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까지 덜꺽 울렸던‘정오 알리미’ 남산 대포
  •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12.2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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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 전부터 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지점에 설치해 운영

 

▲ 조선 시대에는 보신각종을 울려 사람들에게 시각을 알렸다.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그날 거복이가 놈의 말을 들은 후 숙마바닥 메투리에 단단히 들메를 하고 오포 소리 나기만 기다리다가 남산 한 허리에서 연기가 물신 올라오며 북악산이 덜꺽 울리게 땅 하는 소리가 굉장히 크게 나는 것을 듣더니 ‘옳지 인제 오포 놓았군. 저 오포는 일본 오정이니까 우리나라 오정은 반 시나 더 있어야 되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것 무엇 있나.’ 하며 청석골로 내려가 누이집 부엌 뒤로 자취 없이 돌아가 담에다 귀를 대이고 섰는데….”

 이것은 이해조(李海朝, 1869~1927)의 신소설 <빈상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글이 제국신문에 처음 연재된 때는 1907년 10월 무렵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 우리는 적어도 100년 전에 이 땅에서 통용되던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은 그 당시 서울 사람들에게 정오 시각을 알려주는 방법으로 오포(午砲)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그렇게 대포를 쏘는 시각은 다름 아닌 일본의 표준시를 따랐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원래 시간을 알리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던 전통적인 수단은 종로의 보신각종(普信閣鐘)을 울리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인경과 파루의 종을 울려 성문을 여닫게 하고 사람들에게 시각을 알려주었다. 그러다가 1895년에 이르러 이를 폐지하고 자정과 정오에만 종을 울리는 것으로 변경되었다고 알려진다.

 그렇다면 보신각종을 울려 시간을 알리는 일은 언제까지 지속되었던 것일까?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한 명쾌한 고증 자료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근대 시기에 새로 등장한 여러 장치들에 의해 보신각종의 역할이 부지불식간에 크게 줄어들었던 탓에 이에 관한 기록조차 변변히 남겨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윤치호일기> 1906년 6월16일자에는 그 당시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던 시간에 관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서울 시각보다 30분 빠른 도쿄 시각 준수”

“냄새나는 이 도시는 독특하게 구분되는 네 가지 표준 시각을 즐기고 있다. … 우리의 보호자들은 너무도 도도하여 서울 시간보다 30분 빠른 도쿄 시간을 준수한다. 한국 정부는 서울의 인민들에게 때때로 가톨릭 시간보다 몇 분이 빠르거나 늦게 ‘종소리’를 울려 정오 시각을 알려주고 있다. 이 같은 편차는 한성전기회사 사옥의 옥상에 있는 시계탑으로부터 종각지기가 걸어오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상대적으로 보신각 종소리의 존재가 미미해진 상태에서, 그 기능을 대체해 등장한 것이 ‘오포’였다. 하지만 이것은 오로지 일본인들의 편의에 따라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사령부가 직접 대포를 쏘고, 그것도 서울 땅에서 버젓이 일본의 표준 시각에 맞춰 정오를 알려주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그 시절에는 이미 우편국과 같은 공공 기관들이 일본 시각에 맞춰 문을 열었으며, 더구나 1905년에 개통한 경부철도는 아예 개통 당시부터 일본의 표준시에 맞춰 열차가 운행되고 있던 형편이었다. 말하자면 시간에 대한 주권마저 이미 일제의 수중에 넘어간 상태였다.

1908년 4월1일부터 칙령 제5호 ‘대한국 표준시에 관한 건’이 반포되면서 동경 127도 30분을 기준으로 한 우리나라의 표준시가 정식으로 적용되기 시작했으나, 그나마도 몇 년이 지속되지 못한 채 경술국치에 따른 국권 상실로 이러한 상황은 일찌감치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처음 오포가 울린 때와 그 장소는 어디였을까? 동아일보 1922년 8월15일자에 따르면, ‘1907년 4월에 호포위수조령(號砲衛戍條令)이 생기면서 설치’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황성신문 1907년 2월12일자에 “남산에 오포 소리 탕하고 들리는가” 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것으로 보아 그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오포가 작동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맨 처음 오포가 설치된 장소는 필동 2가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 구내였다. 이곳은 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에 해당한다. 앞에서 소개한 <빈상설>의 한 구절에서 말한 ‘남산 한 허리에서 연기가 물신 올라온’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그러던 것이 1908년 가을에 용산 군용지가 완공되면서 그곳의 일본군 야포대 화약고의 뒤편 언덕에 오포소가 옮겨져 설치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곳은 남산이 가로막혀 서울 도심 쪽에서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단점이 있다고 해서, 다시 일제의 식민 통치기로 접어든 1913년 정초에 남산 중턱의 한양공원(漢陽公園)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 사이에 쓸모가 없어진 보신각종은 그 어느 순간부터 타종이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다만 1912년 9월13일 저녁에 단 한 차례, 죽은 명치천황을 위한 봉도식을 위해 1백8번의 타종을 했다는 기록만 보일 뿐이다. 이로써 보신각종은 일제 강점기 내내 벙어리 신세로 전락했던 것이다.

조선신궁 건립·경비 부담 등 이유로 발사 중지

 이리하여 남산 위에서는 날마다 오포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으나, 그러한 상황은 7년을 넘기지 못했다. 포병대에 소속된 세 명의 병졸이 날마다 남산 위에 올라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는데다, 무엇보다도 때마침 한양공원 일대가 식민 통치자들에 의해 조선신궁(朝鮮神宮)을 건립하는 후보지로 선택된 탓이었다.

이를테면 그들만의 신성한 공간이 되어야 할 자리에서 감히 대포 소리를 울릴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것은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이 그들이 세운 조선신궁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해서, 1925년에 이를 헐어 인왕산 쪽으로 옮기게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남산 위의 오포는 또다시 효창원과 인접한 선린상업학교의 뒤편 언덕으로 옮겨지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때가 1920년 5월이었다. 그러나 효창원으로 옮겨진 오포는 오래지 않아 1922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군축회의의 결과로 각국의 군함과 대포 숫자가 제함됨에 따라, 일본군에서 직접 관리하던 오포 발사는 경성부청으로 이관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다시 1924년 6월20일부터 매일 대포를 쏘는 경비 부담이 적지 않다는 이유로 오포를 발사하는 일이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오포의 전성시대가 서서히 마감되고 있었다. 오포 소리가 보신각의 종소리를 밀어냈듯이, 오포 소리 역시 새로운 문명의 이기에게 그 자리를 다시 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오포의 자리를 대신해서 등장한 시보 장치는 호적(號笛)이라고 불렀던 ‘사이렌’이었다. 이것은 인천의 관측소에서 통보되는 시보(時報)에 따라 전기로 소리를 내어 서울 시민들에게 정오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장치였다. 이 사이렌이 설치된 장소는 남대문 바로 곁에 있던 경성소방서 구내였다. 경술국치 100년이 된 지금, 오포나 사이렌과 같은 시보 장치는 전혀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지금도 일본 중심의 표준시에 맞춰 날마다 30분을 일찍 살아야 하는 상황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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