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에 다가선 ‘타이완의 배신자’
  • 소준섭│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11.06.2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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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경제, 2030년에 미국의 두 배” 예측 내놓은 린이푸 세계은행 부총재의 인생 역정

▲ 린이푸 세계은행 부총재가 지난 3월23일 홍콩 대학이 주최한‘중국 경제 개발 포럼’에서 연설하고 있다. ⓒXINHUA

한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이 중등 수준에 이르게 되면 경제 발전 방식의 전환을 순조롭게 실현할 수 없게 되어 경제 성장의 동력이 부족하게 되고, 결국 경제가 정체된다. 이것을 이른바 ‘중등 소득의 함정’이라고 한다. 세계은행 부총재이자 중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린이푸(林毅夫)는 정책과 발전 방식이 타당하기만 하면 중국은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단기적으로 중국 경제가 직면한 통화 팽창의 압력과 부동산 거품 위기 등의 문제를 적절한 거시 경제 정책을 조정하는 것으로 해결해나가면서 동시에 장기적으로 기술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해서 경쟁력을 높이고, 소득 재분배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하며, 경제 성장과 환경의 관계를 잘 처리해나가야 한다고 권고한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핵심 경제 브레인

린이푸는 주룽지 총리 시절부터 오늘날 원자바오 총리에 이르기까지 중국 경제 정책 결정에서 핵심적인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농업 경제와 국유 기업 개혁 등의 분야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오랫동안 타이완의 재계 및 정계 인물들과 중국 대륙을 연결해 온 핵심 인물이었다. 린이푸는 지난 3월에 중국 경제가 향후 20년 동안에도 8%의 고속 성장을 지속해 2030년이 되면 중국의 경제 총량은 구매력 기준으로 미국 경제의 두 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 바 있다. 

린이푸(林毅夫)는 1952년 타이완 이란(宜蘭) 현에서 태어났다. 이란 현은 천수이볜 전 총통의 출생지로서 타이완의 제1 야당 민진당(民進黨)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그는 타이완 대학에 다니다가 대학을 포기하고 타이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75년 2등으로 졸업해 학생연대장을 맡았다. 다음 해에 타이완 정치대학 기업관리연구소 석사 과정에 국방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78년 기업관리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 금문도(金門島) 선전방송 전방초소의 연대장을 맡아 외빈들의 참관을 접대하는 임무를 책임졌다. 이 부대는 전 사단에서 가장 중요한 부대로서 우수한 병사들만 선발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비와 복지의 수준도 가장 좋은 부대였다. 특히 이곳은 금문도에서 중국 대륙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서 썰물 때가 되면 그 거리가 고작 2천3백m에 불과하다.

린이푸는 어릴 때부터 쑨원(孫文)의 “오직 제군들에게 바라는 것은 중국 진흥의 책임을 자신의 어깨에 지는 것일 뿐이다”라는 유훈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살았던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이 10억 중국인들의 복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자신의 몸을 던져 기여하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그는 훗날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아편전쟁 후 중국은 열강에게 능욕당하는 역사를 겪어야 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중국이 하루바삐 부강해질 수 있는지 골몰했었다. 닉슨의 중국 방문, 중·일 수교 그리고 중·미 수교 후에 나는 갈수록 중국 부강의 희망을 중국 대륙 쪽에 두게 되었다. 한 명의 중국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공헌을 하려면 반드시 대륙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9년 5월16일, 린이푸는 부대원들에게 거짓으로 ‘훈련 명령’을 내리고 부대원들에게 야간 점검 후 반드시 자기의 방에서 머물도록 하고, 만약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을 발견해도 사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이날 바다에서 수영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린이푸 자신이었다. 그리고 린이푸는 ‘실종’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타이완군측은 린이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이미 린이푸는 중국 대륙에 성공적으로 상륙해 있었다. 하지만 중국측이 린이푸의 상륙 사실을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타이완측도 그가 ‘반역죄를 저지르고 중국에 탈출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결국 1년이 지난 뒤, 타이완측은 린이푸가 실종 후 사망했다고 발표하고 유가족에게 위로금까지 주었다.

10억 중국인의 복지 위해 해협을 헤엄쳐 건너

▲ 지난 3월11일 린이푸 세계은행 부총재가 미국 워싱턴에서 중국 방송 신후아와 인터뷰하고 있다. ⓒXINHUA

가족·친척들은 모두 그가 세상을 떠난 줄로만 알고 묘비까지 세웠다. 하지만 그의 처는 눈물로 지새우면서도 결코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당시 그녀에게는 세 살 된 아들이 있었고, 또 임신 중이었다. 몇 년이 흐른 뒤 어느 날 그녀는 린이푸가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곧장 미국으로 달려가 마침내 온 가족이 극적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까지 린이푸가 중국 대륙으로 탈출할 때 농구공 두 개를 품고 해협을 헤엄쳐 건넌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문은 2008년 린이푸 부부의 기자회견이 열렸을 때 린이푸가 수영 실력이 뛰어나 2천m 정도는 충분히 수영할 수 있다는 부인의 증언에 의해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2002년 타이완에서 살고 있던 린이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린이푸는 타이완 정부에게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고, 당시 ‘인권과 민주’를 내세우던 민진당 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타이완 국방부는 대륙에 ‘투항’한 죄목을 들어 그의 타이완 방문을 반대했다. 심지어 국방부장관은 만약 린이푸가 온다면 반드시 체포해 조사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린이푸 부친의 장례식 참석을 둘러싸고 타이완 사회는 찬반으로 나뉘어 의견이 분분해졌다. 결국 린이푸는 타이완 방문을 포기하고 대신 그의 부인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린이푸는 베이징 대학에서 서방 경제학 이론을 거의 암송하고 유려한 영어 실력을 갖추어 이미 유명한 학생이 되었다. 1980년 막 대외 개방을 시작한 중국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197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시카고 대학 명예교수 시어도어 W. 슐츠였다. 당시 슐츠는 베이징 대학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통역을 한 사람이 바로 린이푸였다. 슐츠는 린이푸의 통역이 아주 마음에 들었고, 그에게 시카고 대학 유학을 권했다. 슐츠는 귀국 후 곧바로 린이푸를 시카고 대학에 추천했고, 베이징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1982년 꿈에 그리던 시카고 대학 유학을 떠났다.  

린이푸는 1987년에 귀국했는데, 그는 중국 개혁·개방 이후 해외에서 귀국한 최초의 경제학 박사였다. 귀국 후 국무원 발전연구중심 부소장으로 재직했던 그는 4년 뒤 베이징 대학 중국경제연구중심 주임을 맡았는데, 이 중국경제연구중심은 이제까지 중국 경제학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성(長城) 금융연구소를 설립해 중국에서의 금융 체제 개혁과 민영 은행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린이푸는 현재 중국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군인은 말가죽에 싸여 시체로 돌아오는 것을 영광으로 삼고, 나의 가장 큰 소망은 바로 과로로 책상 위에서 죽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는 학자로서 언론 접촉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국제 경제학술지에 가장 많은 논문을 발표한 중국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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