선진국형 소방 관리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진영 한나라당 의원(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은 “현재 고가 사다리가 미치지 못하는 고층 건축물의 화재는 스프링클러와 화재 진압용 헬기로 진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화재 진압 헬기 보충 등 시급한 대책이 요구된다”라고 밝혔다. 지금 대한민국의 고층 빌딩 거주자들은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자칫 대형 화재 사고가 발생하면 ‘한국판 타워링’이 재현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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