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독립의 혼’, 연해주에 숨 쉬다
  • 우수리스크·김세원│편집위원 ()
  • 승인 2011.08.23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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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취재 /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의병 ‘동의회’ 총재 최재형의 자취 찾아내

▲ 최재형이 1920년 4월5일 일본군에게 체포될 때까지 살았던 러시아 우수리스크 시 볼로다르스코보 거리에 있는 집. ⓒ김세원 제공

보훈교육연구원(원장 오일환)의 제8기 2차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의 일원으로 8월2일부터 7일까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의 간도 지역에 다녀왔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우수리스크-크라스키노-훈춘(琿春)-투멘(圖們)-용정(龍井)-옌지(延吉)-백두산-무단장(牧丹江)-하얼빈까지 이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5박6일의 여행은 한 세기를 뛰어넘어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한반도가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20세기 초를 오가는 시간 여행이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과의 가츠라태프트밀약, 영·일 동맹, 러시아와의 포츠머스 조약을 차례로 맺으며 한반도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907년의 군대 해산에 이어 광무황제를 강제 폐위했다. 친일파와 수구파들이 득세하는 국내에서는 더 이상 애국지사들이 숨 쉴 공간이 없었다. 수많은 의병과 독립지사가 후일을 기약하며 해외 망명길에 나섰다. 마침 연해주와 간도에는 1860년대부터 함경도의 영세 농민들이 대거 이주해 척박한 땅을 개척해 한인 사회가 형성되고 있었다. 애국투사들이 집결하면서, 국내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1천년 전 발해의 영토였던 연해주와 간도 일대는 해외 항일운동의 핵심 배후 기지로 떠올랐다.

이번 탐방을 통해 필자는 연해주와 간도 곳곳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던 숱한 ‘애국투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가 되었거나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한 이들도 있었기에 그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1920~30년대는 독립에 대한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던 암흑기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길지 않은 인생, 시류(時流)를 좇아 편히 살다 가라’는 주변의 회유를 물리치고 일신의 영달과 가족의 영화는 뒤로 한 채, 오로지 국권과 자유를 되찾는 데 목숨을 바쳤다. 그들 가운데 자수성가한 사업가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최재형(1860?1920년)을 발견한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최재형은 1860년 함경북도 경원군의 노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머슴,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에 흉년이 들자 가족이 모두 기근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의 가족을 포함해 함경도 농민들이 70여 년 동안 터를 이루고 살았던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 노우키예프스크의 지신허(地新墟)에는 집터, 연자방아 맷돌, 항아리 파편 등 흔적이 남아 있다. 2년 뒤인 1871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러시아 학교에 입학하지만 형수의 구박을 못 이겨 가출한다. 그는 포시예트 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를 왕래하는 러시아 상선의 선원들에게 발견되어 소년 선원으로 고용된다. 그를 귀엽게 여긴 선장은 그를 양아들로 삼아 자기 집에 살게 하면서 러시아어와 수학, 음악 등을 가르치고 ‘표트르 세메노비츠’라는 러시아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원양 어선 선원으로 6년간 세계 각지를 항해하면서 근대 문물을 익힌 뒤 1877년에 선원 생활을 접고 17세에 무역상회 직원으로 취직해 무역업에 종사한다. 

다양한 사업 펼쳐…기업가의 롤모델 될 만

▲ 생전의 최재형. ⓒ박환 수원대교수 제공

그는 상점 경영, 농장 경영, 통역관, 건설업, 육류 판매업, 군수품 운수업 등 온갖 일을 해서 돈을 모았다. 러일전쟁을 전후해서는 러시아 군대에 식량과 물자를 납품하는 군납을 해 큰돈을 벌었다. 러시아인들의 신망을 얻은 그는 두 차례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고 다섯 개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1890년부터 두만강을 건너오는 한인들의 숫자가 증가하자 연해주에 한인 촌락들이 생겨났다. 러시아 정부는 1895년 크라스키노 안치헤 마을을 중심으로 첫 한인 자치 기관을 만들고 최재형을 책임자(도헌)로 임명했다. 외항 선원으로 전세계를 누비며 근대 문명을 습득했던 그는 동포들의 교육 지원에 총력을 기울인다. 사재를 털어 크라스키노에 고등소학교(6년제)를 설립하고 도헌의 연봉 3천 루블을 은행에 예치해 그 이자로 해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상트페테르스부르크,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등으로 유학을 보냈다. 여기에는 한명세, 최고려, 김미하일로비치 등 내로라하는 공산주의 운동가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 이름과 국적을 가지고 살아온 그가 항일투사로 본격 변신하게 된 것은 1905년 을사늑약 뒤 박영효와 초대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 등 연해주로 건너간 독립투사들을 만나면서부터다. 국내에서 의병운동이 활발히 펼쳐지자 그는 1908년 간도관리사 이범윤, 헤이그 특사 이위종, 안중근 등과 함께 러시아 내 항일 의병 세력을 결집한 ‘동의회’를 조직한다. 동의회 총재로서 그는 안중근 등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주도해 1908년 7월 두만강 연안 홍의동을 공격해 100여 명의 일본인을 사상하고 함경북도 회령 근처에 주둔한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크게 격퇴했다. 장석흥 국민대 교수(한국사)는 “최재형은 5백명에 이르는 병사들의 이름과 출신 등을 모두 꿰고 있을 정도로 대원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지도자였다”라고 말했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언론 활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러시아 한인 신문으로 1908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되었다가 3개월도 채 안 되어 재정 문제로 폐간 위기에 몰린 <대동공보>를 재발간했다.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절규했다. 안창호, 이종호, 김병학 등과 더불어 또 다른 민족 언론 <대양보>를 발간해 사장을 역임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자리 잡았던 재러 조선인 세력의 총 집결체인 권업회(權業會)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표면적인 목적은 재러 한인들의 일자리 권장과 교육 보급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기관이었다. 1911년 창설 때 3백명이던 회원은 3년여 만에 8천5백여 명에 달했다.

그의 재산은 모두 연해주 한인 민족운동과 의병 활동을 통한 조국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용되었다. 러시아로 망명한 항일 인사들의 생계와 활동비를 책임지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1919년 설립된 상해 임시정부가 연해주에 있던 그를 임정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할 정도로 그의 자금 조달력과 애국심은 인정을 받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전로한족중앙총회의 의원,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 등을 맡아 한인 빨치산 부대 조직에 비밀리에 무기를 공급하는 등 진보적 민족주의 쪽으로 선회한다. 최재형은 1920년 일제가 연해주 지역의 러시아 혁명 세력과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체포·방화·학살 만행을 자행한 ‘4월 참변’을 일으켰을 당시 일본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4월5일 총살되었다. 이후 러시아 땅에 남은 그의 자녀 11남매는 온갖 고난을 겪다 1930년대 다른 한인들과 함께 낯선 중앙아시아 땅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는 당시 ‘독립신문’에 실린 추모사에서 ‘선생의 이름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모르는 자가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국내에서는 철저히 잊힌 인물이었다. 1990년 한·러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의 활동 무대였던 연해주가 우리와는 왕래가 없던 옛 소련 땅이고, 후손들이 모두 소련 땅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우수리스크 시 볼로다르스코보 거리에 있는 러시아식 이층 가옥 앞에 멈춰 섰다. 최재형이 1920년 4월5일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기 직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진정한 기업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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