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젊은 피’들이 새판 짠다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11.02.2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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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밴드 접목하는 등 다양한 시도로 ‘위기 돌파’ 꾀해

 

판소리의 기원은 17세기 말 조선 숙종 연간으로 알려졌다. 이후 고종 때 신재효가 판소리 형식을 완성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100년도 되지 않아 판소리는 국가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할 정도로 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이런 판소리의 위기를 새로운 시도로 돌파하겠다는 젊은 피가 대거 나서고 있다. 창작 판소리를 하는 이자람씨나 젊은 국악 뮤지컬 집단 ‘타루’, 판소리와 오페라의 형식을 합친 ‘판페라’를 들고 나온 오지윤씨, 여기에 신민요를 기반으로 다양한 실험을 하는 노래패까지 더하면 우리 소리를 오늘의 음악으로 되살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과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활발해지고 있다.

그중 이자람씨의 시도는 상업적으로도, 완성도로도 주목받고 있다. 어린 시절 <내 이름(예솔아!)>이라는 노래로 큰 인기를 끌었던 이씨는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와 일반부에서 장원을 차지하고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한 정통 소리꾼이다. <적벽가>와 <동초제>, <춘향가> 이수자이기도 하다. 그 한편 이씨는 98학번 대학생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에는 노래패 메아리 활동을 하고, 최근에는 ‘아마도 이자람밴드’를 만들어 홍대 앞에서 공연하고 있다. 대학 시절 국악 뮤지컬 집단 타루를 만들어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대표를 지낸 뒤 음악적 견해 차이로 타루에서 나와 창작 판소리에 도전하고 있다.

이자람씨, 창작 판소리 만들어 세계 무대에서도 ‘호평’

▲ 국악인 이자람씨 ⓒ시사저널 우태윤

브레히트의 희곡을 바탕으로 그가 곡과 노래를 만든 <사천가>는 2007년 11월 초연된 후 꾸준히 재공연을 거듭하면서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창작 판소리가 몇 년씩 재공연된 경우는 <사천가>가 사실상 처음이다. 이 작품은 지난해 8월 폴란드와 시카고에서 공연되었고, 지난 1월에는 뉴욕, 오는 3월에는 프랑스에서 무대에 오른다. 이씨는 오는 6월에는 브레히트의 또 다른 희곡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을 원작으로 창작 판소리 <억척가>를 만들어 LG아트센터와 공동 기획으로 무대에 올린다.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가 어느새 인정받는 브랜드가 된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사천가>가 외국에서는 연극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이씨는 “뉴욕에서도 한국 관객이 웃는 대목에서 미국 관객도 같이 웃더라”라고 말했다. 그는 <사천가>가 ‘창작 판소리이냐, 연극이냐’는 질문에 “판소리와 연극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은 한국의 문제이다. 판소리만큼 한국적인 연극 장르가 없다. 판소리가 가장 한국적인 연극이다”라고 밝혔다.

19세기 중엽 판소리 양식이 정립될 때 판소리는 ‘그 시절의 인기 가요’였다. 지금 무형문화재로 ‘보호’되는 판소리에는 그 시절의 즉흥성, 실험성, 고유의 창법이 저장된 ‘살아 있는 미라’이다. 하지만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판소리는 토씨 하나 다르게 부를 수 없는, 동시대의 한국인 관객은 자막이 없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고급 예술로 바뀌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판소리는 동시대 관객을 웃고 울리게 하는 연극성이 사라지고 소리꾼이 성대를 다스리는 기량을 뽐내는 ‘아크로바틱한 기예’로 여겨지며 대중과 멀어지고 있다.

이자람이 이야기를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통 판소리의 발성을 가져오되 이야기는 동시대의, ‘내 이야기’를 전달하자는 것이다. <사천가>도 그가 스물여덟 살 먹었을 때 ‘한국에서 스물여덟 살이 왜 이렇게 살기 힘드나’라는 고민을 하면서 가슴 속에 이야기가 쌓이고 그것이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 틀에 얹혀지면서 무대 위에 올려졌다. 이자람은 <사천의 선인>을 고른 이유에 대해 “주위에 휘둘리는 주인공의 처지에 공감이 갔다. 좋았다”라고 말했다.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 <사천가>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젊은 관객들은 <사천가>의 스토리에 울고 웃으며 공감하고 있다.

<사천가>의 남일우 연출가는 미국 현지의 반응을 UCLA의 한국 음악 담당 김동석 교수의 말로 대신했다. 김교수가 “창극은 김치 모양임에도 김치맛이 안 났는데 사천가는 김치 모양은 아닌데 가장 판소리적인 느낌, 김치맛이 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남연출가는 “외국인의 반응도 ‘신기하다’가 아닌 ‘작품이 좋다’, 또는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이 이것이다’라는 메일을 보내온다”라고 말했다. ‘민속품’이 아닌 작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국악 뮤지컬 집단 타루, 잘 짜인 드라마와 국악기 연주 버무려 ‘인기’

▲ 정종임 타루 대표 겸 음악감독 ⓒ그림 최익견

국악 뮤지컬 집단 타루는 이자람과는 좀 더 다른 방향에서 판소리의 동시대성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타루의 정종임 대표는 국악 뮤지컬에 대해 “형태는 창극과 같지만 창작 판소리라는 점,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고, 악기도 최대한 국악기 위주로 연주한다”라고 설명했다. 타루는 지난 2002년 설립되어 2006년 판소리 <애플 그린을 먹다>를 시작으로 판소리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오고 있다. 2010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극장 ‘용’의 상주 단체로 선정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동안 무대에 올린 창작 뮤지컬은 <오늘 오늘이> <시간을 파는 남자> 등 세 편이다. 올해 <소설 진채선>을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 장기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정대표는 국악 뮤지컬 창작 원칙에 대해 “판소리에서는 드라마를 기억하기가 더 수월하다. 작품을 만들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잘 짜인 드라마이다. 국악 뮤지컬이 형태는 창극과 같지만, 다른 점은 작창이고 일상의 언어를 쓴다는 점이다. 서양 음악의 음계를 빌린 노래도 들어 있지만 20% 미만이고 창법은 판소리 창법을 엄격하게 지키고 최대한 국악기로만 연주한다”라고 말했다.

타루의 국악 뮤지컬 작업도 나름의 성과를 얻고 있다. 2009년 대학로 게릴라소극장에서 <오늘 오늘이>로 3주간 공연할 때 평균 70% 이상의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다. 또 ‘100% 자립’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2009년 12월 노동부가 선정하는 예비 사회적 기업에도 선정되었고, 티켓 수익으로 단원들의 최저 임금도 보장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60회의 공연을 할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오지윤씨,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실험’

<심청가> 이수자인 오지윤씨도 30년 넘게 판소리 공부를 한 소리꾼이지만 대중과의 접점을 위해 ‘판페라’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그가 <춘향가>의 눈대목인 ‘쑥대머리’를 서양식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서 판소리 창법으로 부른 동영상은 큰 인기를 모았다. 발성은 엄격하게 판소리 창법을 고수하지만 북 반주가 아닌 서양의 선율 악기를 도입해 요즘 대중에게 먹힐 수 있는 요소를 섞고 있다. 지난해 12월에 피아니스트 임동창, 팝페라 가수 임태경과 함께 펼친 공연에서 오씨의 실험은 계속되었다.

이런 시도에 대해 전통예술 진영에서는 의견이 갈린다. 퓨전적인 시도에 대해서는 고개를 젓는 사람도 있다. 전통 예술 공연 기획자 진옥섭씨는 “우리 소리를 한다면서 판소리에 왜 서양적인 요소를 넣는지 동의하기 어렵다”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문인화와 유화의 방법론과 성취가 각기 다른데 왜 그것을 굳이 섞느냐는 것이다. 그는 전통 소리가 어렵다고만 말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오페라 <라보엠>이나 발레극 <백조의 호수>를 공연만 보면 절대 그 드라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미리 공부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왜 전통 공연은 가만히만 있어도 들린다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대해 이자람씨는 “국악 장르도 양적 팽창이 있어야 질적 팽창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오지윤씨와 퓨전 작업을 했던 피아니스트 임동창씨도 “우리 소리에 대한 관객을 늘리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천가> 공연을 본 관객이 뮤지컬 <서편제>를 보러오고, <서편제>를 본 관객이 완창 <적벽가> 무대를 보러가고, 오지윤씨의 ‘쑥대머리’ 동영상을 본 관객이 <춘향가>를 보러갈 확률이 높아질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 국악인 김용우씨 ⓒ시사저널 임준선

 

재즈바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김용우(남·44)씨의 귀에 보사노바 리듬이 들어왔다. 그는 리듬에 맞춰 <장타령>을 흥얼거려보았다. <보사노바를 얹은 장타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카펠라 그룹 리얼 그룹(Real group)의 콘서트를 찾은 김용우씨의 눈에 자국의 민요를 아카펠라로 편곡해 부르는 스웨덴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우리 민요로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아카펠라 군밤타령>은 그렇게 탄생했다.

레게 비트를 얹은 <신아외기소리>. 테크노와 접목시킨 <만드레 사냐>, 맑은 피아노 반주로 시작해 보사노바 재즈로 이어지는 <너영나영>. 젊은 소리꾼 김씨가 지난 15년 동안 가꿔온 음악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국악고-서울대 국악과라는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일곱 장의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그는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은 민요를 노래해왔다. 김씨의 파격적인 작업은 한국 민요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최초로 이끌어냈다는 평을 듣는다. 열혈 팬을 거느린 ‘국악계 대형 스타’라는 타이틀은 덤이다.

피리 전공으로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한 그는 대학 2학년 시절 민요의 길로 들어섰다. “농활에서 만난 어르신의 소리에 매료된 후 전국을 다니며 민요를 채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현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민요를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편곡으로! 1996년에 발표한 1집 앨범이 큰 호응을 얻은 이유는, 민요는 토속적인 음악이라고만 알고 있던 대중이 제 노래를 신선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인터뷰 도중 그는 스피커를 켰다. 흥겨운 인도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가 “이 리듬은 우리의 자진모리 장단과 유사하다. 인도인은 나이트에서 이 곡에 맞춰 춤을 춘다고 한다. 우리 민요로도 충분히 댄스 음악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는 가까운 시일 내에 <아리랑>을 춤곡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품고 있다. 그는 “전국의 수많은 아리랑 중 춤곡으로 표현 가능한 소스를 찾는 것이 관건이다”라고 덧붙였다.

그에게는 또 다른 욕심이 있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41호 12가사 이수자로서 12가사와 시조, 가곡을 담은 정통 국악 앨범을 발표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무형문화재 선생님 밑에서 계속 배웠다면 아마 정통 국악인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15년 동안 대중들과 함께하다 보니 정통 국악으로 돌아가보고 싶은 욕심도 든다”라고 말했다.

국악방송에서 매일 오전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행복한 하루>를 진행하는 그의 생활은 그 자체로 ‘국악의 대중화’라 할 만하다. 정통 국악과 퓨전을 넘나드는 그의 행보가 대한민국 국악계에 유의미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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