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가 건넨 쪽지가 인출 신호탄 되었다”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11.05.10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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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정지 전 예금 대량 빠져나간 부산저축은행 창구 직원 증언 <시사저널>이 입수한 VIP 명단에 정·관계 인사는 없어

 

▲ 지난 5월6일 부산저축은행 비대위 40여 명이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안에 들어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지난 2월16일 오후 7시 부산 동구 초량동에 있는 부산저축은행 본점에 부산저축은행그룹 임원과 간부 사원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늦은 시각에 그룹 전 임원, 지점장, 팀장을 소환하는 일은 흔치 않은 터라 회의 참석자들의 얼굴들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부산저축은행그룹 박연호 회장과 김양 부회장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있는 금융감독원에 불려가 아직 내려오지 못했다. 이들과 함께 서울에 갔다가 먼저 내려온 강성우 감사가 회의를 주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감사는 5층 사무실에 틀어박혀 오후 8시가 넘어도 회의실로 내려오지 않았다. 강감사는 당시 금융감독원 관계자와 통화하며 ‘부산저축은행 영업정지’를 막아보려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산저축은행 소속 한 지점장은 “영업정지와 관련한 논의라고 알고 있는 터라 당시 회의실에 모인 임직원들은 초조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임원과 간부 사원이 회의실에서 초조하게 강감사를 기다리는 동안 1층 창구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부산저축은행 임원이자 여신심사위원장인 안 아무개 전무가 7시가 넘어 고객 이름이 적힌 쪽지를 창구 직원에게 넘기면서 그 안에 적힌 고객 예금을 해약하라고 지시했다.

창구 여직원은 반발했다. 영업 시간이 종료된 상황에서 느닷없이 특정 고객의 예금을 해약하라는 지시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안전무가 재차 지시하자 창구 직원들은 어쩔 수 없이 해약 업무를 시작했다. 해약 업무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8시20분 고객 10여 명이 은행 창구에 나타났다.

그 다음 5천만원 이상 예금자들이 속속 창구 안으로 들어왔다. 당시 창구 업무를 담당한 직원은 “안전무가 건넨 쪽지에 오른 고객 10여 명이 먼저 창구에 와 돈을 찾아갔다”라고 말했다.

인출 사태 한참 지나 금감원 직원 나타나

▲ 5월6일 부산저축은행 비대위 소속 예금주들이 금융감독원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창구 직원들도 동요했다. ‘영업정지를 피할 수 없나 보다’라고 판단한 직원들은 자신은 물론 친·인척 명의의 예금을 해약·인출하기 시작했다. 예금 인출액이 갑자기 늘어나자 은행에 상주하는 금감원 직원 두 명이 9시50분쯤 은행 창구로 내려왔다. 금감원 직원 두 명은 느닷없이 늦은 시간에 거액의 예금이 인출되는 것을 모니터로 확인하고 뒤늦게 비정상적인 예금 인출을 막으려 했다. 사태가 벌어진 한참 후에 금감원 직원이 등장하는 바람에 돈을 인출한 고객들은 하나 둘씩 은행을 떠났다. 

이날 오후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인출된 금액은 92억원가량이었다. 정상 창구 마감 시한은 오후 4시이다. 이날 오후 4시부터 10시5분까지 인출된 금액은 1백40억원이 넘는다. 김용부 이사는 “올해 평균 영업 마감 시한은 6시쯤이다. 연장 영업이 비일비재했던 탓이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사전 인출액을 산정하려면 오후 6시부터 인출된 금액만 계산해야 한다. 이 금액이 92억원이다”라고 말했다.

사전 인출 금액이 가장 많은 고객은 신협 단체 예금이었다. 천주교 당감신협을 비롯한 신협 단체 예금이 60억원이나 되었다. 호우장학회 예금 5억원도 빠져나갔다. 부산저축은행 소속의 한 임원은 “안전무가 천주교 신자라 천주교 당감신협과 교류가 잦았고 영업정지 이전에 당감신협 관계자와 만나 해약이나 예금 담보 대출에 대해 논의한 것을 목격했다”라고 말했다.

안전무는 광주일고 출신으로 김양 부산저축은행그룹 부회장의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다. 부산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해 부산저축은행으로 성장시킨 박상구 명예회장을 포함해 주요 경영진이 호남 출신이다. 호남 지역 장학회 자금이 부산저축은행에 예치된 데는 이러한 연고가 작용했다. 안전무는 평소 호우장학회를 각별히 챙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산저축은행 관계자는 “안전무가 천주교 단체 예금과 호우장악회에 영업정지 이전에 사전 예금 인출 편의를 보아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안전무는 검찰 조사에서 ‘당감신협이나 호우장학회에 영업정지와 관련한 정보를 알린 적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호우장학회는 ‘저축은행 부실을 걱정해 당일 오전에 이사회를 열고 예금 인출을 결의했고 이상영 호남향우회장이 오전에 창구 직원에게 인출을 요청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산저축은행 관계자는 “신협 관계자가 업무 시간이 끝난 저녁에 예금을 인출하러 왔다면 누군가로부터 사전에 영업정지 정보를 들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단체 예금 제외한 27억원은 개인 계좌 인출

단체 예금을 제외하면, 27억원이 개인 고객 계좌에서 인출되었다. 이 가운데 10억원은 창구 직원과 그 친지들의 예금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17억원을 인출한 개인 고객들은 어떻게 영업정지 정보를 사전에 얻고 늦은 시각에 창구에 나타났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자가 확인한 인출자 명단에는 국회의원이나 금감원 관계자는 없었다. 유력 인사가 친·인척 명의로 개설한 계좌는 있을 수 있다. 대검 중수부는 아직까지 실명 조회 과정에서 유력 인사의 계좌를 발견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수부는 지금 부산저축은행 초량본점에 수사관 18명, 부산2저축은행 덕촌본점에 수사관 13명을 상주시키며 하루 종일 창구 직원을 소환해 차명 계좌 여부를 추궁하고 있다. 부산지검 11층 특수부에 수사본부를 차린 중수부 수사관은 1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수부는 이곳으로 지점장급 간부 사원과 창구 직원을 소환해 정치권이나 금융 감독 당국 관계자를 비롯해 유력 인사들의 사전 인출 여부를 추적하고 있다.

부산저축은행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위원장 정태호 부산저축은행 센터지점장)도 지난 5월6일 임원 세 명과 지점장 여덟 명이 참석하는 비대위 회의를 열었다. 비대위는 명예회복에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5천만원 이상을 인출한 고객 명단 22명의 계좌에 대해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려 했다. 당시 김용부 부산저축은행 이사는 “지점장급은 고액 계좌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 모두 파악하고 있다.

검찰 수사 결과를 보아야겠지만 아직까지 사전 인출자 22명 가운데 국회의원이나 고위 관료 차명 계좌는 없었다”라고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부산저축은행 임직원으로부터 정보를 얻은 고객이 2차로 지인에게 흘렸을 수 있다. 또 금감원 쪽에서 정보가 흘러나왔을 수도 있다. 검찰은 주요 경영진 범죄 조사는 마무리하고 사전 예금 인출 주모자나 공범자를 찾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당시 회의실에 모인 임원과 간부는 1층 창구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른 채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금융감독원이 당일 대주주를 모아 놓고 부산저축은행그룹 산하 부산저축은행, 부산2저축은행, 대전저축은행, 전주저축은행 모두에 대해 영업정지를 신청하라고 종용했다는 것이다.

김 아무개 부산2저축은행 이사는 “당시 부산저축은행은 1천억원, 부산2저축은행은 7천억원을 보유하고 있고 자기자본비율(BIS)도 부산저축은행 5%, 부산2저축은행 5.12%라서 회의 참석자들은 금감원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대전저축은행만 영업정지를 신청하고 나머지는 정상 영업하자고 결의했다.

하지만 다음 날 부산저축은행 임직원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업정지 조치는 이미 정해진 수순대로 진행되었다. 영업정지 조치가 내려진 것이 알려지자 고객이 앞다투어 예금을 인출하는 바람에 자산 규모 기준 국내 1위 저축은행 그룹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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