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 “노벨상 후보 거론만으로도 만족”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10.12.20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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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립 컬럼비아 대학 응용물리학과 교수 |“아쉽긴 하지만, 연구에 더 매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김필립 제공

과학 부문 올해의 인물로는 김필립 미국 컬럼비아 대학 응용물리학과 교수를 선정했다. 독자 온라인 조사에서도 김필립 교수는 압도적으로 1위에 올랐다.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그가 일반인의 주목을 받은 배경은 노벨 물리학상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10월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올해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 안드레 가임 박사와 콘스탄틴 노보슬로프 박사를 선정했다. 이들은 첨단 신소재인 그래핀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래핀(graphene)은 연필심에 쓰이는 흑연을 뜻하는 ‘그래파이트(graphite)’와 화학에서 탄소 이중결합을 가진 분자를 뜻하는 접미사인 ‘ene’를 결합해 만든 용어이다. 구리보다 100배 이상 빨리 전류를 전달하며, 강철보다 2백 배 강하면서도 신축성이 좋아 구부리거나 접을 수 있다.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와 차세대 반도체 소재로 각광받는 물질이다.

그런데 지난 11월, 세계적인 과학 잡지 <네이처> 온라인판에 노벨상 선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가 실렸다. 노벨물리학상위원회의 실수로 노벨상이 엉뚱한 사람에게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에서 미국 조지아텍 대학의 윌터 드 히어 교수는, 수상자들이 2004년 <사이언스>에 그래핀을 처음으로 합성했다고 발표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이때 발표된 물질이 그래핀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특히 수상자들 본인도 이를 인정했으며 노벨물리학상위원회가 논문 내용을 착각해 잘못된 시상을 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드 히어 교수는 그래핀을 처음으로 합성하고 그 특성을 낱낱이 밝힌 과학자는 김필립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라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지난 2005년 과학 학술지 <네이처>를 통해 그래핀이 실리콘 반도체를 능가하는 신개념 전자 소자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세계 최초로 알렸다.

“이번 수상자 결정은 타당했다고 본다”

논란이 일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가임 박사는 12월7일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필립 교수가 중요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벨물리학상위원회의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네이처>에 기사가 나가는 과정에서 몇 마디가 빠져 오해가 생긴 듯하다”라고 반박했다.

김교수는 가임 박사와 함께 이 분야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학계는 이전부터 ‘그래핀이 노벨상 대상이라면 김필립 교수가 받게 될 것’이라고 평가해왔다. 노벨물리학상위원회의 실수이든 아니든 노벨상 수상자를 번복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을 눈앞에서 놓친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다. 김교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특히 한 분야에 두 번 노벨상을 주지는 않으니까…. 나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리했다. 과학자의 최종 목적이 상은 아니다. 연구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라고 밝혔다.

노벨물리학상위원회의 실수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실수는 아니다. 문서 작성에서 편집상의 오류를 인정한 것뿐이다. 받을 사람이 받았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의 첫 논문이 그래핀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어서 나도 그들의 논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수상자들은 분명히 논문에서 그래핀의 합성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수상자들은 스카치 테이프를 이용해 탄소 구조에서 처음으로 그래핀을 분리해냈다. 아주 단순하지만 창의적 방식이다. 노벨 물리학상은 최초의 기여자를 우대한다. 이번 수상자들의 첫 논문이 나를 비롯한 여러 후발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나를 포함한 연구팀이 일찍부터 그래핀의 연구에 참여해왔고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선도적 연구가 이루어진 바는 있지만 두 박사와 비교해 초기의 기여도에 뚜렷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번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결정은 타당했다”라고 말했다. 

이번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선정 논란을 두고,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과학자였다면 국제적인 파문이 일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김교수는 이런 시각을 경계했다. 그는 “적어도 물리학 분야만큼은 정치적 결정이 배제되어왔다고 믿는다. 학문의 성과를 정치적인 이유(국력)로만 설명하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말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 대상이 된 그래핀이라는 물질은 어떤 물질일까. 김교수는 “그래핀은 그 독특한 물리·화학적 성질로 인해 곧 그 한계에 직면할 실리콘을 기반으로 한 반도체 소자를 대체할 물질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매우 우수한 이동성 등은 실리콘을 위시한 다른 반도체가 보여주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로는 여전히 실리콘을 기반으로 한 기술을 능가하는 데 많은 기술적 난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난 몇 년 동안 나타난 그래핀과 관련된 여러 분야의 과학적·기술적 성과와 성장 속도는 매우 고무적이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그 기술적 응용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 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 그래핀(graphene)은 휘어지면서도 강한 신소재로 반도체·디스플레이 등에 응용할 수 있다. ? 비디오·오디오·내비게이션 등 다양한 기능을 탑재한 그래핀 소재.컴퓨터 스크린을 종이처럼 접어서 휴대할 수 있는 것도 그래핀을 이용하면 가능하다. ⓒ성균나노과학기술원 대학원 제공

 

국내 물리학도들의 롤모델로도 우뚝

김교수는 한국의 그래핀 연구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한국의 그래핀 연구는 대부분 응용에 집중되어 있는데 기술 수준은 매우 선도적이다. 특히 디스플레이나 터치스크린 등의 상용화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 발전했다. 하지만 그래핀에 대한 다른 연구, 특히 기초적인 연구는 아직 그 저변 확대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다양한 연구가 함께 이루어져야 궁극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래핀 연구에만 매진해 온 김교수는 향후 계획에 대해 “당분간은 그래핀에 더 관심을 두고 연구할 예정이다. 또 그래핀과 관계된 인접 물질, 특히 핵사 붕소-질소 같은 물질에서 나타나는 양자 수송 현상에 대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김교수는 세간의 관심 인물이면서 동시에 많은 물리학도가 본받고 싶은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이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다고 한다. 김교수는 “나는 똑똑한 학생이 아니었다. 교수님에게 ‘두 번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라는 말도 들었다. 나보다 똑똑하고 창의적인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 내가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고, 이렇게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에 스스로 많이 놀랐다. 이런 논란 자체가 한국이 노벨상에 좀 더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김교수는 <시사저널> 과학 부문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것에 대해 “나에 대해 이런저런 관심이 있지만, 지나가는 일로 생각하고 싶다. 더욱 연구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1990년 서울대 물리학 학사, 1992년 서울대 물리학 석사, 1999년 하버드 대학 응용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학교가 있는 미국 뉴욕에서 부인, 고등학생인 딸·아들과 살고 있다.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취미이다. 올해의 인물 과학 분야 후보에는 김교수 외에 박종오 전남대 로봇연구소 소장, 고 조경철 박사, 김성은 세종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등도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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