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잔해 끌어안고 고민 깊어진 영국
  • 김지영│런던 통신원 ()
  • 승인 2011.08.23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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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진정된 ‘8월 폭동’의 후유증 심각사법 처리 중요하지만 폭동의 성격·원인 진단 더 시급

‘영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영 제국의 전통, 현대 민주주의의 종주국, 안정된 신사의 나라 등이다. 하지만 새로운 이미지가 생겼다. 영국 대도시의 약탈과 방화 장면들이다. ‘8월 폭동’은 두꺼운 화장 뒤에 가려진 일그러진 21세기 영국의 민낯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흔들리는’ ‘병든’ ‘도덕이 무너진’ 같은 수치스런 수사들과 피 흘리는 아시아계 유학생의 가방에서 물건을 훔치는 영국 청년들의 동영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평화로운 여름휴가철에 벌어진 폭동은 영국 사회에 불편한 진실과 함께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지난 8월4일 영국 런던의 북부 도시 토트넘에 살던 29세의 흑인 청년 마크 던컨이 사망했다. 경찰의 총기 발포에 의한 죽음이었다. 사건 후 이틀 동안 가족과 친구들은 마크 던컨의 사망에 대한 진실 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경찰은 불성실하게 대응했고, 이것이 시위의 발단이 되었다. 8월6일 촉발된 시위의 불씨는 다음 날 7일 런던 북부 엔필드와 남부의 브릭스톤으로 번져나갔다. 시위는 약탈과 방화를 동반한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블랙베리폰 문자메시지를 매개체로 한 청년들의 폭동은 8일과 9일 정점에 이르렀다. 폭동은 더욱 거세게 런던을 강타하고, 잉글랜드 서부의 브리스톨, 중부의 버밍험, 북부의 노팅험, 리버풀, 맨체스터 등 전국 대도시로 무서운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대대적인 경찰력 배치와 강경 진압 및 색출을 시작한 10일을 기점으로 런던의 폭동은 잦아들었다. 영국 전역의 8월 폭동은 발생 후 일주일 만에야 진정되었다.  

후드티(모자 달린 티셔츠)를 입고 두건이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청년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 차량과 버스를 향해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길가에 주차된 차량 및 쓰레기통 등에 불을 질렀으며, 일부 청년들은 상점 창문을 부수고 집기와 물품을 끌어냈다. 폭동이 정점에 이른 대도시의 풍경은 마치 게릴라 전투를 방불케 했다. 잉글랜드 전역의 수백 개 상점이 약탈당했고 대형 건물이 불탔으며, 화염으로 치솟은 불길과 검은 먹구름이 대도시들을 휘감았다.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고, 사망자도 생겨났다. 폭동을 촉발시킨 마크 던컨의 총기 사망에 이어, 6일 런던에서는 흑인 청년 엘리가 다시 총상으로 사망했고, 10일 버밍험에서는 가게를 지키던 남아시아계 청년 세 명이 뺑소니 차량에 치여 사망했다. 8일 런던에서 폭행당한 68세 노인은 수많은 사람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3일 후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 지난 8월8일 영국 런던의 북부 해크니에서 폭동에 가담한 젊은이가 불타는 자동차 앞을 지나가고 있다. ⓒEPA 연합

원인을 가난 등 문제로 일반화하기 어려워

여섯 명의 시민 사망자, 2억 파운드(3천5백억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해, 2천3백여 명의 폭동 가담자, 1천여 건이 넘는 재판이 지난 일주일의 8월 폭동이 영국 사회에 남긴 상처들이다. 영국 사회는 폭동에 대한 사법 처리와 경제적 보상 같은 현실적 문제도 처리해야 하지만, 더 중요하게 남겨진 문제는 폭동의 성격과 원인을 진단하는 것이다.

영국 사회는 8월12일 폭동이 가라앉자 다양하게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시민단체, 정치권, 미디어는 무책임한 폭력적 현상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용납할 수 없다는 데 대부분 동의했다. 하지만 그 원인과 해결 방법에 대해서는 부모들의 자녀 교육, 학교 교육, 인종 갈등, 복지 재원 감축, 축적된 자본주의의 소비주의 문화, 갱스터 문화, 소셜 미디어의 발달 등 다양한 진단을 쏟아냈다. 

이번 사건은 과거 영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벌어졌던 폭동·시위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1981년 영국과 2005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시위처럼 급격한 긴축 경제에 반대하는 사회·정치적 구호도 없고,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나 1985년 영국 브로드워터팜의 인종 갈등 시위처럼 흑인들만의 사건도 아니었다. 중도 우파 성향의 신문 텔레그래프는 폭동의 원인을 경제 구조적 가난만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폭동이 발생한 지역 중에는 전국 평균보다 부유한 지역도 있고, 폭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일반 직업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케팅 기업 사장의 19세 여대생 딸, 건축 기술자, 초등학교 교사, 우체부, 심지어 2012년 런던올림픽 홍보대사를 맡기로 한 10대 육상 유망주까지 이 사건에 가담했다. 폭동의 원인으로 인종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영국의 저명한 한 역사학자는 이번 사건의 원인으로 자메이칸 아프리카의 갱스터 문화의 확산과 흑인 가정의 비교육적 환경을 지적했다. 대다수 영국인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지만, 일부 극우 단체로부터는 지지를 받았다.

전문가들이 복잡한 사회 현상이라고 폭동을 진단하는 것과 달리, 폭동에 참여한 청년들은 단순하고 가볍게 대답했다. 그들은 미디어 인터뷰에서 ‘왜 그러냐’라고 묻자 무미건조한 표정과 함께 ‘그냥 재미로’ ‘부자가 잘못해서’ ‘비싼 전자제품이나 옷들이 갖고 싶어서’ ‘목이 말라 부서진 가게에서 그냥 물을 가지고 나왔다’라고 대답했다. 영국 사회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대답을 하는 동안에 보여진 그들의 표정이었다.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한 표정과 대답은 오히려 이 문제의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중도 좌파 성향의 신문 가디언은 한 프랑스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 ‘정치적 어젠다가 없다고 해서 폭동의 원인이 비정치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인 이유들은 폭동 후 보고되는 사회조사 자료에 나타난다. 영국의 한 시사 주간지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폭동 발생 지역의 유아 빈곤율(가구 수입이 영국 평균의 60% 이하인 가정의 아이들 비율)이 영국 평균치인 21%를 훨씬 웃도는 38~52%까지 나타났다. 경제적 원인 분석과 함께 현 정부의 긴축 재정을 위한 경찰 인력 감축과 지역 청소년 커뮤니티 센터의 감축도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영국 정부는 저성장 경제를 극복하기 위해 성장 중심의 긴축 재정을 펴고 있다. 49만명의 공공 부문 일자리 감축, 저소득층에 대한 보조금과 실업자 수당의 축소 등은 현 정부의 대표적인 경제 사회 정책이다. 

빠른 진압과 엄중한 처벌에는 한목소리

▲ 지난 8월12일 캐머런 영국 총리(등 돌린 이)가 반전 단체인 ‘Not In Our Name’ 소속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있다. ⓒAP연합

영국 사회의 다양한 논의와 함께 정치권은 한목소리로 폭력과 약탈에 대한 빠른 진압과 엄중한 처벌에 동의했다. 하지만 보수당과 자민당 연립정부와 야당인 노동당은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지난 8월15일 옥스퍼드의 한 행사에서 폭동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중도 우파 성향의 현 정부는 이번 사건이 복지 정책 감소나 경제 구조로 인한 저소득층 청년들의 문제가 아닌, 범죄 조직 자체와 범죄 조직 문화의 영향 확산이 문제의 핵심이라 주장했다. 캐머런 총리는 폭동 초기 경찰 대처가 미숙했다고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것과 함께 범죄 조직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또 경찰 치안 능력 강화와 도덕성, 사회에 대한 개인의 책임감 회복을 강조했다. 그는 범죄 조직과의 전쟁을 위해 런던경찰청장 후보로, 범죄율을 획기적으로 낮춘 미국 국적의 로스앤젤레스 전 경찰청장인 빌 브래턴을 기용하겠다고 말했다.

중도 좌파 성향의 제일 야당 노동당 대표인 에드 밀레반은 폭동 가담자에게 법적 책임을 묻고 처벌하는 데에는 동의했다. 노동당은 1985년 폭동 당시 급진적인 노동당 의원의 발언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린 경험이 있다. 그런 이유로 노동당 대표 에드 밀레반은 조심스러운 어법으로 근본적인 구조적 원인과 해결 방안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폭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회 조사위원회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청문회를 통해 가난한 지역의 폭동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범죄 조직에 가담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도 포괄하는 심도 있는 진단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노동당의 주장은 청문회에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빌려, 현 보수당 정부의 복지 축소 정책과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직접적인 어젠다로 삼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많은 영국 미디어는 8월 폭동을 진정시킨 것은 정치인의 화려한 말잔치도 강력한 경찰 병력도 아닌, 아들을 잃고도 진심 어린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던진 남아시아계 무슬림 이민자 아버지인 타리크 자한의 담대한 용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흑인, 아시안, 백인, 우리 모두가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서로가 죽여야 합니까? 나는 정부를 비난하지 않아요. 경찰도 비난하지 않아요. 아무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마 그(살인자)를 용서할 겁니다. 그(살인자)를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말해 영국인들을 울렸다. 어쩌면 분노와 폭력을 넘어 평화로운 영국의 미래를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도, 그 아들 잃은 아버지의 담대한 용서와 상생의 지혜에서부터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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