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길 줄 아는 것도 능력, 다른 차원에서 학생을 보자
  • 전우영│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11.04.25 12:3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복과 심리적 건강 수준이 반영된 대학 평가 지표 만들어야 할 때

카이스트 학생들이 연이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올 해 들어서만 벌써 네 명이 자살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1만5천명 이상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는 통계가 보도되었을 때보다 카이스트 학생 네 명이 연이어 자살했다는 뉴스가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의 강도는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카이스트에 입학했다는 것은, 출신 대학이 어디인지가 개인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이미 상당한 성취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졸업만 하면 어느 정도는 성공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에게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더구나 카이스트 학생들은 이미 우리 사회의 경쟁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고, 또한 카이스트에 입학할 때까지 성공적으로 경쟁에서 승리해왔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좌절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카이스트 사태’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들었던 세 가지 가지 의문점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해보았다.

ⓒhoneypapa@naver.com

1. 차등 등록금제의 사회 심리학적 의미는?

차등 등록금제는 성적에 따라 등록금 중에서 수업료를 차별적으로 부과하는 제도이다. 카이스트의 수업료는 6백만원인데, 학점이 3.0 이상인 학생은 수업료 전액을 면제받는다. 하지만 3.0 미만에서 2.0 사이의 학생은 0.01점당 약 6만원의 수업료를 본인이 내야 하고, 학점이 2.0 미만으로 나오면 해당 학생은 수업료 6백만원 전액을 지불해야 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차등 등록금제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일종의 경제적인 처벌을 부과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시험을 잘 치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낮은 학점을 받는 것으로 먼저 1차적인 처벌을 받고 난 다음에 경제적인 차원에서 2차적인 처벌을 받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지 경제적인 차원의 처벌에서만 그치지 않고 사회적·심리적 차원의 3차, 4차 처벌로 이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카이스트 학생들을 과학영재라고 부른다. 부모들에게 이들은 등록금도 면제되는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한 자랑스러운 자식이다. 아마도 카이스트 학생들 대부분이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뜻함)’라고 불렸을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B학점(80점 또는 ‘우’에 해당하는)도 받지 못해서 엄청난 액수의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6백만원은 주위의 도움 없이 학생 혼자서 마련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큰 액수이다. 결국 수업료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을 포함한 주위에 자신의 처지를 알릴 수밖에 없다. 일정 수준의 성적만 받으면 면제받을 수 있었던 수업료를, 최소한의 성적도 받지 못해서 모두 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알려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해당 학생의 자존감은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고, 과학 영재라는 자신의 자아 정체감마저 무너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2.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큰가?

우리 사회에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혹독한 경쟁 속에서 길러진 생존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환경에서도 남들보다 더 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숨이 막힐 정도의 경쟁에 내몰려도, 이 고통만 잘 극복하면 미래의 새로운 환경 또는 지금보다 덜 경쟁적인 상황에서는 더 강력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혹독한 경쟁을 이겨낸 덕분에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고 성공적으로 삶을 영위할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나라 학생들을 성적 제일주의를 목표로 하는 무한 경쟁에 내모는 의사 결정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중·고등학교 시절에 다른 어느 나라의 학생들보다 더 높은 강도의 경쟁을 이겨낸 대한민국 학생들은 이후의 새로운 경쟁 상황에서 그들이 갈고 닦아온 경쟁력을 바탕으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

경쟁은 경쟁하는 차원의 능력만을 강화시킨다. 유도로 경쟁하면 유도 경기 능력이 강화되고, 레슬링으로 경쟁하면 레슬링 경기 능력이 강화된다. 마찬가지로 높은 성적만을 목표로 경쟁하면 성적을 잘 받는 능력만이 강화된다. 이는 운동하는 부위의 근육만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열심히 밤 새워가며 이두박근 운동을 한다고 해서 허벅지 근육도 덩달아 단단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경쟁에 노출되지 않는 차원의 능력이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특정한 차원의 경쟁에만 쏟아붓는다면 다른 차원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경쟁을 하지 않은 차원의 능력은, 운이 좋은 경우에는 이전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퇴화할 가능성이 크다. 마치 아령을 들어서 자극을 준 이두박근만 점점 커지고, 운동을 통한 자극을 전혀 주지 않은 다른 근육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위축되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엘리트 체육 정책을 통해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최고의 성과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금메달을 딴 이후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에 자살에까지 이르는 경우도 그와 다르지 않다.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위한 경쟁에 전력투구하는 동안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은 오히려 퇴화한 것이다. 금메달의 영웅이 운동을 그만두자마자 사회 부적응자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이유는, 금메달을 따는 데 필요한 근육은 만들었지만 사회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근육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은 우리의 엘리트 체육을 닮았다. 성적을 잘 받는 것이 지상 명령이고 학생들은 이를 목표로 살인적인 강도의 경쟁을 한다.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는 경쟁에 익숙한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입학시험이나 자격시험은 잘 치르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기대했던 만큼의 수행이나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미국 명문대 입학 허가는 잘 받아내지만, 중도 탈락자 비율이 44%로 가장 높은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이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근육만으로 살 수 없듯이 다양한 차원에서 경쟁력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체육 등의 차원에서도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타인과의 경쟁을 목표로 한 경쟁력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는 능력 차원에서의 경쟁력을 키우는 교육이 필요하다. 편하게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는 능력도 경쟁력이다. 이것은 가수가 무대를 즐기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경쟁력인 것과 마찬가지다.

3. 대학 평가의 새로운 기준?

해마다 국내 및 국외 기관에서 수행하는 대학 평가에는 대학생과 교직원이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얼마나 건강한지에 대한 평가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대학 구성원의 행복 그리고 몸과 마음의 건강 수준이 포함된 대학 평가 지표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구성원의 행복 수준이 세계 1위인 학교가 되기 위해서 경쟁하는 대학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