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눌러온 불만 분출하는가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11.03.2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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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측이 제안한 ‘초과이익 공유제’ 싸고 논란 분분…윤증현 장관 나서며 갈등 진정 국면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3월10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시사저널 윤성호

재계가 정부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정부 눈치만 살피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3월11일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이 제안한 ‘초과이익 공유제’를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 상징적이다. 이회장은 비유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특정 사안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보다 에둘러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날 발언은 예외였다. 작심한 듯 정부 정책에 대해서 쓴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초과이익 공유제는) 경제학 책에도 없는 내용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라고 꼬집었다. ‘정부 정책을 평가하면 몇 점을 주겠느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낙제점은 아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재계 안팎에서 이건희 회장 지지 발언 쏟아져

파장은 상당했다. 정계나 관계는 물론이고, 재계에서도 이회장을 지지하는 발언이 쏟아졌다. (초과이익 공유제는) ‘급진 좌파적 발상이다’ ‘반시장적 무리수이다’라는 거친 말까지 나왔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초과이익 공유제라는 명칭 자체가 잘못되었다. 대기업만 초과 이윤을 독식한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위원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다음 날 보도자료를 통해 “삼성을 비롯해 기업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성과 분배제를 실시하고 있다. 단, 그 대상을 임직원뿐만 아니라 협력업체로 넓히자는 것이다. 이념의 잣대로 평가하지 마라”라고 맞받아쳤다. 청와대도 이회장의 발언에 불만을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회장의 발언에 대해 논란이 일자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회장 특유의 화법 문제이다. 정부의 동반 성장 정책에는 원칙적으로 공감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낙제점’ 발언에 대해서도 “현 정부가 과거보다 성장해왔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논란의 한 축인 동반성장위원회측도 정위원장의 발언이 사견임을 강조한다. 동반성장위원회의 위원인 이장우 경북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위원장이 말한 이익 공유제는 개념만 나와 있다. 구체적인 방법은 없다. 일부 위원들끼리 얘기할 수 있지만, 위원회 차원에서 논의된 적은 없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자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이 정위원장을 거들고 나섰다. 윤장관은 지난 3월14일 “논란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취지는 살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회장을 겨냥해 “어떤 경제 정책이 낙제점을 면했는가. 낙제점을 면한 정부에서 글로벌 기업이 탄생할 수 있는가”라고 공격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삼성그룹은 김순택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까지 나서서 “이회장께서 ‘진의가 그게 아니었는데…’라며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라고 진화에 나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실무자들도 더 이상 논란이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이다.

당사자들 누구도 논란이 더 확산되는 것을 원치 않기에 겉으로 보기에 이번 논란은 수그러든 듯이 보인다. 그러나 재계 안팎에서는 이회장의 이번 발언을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 이상으로 보고 있다. 현 정권 들어 누적되어온 재계의 불만이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특히 최근 동반성장위원회가 동반성장지수를 매기겠다는 것에 이어 초과이익 공유제까지 들고 나오자 재계 내부에서는 “너무하는 것 아니냐”라는 말이 있었다. 대기업의 한 고위 임원은 “대기업 가운데는 글로벌 기업이 많다. 주주 구성도 외국인이 많은 경우가 드물지 않고 협력업체도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협력업체만을 대상으로 초과이익을 공유한다면 국제적으로 문제가 생길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다고 전체적으로 실시하자면 국제 경쟁력이 하락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비즈니스 프렌들리(기업 친화적인)’를 강조해왔다. 기업이 혜택을 볼 수 있는 환율 잡기에 공을 들였다. 재계는 이 ‘친기업 우산’ 속에서 일정 부분 혜택을 본 것이 사실이다. 기업들은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에도 사상 최고 실적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이상 전선이 감지되었다. 이대통령은 재계를 겨냥해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지난해 7월에는 “삼성전자가 5조원이라는 사상 최고 이익을 냈다는 보도를 보고 가슴이 아팠다”라고도 말했다. 대기업은 탄탄대로를 달렸지만, 협력업체들은 여전히 어려움을 토로하는 현실, 기업 간에도 ‘부익부 빈익빈’이 확대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정부-재계 관계, 이전과 많이 달라질 듯 

▲ 지난해 11월1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이 위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검찰이나 국세청을 통해 대대적인 사정도 벌였다. 한화, 롯데, 삼성, SK 등 주요 그룹이 검찰이나 국세청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한화그룹 관계자가 “검찰의 저인망식 수사로 경영에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롯데그룹은 계열사인 롯데건설에 대한 국세청 세무조사가 3개월 연장되면서 6개월째 조사를 받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전례 없이 재계에 정치권과 관련 있는 인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다수 자리를 잡은 것도 재계 입장에서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현 정권 들어 재계 내에서는 “대통령이 기업의 생리를 잘 알아서인지 오히려 기업을 더 틀어쥐려고 한다”라는 말이 나왔었다. 누적되어온 재계의 이런 불만들이 최근 ‘초과이익 공유제’ 발표를 계기로 폭발했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초과이익 공유제의 개념이 처음은 아니다. 주체가 어디냐가 문제이다.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를 정부가 관여하면서 불만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귀띔했다. 현재 삼성에서 운영하는 ‘프로핏 셰어링’(Profit Sharing·성과공유제)이나 포스코의 ‘베네핏 셰어링’(Benefit Sharing·성과배분제)은 정위원장이 주장한 ‘초과이익 공유제’와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익의 일부를 누구에게 돌려주는지 주체가 다를 뿐이다. 대·중·소 기업 협력재단이 운영하는 동반성장 기금 역시 정위원장의 구상과 다를 것이 없다.

그동안 말을 아껴왔던 윤증현 장관이 정위원장을 두둔하기 위해 나선 것은 이 문제를 조기에 수습하지 않을 경우 ‘말’이 먹히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한 기업의 총수이지만 개인의 말을 가지고 청와대가 나선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윤장관이 나서는 것이 보기에도 좋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이건희 발언’ 파문이 더 확산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향후 재계의 움직임이 이전과는 달라질 것임을 시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부측으로서도 재계를 상대로 이것저것 카드를 들이밀기보다는 무언가 정리를 해야 하는 국면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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