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판에 묻힌 ‘박근혜 사찰 의혹’
  • 조진범│영남일보 정치팀장 ()
  • 승인 2010.12.1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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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여야 충돌 직전 예산 정국 주도권 잡으려 한 민주당 의도, 수포로 돌아가

 

민주당이 거리로 나선다. 한나라당이 12월8일 국회 본회의를 통해 새해 예산안을 강행 처리한 데 대해 전면 투쟁을 선포했다. 당분간 여야는 서로 으르렁댈 수밖에 없다.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피’까지 보았다. 민주당 강기정 의원이 입을 맞아 피를 흘렸다.

대화와 타협은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12월 임시국회 역시 열리지 않는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임시국회 소집 요구에 한나라당은 고개를 돌렸다. 한나라당은 당분간 냉각기를 갖겠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은 장외 투쟁을 통해 예산안 및 쟁점 법안을 강행 처리한 부당성을 알리겠다는 각오이다. 3년 연속 반복되는 모습이다. 18대 국회 들어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은 3년 연속 야당의 동의 없이 새해 예산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국회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보좌진들은 “이런 국회는 처음 보았다”라고 혀를 찼다.

예고된 파국이었다. 4대강 사업 예산에 대한 견해 차가 너무 컸다. 민주당은 6조7천억원을 깎자고 했고, 한나라당은 3천3백억원 정도만 삭감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20배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정치는 어디에도 없다. 4대강 사업 예산은 한나라당이 단독 처리하는 과정에서 2천7백억원이 삭감되었다.

친박계, 임회장과의 ‘연루설’ 차단에 더 신경

▲ 지난 12월7일 국회에서 열린 백봉신사상 수상식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행사장에 들어서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정기국회 회기(12월9일) 내에 예산안을 처리하겠다는 한나라당의 방침도 워낙 강했다. 지난 12월7일 밤 10시쯤.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와 계수조정소위 위원인 김광림 의원이 예산안을 놓고 의논하는데,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박원내대표는 대뜸 “(예산안 처리를) 정말 할 거야?”라고 정색해서 물었다. 김원내대표는 “통과시켜 줘”라고 맞받아쳤다. 양당 원내대표의 탐색전이 끝나자마자 여야 의원들은 본회의장에 난입해 밤샘 대치에 들어갔다. 민주당으로서는 한나라당의 강행 의지를 확인하고 온몸으로 저지에 나선 셈이다.

예산안 강행 처리의 배경을 둘러싼 격론도 벌어졌다. 청와대가 지시했는지 여부가 초점이었다. 민주당 대변인인 조영택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12월9일 안에 처리해주면 좋겠다’라고 공개적으로 압박하지 않았느냐”라며 한나라당을 청와대의 꼭두각시라고 몰아붙였다. 이에 한나라당측은 “지나친 억측이다”(안형환 대변인)라고 맞섰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박희태 국회의장을 겨냥해 “나이 먹어서 국회 몇 선 한 사람이 청와대가 시키니까 이 따위 짓을 하는데, 이런 바지 의장은 자격이 없다”라며 정계 은퇴를 요구했다.

민주당은 정기국회 회기 내에 예산안 처리를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지연 전략과 폭로전을 병행하며 한나라당을 압박했다. 예결위 계수조정소위 심사를 최대한 길게 끌고 갔고, 사찰 의혹도 꺼내들었다. 한 계수조정소위 위원은 “삭감 심사만 5일 동안 하기는 처음이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에 대한 사찰 의혹은 비장의 카드였다.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12월7일 원내대책회의에서 “2008년 당시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밑에 있었던 이창화 청와대 행정관이 박 전 대표도 사찰했다고 한다. C&그룹 임병석 회장 누나가 운영하는 강남 다다래 일식집에서 식사를 한 것이 사찰의 과녁이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의원은 또 “이성헌 의원이 박 전 대표를 왜 그 집에 모시고 갔는지, 거기서 박 전 대표와 임회장의 회동이 있었는지,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등을 알아내기 위해 이창화 팀이 여주인과 종업원을 내사했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에 대한 민주당의 사찰 의혹 제기는 다목적 포석이었다. 북한의 연평도 무력 도발로 조성된 안보 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여권의 분열을 노린 것으로 풀이된다. 박 전 대표를 통해 민간인 사찰 의혹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면서 예산 정국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도였다. 민주당의 ‘노림수’는 실패로 돌아갔다. 박 전 대표나 ‘친박계’측이 사찰 의혹에 대한 공분보다 C&그룹 임회장과의 ‘연루설’을 차단하는 데 더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임회장과의 만남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라고만 말했다. 사찰 의혹 파문이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민주당의 예산 정국 돌파 전략이 먹혀들지 않으면서 충돌은 불가피했다. ‘폭력 국회’의 상처도 깊다. 여야의 충돌로 부상자가 속출했고, 국민 혈세로 마련된 국회 내 집기가 폐품으로 전락했다. 국회 사무처는 폭력 사태의 재산 피해를 3천만원 상당으로 추산하고 있다. 폭력 사태에 따른 법적 공방도 예상된다.

무엇보다 무형의 피해가 크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여야의 불신도 극에 달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18대 국회가 끝날 때까지는 보기 글렀다”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여당, 개헌론 재점화…야당은 장외 투쟁

국회의원 보좌진들도 감정의 앙금을 걱정한다. 보좌진들이 몸싸움에 가세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영남 지역의 한 의원 보좌관은 “예전에는 의원들끼리만 싸웠다. 보좌진들은 국회라는 한 회사에 다니는 선후배라는 인식이 강했다. 모시는 부장(의원)만 달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보좌진 사이에 신뢰를 회복하기가 힘들어졌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여야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될 전망이다. ‘난장판 국회’의 책임을 서로 다르게 평가하며 엇갈린 행보에 나서고 있어 더욱 그렇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정치 선진화가 필요하다며 개헌론을 재점화할 태세이다. 안상수 대표는 12월9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국회를 바로 세우지 않고 대한민국을 선진화할 수 없다. 개헌, 선거구제 개편 등 정치 선진화와 국회 선진화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재오 특임장관 역시 “G20을 유치한 나라의 국회가 난장판으로 의사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한국의 정치 토양이 부실하고 지력이 다했다는 것이다. 국가 전략 차원에서 미래로 나가려면 부실한 토양을 바꾸고 객토해야 한다”라고 개헌의 필요성을 또 강조하고 나섰다.

야권은 새해 예산안 강행 처리를 ‘거대 여당의 의회 폭거’로 규정하고 장외 투쟁에 나설 방침이다.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과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의 쟁점화도 시도할 예정이다. 한·미 FTA는 한나라당으로서도 민감한 문제이다. 새해 예산안 처리처럼 ‘행동 통일’이 이루어질 것인지 의문이다. 농촌 지역의 한 한나라당 의원은 “농촌을 지역구로 둔 의원들은 쉽사리 한·미 FTA 찬성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다.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반대가 강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의원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여야의 움직임은 오는 2012년 총선 및 대선과 맞물려 한층 치열하게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총선 및 대선 승리를 위해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중도층을 끌어안으려는 양보 없는 ‘명분 싸움’이 국회를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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