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 성지’에 광복은 오지 않았다
  • 아산·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0.11.01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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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경내 조경 ‘일본식’으로 조성…본전 앞에는 천황 상징하는 ‘금송’ 심어진 채 40여 년 흘러

충남 아산시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가 있다.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자 ‘민족혼의 상징’이다. 그래서 현충사는 ‘호국의 성지’로 불린다. 그런데 현충사에는 ‘부끄러운 비밀’ 한 가지가 숨겨져 있다. 현충사의 조경에서부터 본전에 걸린 이순신 장군의 영정 등이 친일 잔재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월27일 <시사저널> 취재진이 현충사를 방문했을 때 이곳은 일본식과 한국식이 뒤섞여 아예 국적 불명이 되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비전문가가 역사적 고증 없이 ‘작업’

도대체 현충사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현충사는 지난 1706년에 충청도 유생들이 숙종 임금께 사당 건립을 상소해 최초로 세워졌다. 그 후 현충사는 우리의 국난만큼이나 숱한 수난을 겪었다.

1865년에는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서원을 겸하고 있던 현충사의 문을 일시 닫아야만 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20년간 영정조차 내걸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다가 1932년 국민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고 다시 영정을 모시게 되었다. 지금의 모습이 갖춰진 것은 1966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하고, 성역화 작업을 하면서부터다. 그 후 해마다 4월28일 충무공 탄신일에는 정부 주관으로 제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시작부터 온통 문제투성이였다. 당시는 전통 조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나 시공하는 사람이 없던 때였다. 그러다 보니 시공 때부터 역사적 고증이 없이 일본식 조경을 그대로 답습했다. 현충사 경내의 정원을 일본식 조경 양식으로 만들면서 일본 현지의 정원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모양새가 된 것이다.

국내 전통 조경의 최고 권위자이자 문화재관리국장을 역임했던 정재훈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조경학과 석좌교수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주최한 ‘2008년 사적지 조경 학술대회’ 발표 논문을 통해 “(1966년 현충사 성역화) 당시는 한국 전통 조경을 연구한 사람도 없고, 설계하고 시공하는 사람도 없는 시기여서 상당히 일본 조경 양식으로 만들어지고 일본 정원에 서는 석등까지 배치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현충사의 연못은 일본식 조경의 축소판이다. 현충사 경내 우측에 자리 잡고 있는 연못은 1972년 성역화 작업에 따라 인공으로 조성되었다. 우리의 전통 연못은 보통 정방형으로 만들고 그 안에 정자를 세운다. 그런데 현충사의 연못은 긴 타원형이다. 크게는 위 연못과 아래 연못으로 나뉘어 있고, 연못 사이를 가로질러 아치형 돌다리가 놓여 있다. 가운데에는 인공 섬을 만들었다. 전형적인 일본 양식이다. 정원 중심부에 연못을 파서 연못 안에 섬을 만들고 다리를 놓아 섬과 연못 주위를 돌아다니며 감상하는 ‘회유임천식’ 양식은 대표적인 일본의 조경 기법이다. 

호안(호수의 기슭)도 일본 양식을 그대로 사용했다. 일본의 전통 방식은 수면과 차이가 없이 돌을 눕히고 세워나가서 호안에 물이 넘쳐흐르는 인상을 준다. 일명 ‘들여쌓기식’이다. 현재도 일본 조경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11세기에 쓰인 일본의 정원 지침서 <작정기>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현충사 연못의 호안도 수면과 차이가 거의 없이 돌을 눕히고 세워나간 전형적인 ‘들여쌓기식’이다.

반면 우리의 전통 양식은 ‘바른 층 쌓기’이다. 돌의 면 높이를 같게 해 가로 줄눈이 일직선이 되도록 쌓는 방법이다. 돌의 생김새에 따라 면 높이를 맞추어서 쌓기도 한다. 호안 일부를 전통식으로 바꾸면서 지금은 국적마저 상실한 모습이다.

현충사에는 또 일본식 나무들이 식재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현충사 본전 앞에 있는 ‘금송’이다. 금송은 원산지가 일본으로 일본 천황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주로 신궁 같은 곳에 심어져 있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본전 앞에 일본 천황을 상징하는 나무가 심어져 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풍경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에 기념 식수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왜 하필 이곳에 금송을 심었던 것일까.  

▲ 현충사 본전에 모셔진 이순신 장군 영정은 친일 화가로 알려진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이다. ⓒ시사저널 임준선

 
‘박대통령 기념 식수’라며 대체 요구 묵살

당시 대통령 비서실 조경담당 비서관이던 오휘영 한양대 도시대학원 명예교수가 2000년 <환경과 조경>에 게재한 ‘우리나라 근대 조경 대동기의 숨은 이야기(4)’에서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현충사 본전 앞의 대통령 기념 수목인 금송에 대해 조금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현충사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던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 동측 창 앞에 오래전부터 심어져 있던 수형이 매우 훌륭한 금송을 헌수하겠다는 뜻을 밝히셨고, 지시에 따라 뿌리돌림을 한 후 현충사 본전 앞에 식재하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박대통령은 경북 안동 도산서원 앞과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맞서 장렬하게 산화한 칠백의총의 위패가 안치된 충남 금산의 종용사 앞에도 청와대 금송을 옮겨다 기념 식수했다. 청와대의 금송은 일제 강점기 일본군 장교가 최초로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다른 나무로 대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박정희 대통령 기념 식수’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묵살되고 말았다. 조경 전문가들은 청와대 조경도 조선 총독이 조성한 ‘일본식’이라고 말한다.

금송 이외에도 현충사에는 일본산 나무들이 식재되어 있다.소나무 전문가들은 현충사 경내 곳곳에 심어져 있는 반송도 원산지가 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조성된 전통 정원에는 반송이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현충사 본전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도 문제이다. 지금의 영정은 197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여러 개였던 충무공의 영정을 하나로 통일해서 그린 ‘국가 표준 영정’이다.

충무공의 영정을 그린 사람은 월전 장우성 화백이다. 장화백은 1941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푸른 전복>으로 총독상을 받았다. 그는 또 일제가 군국주의와 황국 신민화를 고취시키기 위해 연 전시회에 ‘일제를 찬양 고무하는 작품’을 출품하는 등 친일 행적을 했다. 1943년 6월16일자 매일신문은 장화백이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에서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 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고, 2005년 서울대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 출신 친일 인물 1차 12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물론 장화백의 가족들은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일제 시대 화가로 입문하기 위해 상을 받고 활동을 했을 뿐 친일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장화백에 대해 친일 논란이 일자 그가 그렸던 유관순의 표준 영정이 다른 화가가 그린 영정으로 교체되었던 전력이 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항일의 최고 상징’인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친일 화가로 분류된 사람이 그렸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다”라며 다른 화가가 그린 영정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충사에 일본식 영정·조경은 대단한 모순”

▲ 현충사의 연못은 일본식 조경의 축소판이다(왼쪽). 오른쪽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념 식수한 금송. ⓒ시사저널 임준선

이에 대해 김상구 현충사 관리소장은 “지난 1997년부터 꾸준하게 현충사의 조경 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외래 수목은 거의 제거했고, 앞으로 점차적으로 없앨 것이다. 다만 금송의 경우 국가 원수가 기념 식수한 것이어서 (이전 등의 문제는) 정책적으로 결정할 일이다. 또 연못이나 정원이 일본식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규명되어야 하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영정의 경우 (친일 화가가 그렸다는 사실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민단체는 ‘당장 친일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라는 입장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은 “이순신 장군의 사당은 항일 의식의 상징이다. 거기에 일본식 영정, 일본식 조경은 대단한 모순이다. 우리가 얼마나 친일에 젖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수치이다. 후손으로서 이순신 장군을 뵐 면목이 없다. 조경을 전통 기법으로 바꾸고, 금송은 무조건 베어 없애기보다는 최소한 현충사 본전 혹은 경내에서 벗어난 곳으로 옮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영정은 교체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정재훈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는 “전통 조경은 역사적 현장에 조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무리 좋은 이론과 설계가 있어도 그것을 현장에 적용했을 때 역사의 정체성과 부합되는 아름다움과 기능, 가치관이 없으면 쓸데없는 일이다. 우리 역사가 주고 간 문화유산 앞에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서울 광화문 세종로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지난 1968년 4월27일에 제막되었다. 당시 서울대 미대 김세중 교수에게 의뢰해 9백60만원을 주고 제작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 동상은 끊임없는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1977년 5월에는 서울 시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다. 문화재 전문가들에 의해 여러 차례 고증 잘못이 지적되자 서울시가 ‘문화공보부 영정심의위원회’에 정확성 여부를 심의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러자 시민들은 “성웅의 조상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느냐”라며 관계 당국을 성토했다.

그해 5월12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시민들의 항의 이유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되어 있다. △칼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어 항복하는 장군으로 오해받게 한다. △얼굴 모습이 현충사의 영정과 달라 후세 교육에 혼선을 빚는다. △갑옷 자락이 발목까지 내려가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의 모습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독전고가 누워 있어 전장에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분위기가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 등이다.

서울시는 1979년 5월 문공부에 충무공 동상을 다시 만들어 세울 것을 요청해 허가를 받았다. 다음해인 1980년 1월에는 2억3천만원이라는 예산까지 책정하며 표준 영정에 의해 새로운 동상을 만들기로 결정했으나, 미술계의 강력한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새 동상은 칼 손잡이의 위치가 바뀌고, 동상의 높이도 무인의 기상이 엿보이도록 더 높이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광화문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엉터리 고증’으로 밝혀진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그대로의 모습이다. 최근에는 중국 갑옷에 일본도를 들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친일 청산’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말이 무색할 뿐이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곧 대대적인 보수 작업에 들어간다. 일각에서는 ‘보수’가 아니라 이참에 민족 정기를 살릴 수 있도록 ‘새로 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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