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 좋은 일 하다 매년 2천명 이상 다친다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11.08.2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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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 총 6천5백98명이 헌혈하는 도중에 중경상을 입거나 헌혈에 따른 후유증을 겪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시사저널>이 입수한 대한적십자사 내부 문건을 통해 처음 드러난 사실이다.

ⓒ연합뉴스

“헌혈의 위험성을 전혀 모르고 있다. 대한적십자사뿐 아니라 정부도 이런 사실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 방치하면 제2, 제3의 헌혈자 사망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기자가 최근 만난 적십자사 직원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해마다 2천명 이상이 헌혈 도중에 다치거나 후유증을 호소한다. 그럼에도 적십자사는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다. 헌혈자가 줄어들 수 있다는 이유로 대책을 마련하는 데에 소홀했다. 지난 6월 충북혈액원에서 발생한 헌혈자 사망 사고 역시 ‘예고된 인재’였다는 것이 이 직원의 설명이다. 그는 “헌혈하던 대학생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뇌사 상태에 빠졌다. 직원이 지침서에 나와 있는 프로세스대로 진행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사고였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 6천5백98명이 헌혈 도중 다치거나 후유증을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에 여섯 명꼴로 헌혈 부작용을 겪고 있는 셈이다. 헌혈 부위의 통증을 호소하거나 어지럼증을 보이는 것은 기본이다. 일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치아나 뼈가 부러지거나 얼굴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헌혈 부위의 신경 손상으로 깁스를 하거나 마비 증상을 보인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은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가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손숙미 의원(한나라당)에게 제출한 내부 문건을 통해 처음 드러났다. ‘헌혈 관련 증상 발생 현황 및 조치 내역’이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최근 3년간 발생한 헌혈 부작용 건수와 구체적 사례, 보상 금액까지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었다. <시사저널>이 이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헌혈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 건수는 해마다 늘어나는 흐름이다. 2008년 1천9백31건에서 2009년 2천2백60건, 2010년 2천4백7건으로 늘어났다. 이로 인해 헌혈자에게 지급한 보상금 지급액도 증가세로 돌아섰다. 2008년 2백60건(4천1백40여 만원)에서 2009년 2백94건(1천5백여 만원), 2010년 3백건(4천5백50여 만원)을 기록했다. 2008년 이전에 사고를 당했다가 추가로 보상금을 지급한 것도 27건(1천3백여 만원)에 달했다. 


종류별로 보면 헌혈 이후 어지럼증이나 현기증을 보이는 ‘혈관 미주신경 반응’이 가장 높았다. 전체 6천6백10명 중에서 3천1백70명(47.81%)이 관련 증상을 호소했다. 헌혈 부위 주변에 멍이 생기는 피하 출혈 역시 2천9백46건(44.98%)을 기록했다. 이 밖에도 구토나 재채기를 유발하는 구연산 반응이 74건(1.1%), 신경 손상이 42건(0.61%)을 나타냈다. 지역별로 보면 부산(1천6백38건), 서부혈액원(6백98건), 동부혈액원(5백49건), 대구·경북(4백49건), 인천(4백12건) 순이었다. 여자(49.4%)보다는 남자(50.6%)가 헌혈 후유증을 더 겪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고 계속되어도 책임지는 사람 없어”

이 가운데는 병원에 후송되어 치료를 받거나 심지어 수술을 받은 건수도 적지 않았다. 지난 3년간 3백93명이 헌혈 관련 증상으로 치료(입원 포함)를 받거나 수술을 받았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치아 등이 부러지는 ‘2차 충격’이 1백6명으로 가장 많았다. 실제로 지난 2008년 11월 부산에서는 헌혈하던 20대 남성이 쓰러지면서 턱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쓰러진 위치가 머리 쪽이었다면 대형 사고로 번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 남성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봉합 수술과 함께 골절 치료를 받았다. 치료비만 5백만원을 상회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선 2008년 5월 서울의 한 고교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헌혈한 학생이 쓰러지면서 모서리에 부딪혀 눈썹 부위가 10cm가량 찢어진 것이다. 부딪힌 부위가 조금만 아래였다면 실명까지도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문건에 있는 나머지 사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술, 얼굴, 이마, 눈, 턱, 코, 광대뼈 등 부위만 조금 다를 뿐이었다. 서울의 대학로센터에서 헌혈하던 한 대학생의 경우 신경이 손상되면서 장기간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손숙미 의원은 “대형 사고로 번질 수 있는 헌혈 사고들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그럼에도 적십자 등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라고 지적했다. 적십자 내부에서조차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들려올 정도이다. 적십자의 한 관계자는 “해마다 계속되는 헌혈 사고에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원인 파악은 물론이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아무도 징계받은 사례가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적십자측은 “비용이나 인력 운영 면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라는 입장이다. 적십자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환자들과 원만하게 합의했다. 헌혈의 집이 전국적으로 1백29개에 달하다 보니 관리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토로했다. 전문가들도 신중한 대응을 주문했다. 전동석 계명대 동산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즉흥적으로 대응할 경우 혈액 수가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된다는 점에서 신중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헌혈자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뜻을 같이했다. 우선적으로 적십자의 폐쇄적인 조직 문화와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꼽힌다. 아무리 효과가 좋은 의약품도 부작용이 생기면 시판할 수 없다. 헌혈 역시 마찬가지다. 혈액 자체가 헌혈자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만큼 아무리 안전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책 인사 이후 집단 사표 움직임도

▲ 대한적십자사에 직원들이 출근하는 모습. ⓒ시사저널 윤성호

최근 헌혈 관련 단체나 학회로부터 적십자의 개혁을 요구하는 성명서가 잇달아 발표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강주성 건강세상네트워크 전 대표는 “헌혈자의 안전이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 적십자가 수익 사업에 몰두하면서 헌혈자들의 안전을 등한시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헌혈 관련 사고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비슷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직원 개개인이 헌혈 사고에 둔감해지면서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열린 혈액관리위원회에서도 이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위원회에 참석했다는 한 위원은 “내부적으로 사망 원인에 대해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음에도 결과가 올라오지 않았다. 해당 부처의 공무원이 참석한 위원에게 면박을 받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라고 귀띔했다.

문제가 확산되자 적십자는 사태 수습에 나섰다. 지난 7월1일자로 박규은 혈액관리본부장과 민혁기 혈액안전국장, 이종근 충북혈액원장을 전보 조치했다. 그러자 적십자 내부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박규은 본부장을 시작으로 줄사표가 이어지고 있다. 적십자측은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한 인사인 만큼 문제는 없다”라고 강조했다. 헌혈 후 2차 충격을 줄이기 위해 쿠션 바닥을 깔거나 의자에 등받이를 설치하는 방안도 준비하고 있다. 김석호 혈액사업본부 기획조정팀장은 “일부 혈액원의 경우 이미 설치를 마무리했다. 철저한 후속 조치를 통해 사고를 줄이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직원 교육 강좌와 안전 사고 방지를 위한 모니터링 시스템도 현재 준비 중이다. 그는 “앞으로는 의무관리실장 주관으로 채혈 현장의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충실히 이행하는지 체크할 예정이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우려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적십자의 한 관계자는 “후유증을 나타내는 환자의 경우 분명히 전조 현상을 보이기 마련이다. 이를 지켜보면서 대응할 수 있는 인력을 마련하는 것이 쿠션 배치보다 더 시급하다”라고 지적했다. 최근 문책성 인사로 집단 사표 움직임을 보이는 적십자의 상황에 대해서도 “집단 이기주의이다”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헌혈 관련 사고가 터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내부적으로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침묵하다가 선배들이 나가니까 반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동석 계명대 교수는 단체 헌혈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그는 “헌혈 후 10분 정도는 쉬어야 전조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단체 헌혈의 경우 이런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헌혈자 스스로도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일부 젊은 층이 혈기만 믿고 헌혈의 부작용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련의 사고에서는 본인 과실도 일부 있다. 헌혈자 스스로가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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