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패션 열풍에 ‘거품’은 없나
  • 김세희 기자 (luxmea@sisapress.com)
  • 승인 2011.04.11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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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저가 해외 브랜드 자리 잡자 국내 업체들도 가세…‘저렴’ 앞세운 가격에 소비자들 “글쎄요”

유니클로나 자라 같은 패스트패션(Fast Fashion)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 들어온 지 5년이 지났다. 소비자들은 해외에서나 볼 수 있던 중·저가 해외 브랜드의 국내 진출에 열광했다. 매출은 성장세를 멈추지 않았고 경쟁 업체들이 앞다투어 한국 시장으로 진입했다. 명동이나 강남 패션 중심지에는 100개가 넘는 매장이 자리 잡고 있다. 국내 패션업체들마저 잇달아 패스트패션 브랜드를 출시했다. 하지만 패스트패션 브랜드가 상륙한 지 5년이 흐른 지금, 소비자들은 혼란스럽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에 환호하지만 한편에서는 가격과 제품에 대한 회의가 일고 있다. 새로운 상품을 빠르고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은 분명히 장점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단점은 있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소비자의 몫이다.

 

▲ 서울 명동에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해외 수입 패션 브랜드 거리. ⓒ시사저널 임준선

 

다양한 품목에다 ‘초고속’ 신상품 출시까지

“이 가방 여기 상품 맞아요?” 손님이 가방 사진을 가져와 직원에게 묻는다. “가방 디자인만 1만 가지 이상이 나오는데 그중에 있지 않을까요.” 직원의 대답에 손님은 허탈한 듯 웃는다.

이곳은 명동에 있는 패스트패션의 대표 주자 자라(ZARA)의 매장이다. 패스트패션은 최신 트렌드를 재빨리 포착하고 패스트푸드처럼 빠르게 생산해 고객들에게 즉시 제공하는 의류를 의미한다. 아직 패스트패션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다면 자라 매장을 단 5분만 둘러보아도 알 수 있다.

자라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의 손님이 오간다. 매장 안에 진열되어 있는 옷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티셔츠, 바지, 블라우스, 원피스, 드레스, 정장, 재킷, 가방, 구두 등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1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금요일에 신상품이 들어온다. 계절별로 신상품을 선보이는 보통 의류 전문점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초고속’이다. 무엇이 신상품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이곳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쉽게 사서 부담 없이 입고 버리고 또 새로운 옷을 사 입을 수 있다.

자라가 초고속으로 배송할 수 있는 비결은 ‘비행기’에 있다. 신상품을 실은 ‘자라 전용기’는 스페인에서 출발해 전세계로 뻗어나간다. 전용기로 운송하기 때문에 하루 이틀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전세계 동시 판매’가 가능하다. 신상품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을 유혹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매력은 없다. 더군다나 이곳에서는 고객을 졸졸 따라다니는 매장 직원이 없다. 직원들은 고객이 보고 간 옷을 정리하고, 묻는 질문에 대답만 해준다. 입어 보기만 해도 무언가 하나 사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없다. 그야말로 ‘쇼퍼(shopper)들의 천국’이다.

제품이 쉴 틈 없이 들어오다 보니 미처 매장에 진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자라 명동점 관계자는 “하루 이틀 정도 매장에 걸어놓았다가 안 팔린다 싶어 바로 창고로 들어간 제품도 많다. 아예 매장에 나오지 못하는 제품도 있다. 워낙 제품군이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다 보니 제때 빛을 보지 못하고 재고 정리 세일 때가 되어서야 손님에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라고 말했다.

디자인에서 생산·유통·판매까지 직접 소화

스페인 그룹 인디텍스의 대표 브랜드인 자라는 지난 2008년 4월 서울 코엑스에 1호점을 열며 한국에 상륙했다. 국내에서 H&M, 망고(Mango), 포에버21(Forever21), 유니클로 등 패스트패션 전문 브랜드(SPA; Speciali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붐이 본격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최신 유행을 즉각 반영해 빠르게 제작하고, 디자인에서부터 생산, 유통, 판매까지 전 과정을 업체가 직접 소화하는 SPA 브랜드는 한국 시장에서 본격 경쟁에 돌입했다.

사실 자라에 앞서 국내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SPA 브랜드는 유니클로이다. 일본 그룹 패스트리테일링의 대표 브랜드인 유니클로는 지난 2005년 롯데백화점 서울 영등포점에 4백69㎡(1백42평) 규모의 1호점을 열었다. 시작부터 물량 공세를 펼친 유니클로는 국내 브랜드 출시와 동시에 반향을 일으켰다. 불과 1년 만인 2006년 3백억원의 매출을 달성했고, 지난 2010년에는 매출을 2천5백억원 기록하며 한국 시장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고객층도 다양했다. 유니클로 일산점 관계자는 “유니클로는 면 티셔츠나 면바지, 청바지 등 기본적인 제품을 주력 상품으로 한다. 따라서 20~30대 젊은 층뿐만 아니라 10대 학생부터 40~50대 중·장년층까지 고객층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반면 자라, H&M, 망고, 포에버21 등의 SPA 브랜드는 20~30대 젊은 여성층이 주요 타깃이다. 일부 브랜드에서는 남성복·아동복 라인을 고루 갖춰 고객층을 넓혀가기도 한다. 하지만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여성복이다. ‘젊은이의 거리’ 명동 일대를 보면 해외 SPA 브랜드 매장이 무려 열두 곳에 달한다. 그중 자라 매장만 세 곳이다. H&M은 두 곳에 매장을 두고 있다. H&M 명동점 관계자는 “H&M에는 아동복 라인이 있어서 가족 단위의 고객도 꽤 있는 편이다. 종류가 많고 가격도 1만~2만원대로 저렴하다. 게다가 유니클로 같은 다른 브랜드와 비교했을 때 디자인도 좋아서 많은 고객이 찾는다. 하지만 주요 고객은 20대 여성이다. 여성 청바지 같은 경우 1만6천원에서 시작해 가격이 저렴하고 또 드레스 라인도 잘 갖추고 있어서 20대 여성에게 반응이 좋다”라고 말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종류, 저렴한 가격, 거의 매일 쏟아지는 신상품 등으로 SPA 브랜드 열풍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대답은 회의적이다. 글로벌 SPA 기업은 최근 5년간 산업 평균을 크게 상회하는 연평균 15%대 매출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자라는 16.3%, H&M은 13.7%, 유니클로는 11.8%에 달한다. 수익성에서도 글로벌 IT 기업과 맞먹는 10%대의 영업이익률을 나타내고 있다. 국내 패션 시장에서의 파이가 커짐에 따라 이들 기업의 매출 중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그만큼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매출 경쟁과 무관하게 소비자들은 헷갈려 한다. 패스트패션 개념을 혼동하고, 생각보다 저렴하지 않은 가격에 놀라기도 하고, 그래도 유행을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자라 명동점에서 김가영씨(28·은행원)를 만났다. 그녀의 손에는 자라 쇼핑백과 H&M의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중저가 브랜드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좀 비싼 편이다. 오늘 본 것 중에 가디건은 2만원도 안 되는 것이 있었지만 질이 안 좋아 보여 사지 않았다. 괜찮아 보이는 블라우스는 10만원이 훌쩍 넘고 재킷 같은 것은 20만원이 넘는 것도 봤다. 그래도 자라는 워낙 내 또래의 여성들이 좋아하니까 가끔 나왔을 때 한두 개씩 사간다.”

H&M 앞에서 만난 이소연씨(23·학생)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5만원 정도 주고 청바지를 샀는데 무릎이 잘 늘어나고 빨래할 때 물이 많이 빠져서 놀랐다. 해외 유명 브랜드라고 해서 나름대로 믿고 샀는데….”

해외 SPA 브랜드들이 전투적으로 한국 시장을 점령해나가고 있지만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이처럼 이견이 존재한다. 지난해 10월 대한상공회의소는 ‘패스트패션의 혁신 사례와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이들 브랜드의 인기 비결로 ‘패션성’과 ‘저가격’을 꼽았다. 보고서는 “보통 의류는 원자재에서 봉제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업체가 만들고, 완성된 제품의 유통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이들 업체들은 전 과정에 대한 공급망을 일괄 관리해 낮은 가격을 실현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20만~30만원대 의류는 결코 ‘저가격’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자라 관계자는 “우리는 합리적인 가격이나 빠르고 쉬운 접근성 대신 모던하고 도시적이고 시크하며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추구한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내용은 SPA 브랜드 업체들이 추구하는 기본 목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자라는 여전히 SPA 업체이다. 그는 이어 “자라가 명품 브랜드는 아니지만 몇 개의 고가 라인을 가지고 있다. 이런 비싼 제품들은 연예인 협찬을 주기도 한다. 소비자들은 고가의 제품을 갖추고 있는 자라 매장에서 옷을 구입하면서 과시욕을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또 저렴한 제품을 구입하면서 고가 라인을 갖춘 자라의 브랜드 가치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국내 유명 업체들, ‘SPA 브랜드’ 도입 경쟁도

H&M은 자라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저렴한 가격대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H&M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패스트패션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에서는 쉽게 사 입고, 쉽게 버리고, 또 쉽게 새로 사 입는 패스트패션의 개념이 잘 잡혀 있다. 하지만 국내 소비자들 중에는 이 개념을 잘못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다. 1만원짜리 티셔츠를 사서 5만원짜리 티셔츠에 해당하는 품질을 원하거나, 2만~3만원짜리 청바지를 사서 리바이스나 디젤 청바지의 질을 원한다. 왜 무릎이 잘 늘어나냐, 왜 물이 빠지냐고 불평하시면 ‘싸서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이 패스트패션 브랜드가 아닌 그냥 ‘해외 브랜드’로 인식하는 데서 이런 혼동이 오는 것 같다.” 소비자들이 ‘해외 브랜드’에 거는 기대치가 저렴한 가격이라는 중요한 요소마저 상쇄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혼란 속에서도 해외 SPA 브랜드는 국내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점포 수는 점점 늘어나 이제는 100여 개의 매장이 코엑스, 명동, 강남, 신사동 가로수길 등 패션의 메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는 국내 SPA 브랜드도 도전장을 내밀고 공격적으로 시장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총매출 1조원을 돌파한 LG패션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브랜드 TNGT에 SPA의 성격을 혼합해 시장 정벌에 나섰다. 박석용 TNGT 차장은 “즉시 반응 생산 체계를 강화하고 상권 특성에 맞춘 콘셉트 매장을 새로 내는 등 80개로 늘려 글로벌 브랜드들과 경쟁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규 브랜드인 ‘스파이시 칼라’도 명동에 매장을 열어 국내 SPA 브랜드로서 경쟁 체제에 돌입했다. 토종 브랜드 ‘코데즈컴바인’은 아동, 아웃도어 캐주얼 라인 등 라인 확장을 통해, 제일모직은 새로운 SPA 브랜드 론칭을 통해 해외 SPA 브랜드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아직까지 시장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대다수의 소비자는 이들 한국 업체가 SPA 브랜드라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해외 SPA 브랜드에 대한 인식이 굳어진 데서 오는 고정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신규 SPA 브랜드에 대해 “유니클로보다 품질은 좋게, 자라보다 감도는 높게 만들라”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국내 SPA 업체들은 한국판 자라·유니클로로 성장할 수 있을까. 대세를 흔들어놓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착하지 않은’ 가격도 있다

“생각보다 비싸다.” 저렴한 가격을 생각한 소비자들이 SPA 브랜드를 접했을 때 나오는 반응이다. 이것은 국내외 업체를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TNGT의 민소매 원피스는 16만원에 달하고, 자라의 민소매 블라우스는 9만원가량이다. 이는 그나마도 저렴한 편이다. 매장에는 20만원이 넘는 제품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SPA 브랜드 매장을 즐겨 찾는 소비자라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을 법하다. 지난겨울 시즌에 나왔던 4만9천원짜리 가디건이 있다고 치자. 소재도 좋고 몸에 붙는 라인도 좋았다. 그런데 이번 봄에 흡사한 가디건이 다시 나왔다. 가격은 6만9천원이다. 2만원이 올랐다. 왜일까? 더 좋은 소재를 사용했을까? 대부분 상품 번호가 다르니 다른 제품이려니 생각하거나 이마저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

자라 관계자는 “이전 시즌의 인기 상품은 다음 시즌에 가격이 올라서 다시 나온다. 직원이 봐도 구분을 못할 정도로 비슷하다. 직원도 상품 번호로 겨우 구분한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에게 반응이 좋다. 이런 관행은 다른 업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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