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순수한 기부’ 봇물 터지려나
  • 김세희 기자 (luxmea@sisapress.com)
  • 승인 2011.09.0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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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사재 5천억원 내놓아…다른 대기업 총수들의 사회 환원 계획도 잇따라

▲ 지난 8월31일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중구 남대문로 대한상의에서 30대 대기업 총수들과 오찬 간담회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이 최근 사재 5천억원을 해비치재단에 기부했다. 그동안 기업 총수들의 기부는 대부분 ‘쫓기는’ 혹은 ‘빼앗기는’ 듯한 뉘앙스가 강했다. ‘사재를 헌납하겠다’라는 발언은 대부분 위기 돌파용으로 사용되었고, 이에 따라 사회적인 지탄을 일시적으로 무마하기 위한 ‘면피용 기부’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의 거액 기부를 기점으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 기업 총수들의 사회 환원 계획이 알려지면서 ‘재벌의 기부’가 재조명되고 있다.

이번 정몽구 회장의 사재 출연은 액수가 클 뿐만 아니라 내세우는 목적도 명확했다. 정회장은 “저소득층 대학생들이 감당하기 힘든 대출을 받아야만 하는 사연에 가슴이 아프다.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미래 인재를 적극 돕기 위한 것이다”라며 기부하는 목적을 설명했다.

‘정치적 의도’ 피하려 애쓰는 분위기

정회장이 기부한 5천억원은 지난 1971년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가 타계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공익 재단에 기부한 이래 최대 금액이다. 지난 2008년, 2009년 그리고 올해까지 정회장의 기부는 꾸준히 이어져왔다. 총 액수만 5천9백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그동안 정회장의 기부에 쏠리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지난 2006년 비자금 문제로 법정을 오가며 8천4백억원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지만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쫓기는 기부’마저도 이행하지 않는다는 날 선 비난이 정회장을 향한 것이다. 현대기아자동차 관계자는 “아킬레스건이다. 그동안 약속한 것을 왜 안 하느냐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정회장이 이번에 여러 가지 생각 끝에 기부를 하시게 된 것 같다. 이번에는 정말 순수하게,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돕고 싶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니 결코 다른 의도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동안 해비치재단은 정회장이 출연한 1천5백억원 정도를 가지고 운영해왔다. 이번에 5천억원이라는 거금이 기부되었으니 좀 더 다양한 사업을 운영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의 최대 주주인 정몽준 의원도 정몽구 회장에 앞서 기부 행렬에 동참했다. 정의원은 최근 현금 3백억원과 주식 1천7백억원 등 총 2천억원을 출연해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했다. 정치인이다 보니 ‘정치적인 의도’에 대한 의심도 받았다. 그러나 지난 2008년에도 배당 소득 가운데 40%인 2백억원을 공익 법인에 기부하는 등 정의원의 개인 기부는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

‘순수한 기부’에 자신 있는 총수는 따로 있다. 허창수 GS 회장이다. 허창수 회장은 지난 2006년 12월 사재를 출연해 남촌재단을 설립했다. 저소득 소외 계층의 자립 기반 조성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재단 설립 당시 해마다 지속적으로 사재를 출연해 재단을 5백억원 이상의 규모로 키워갈 예정이라고 약속한 바에 따라, 설립 후 해마다 일정 규모의 주식을 기부하고 있다. 허회장이 2006년부터 올해까지 남촌재단에 출연한 GS건설 주식만 해도 26만3천7백60주, 금액으로 환산하면 총 2백50억원에 달한다. GS 관계자는 “허회장은 순수하게 개인 기부를 통해 남촌재단을 만들었다. 정몽구 회장과 비교하면 액수는 크지 않지만 6년여 가까이 해마다 지속적으로 개인 기부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기업으로 범위를 확대시켜보면 그동안 국내 기업들은 기부 혹은 사회 환원에 인색하지 않았다. 지난해 국내 10대 그룹이 기부한 금액은 8천3백억원에 이른다. 외국의 사례에 비해 적지 않은 규모이다. 그러나 총수 개인이 기부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와 관련해 한 재계 관계자는 “기업 명의의 기부는 솔직히 기부 주체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기업가의 기부인지 근로자들과 함께하는 기부인지 불명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은 곧 총수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기업에서 나온 이익금을 가지고 기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총수 개인의 이미지 제고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라고 꼬집었다.

‘순수한 기부’에 자신있는 총수는 허창수 GS 회장

▲ 2007년 10월22일 현대차 계동 사옥에서 열린 현대·기아차 그룹의 ‘해비치 사회공헌위원회’ 현판식. ⓒ뉴스뱅크

취재 결과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이후로 시기를 제한했을 때 현대기아자동차, 현대중공업, GS 등을 제외하고는 총수 개인이 기부한 사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룹 관계자들은 공통적으로 “회장 본인이 기부 활동을 한 것은 개인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일일이 파악하고 있지 않다”라고 답했다. 특히 SK 관계자는 “공표되지 않은 부분은 굉장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예를 들어 회장이 어떤 단체에 기부할 수도 있고 고아원에 할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은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일일이 조사하기가) 난감하다”라고 말했다. 최근 최태원 SK 회장과 관련해 나오는 사회적 기업 전환과 관련해서도 SK 관계자는 “사회적 기업은 그룹 차원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과는 별개이다”라고 말했다.

국내 최대 그룹인 삼성 이건희 회장의 경우는 어떨까. 이회장은 2008년 이후 개인적인 기부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난 2006년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을 통해 8천억원을 사회에 헌납했지만 이것은 이건희 회장과 회장 일가, 계열사가 공동 출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건희 회장의 기부 계획에 대한 이야기들이 공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08년 삼성 특검 당시 실명으로 전환한 차명 재산 중 세금, 벌금, 과태료 등을 뺀 나머지 금액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던 그 약속을 이제 지키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정몽구 회장이 거액을 기부하고 나니 삼성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회장이 이전에 말씀하신 부분이 있어 우리도 고민하고 있다. 사실 재단을 만들어서 현금이나 주식을 기부하는 것이 가장 편리한 방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대통령을 만난다고 깜짝 발표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 깊숙하고 넓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업가들의 진정한 기부는 회사 돈을 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동안 회사의 수익금으로 생색내듯 기부를 해온 일부 총수들의 부적절한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의 ‘통 큰’ 기부를 계기로 재벌 총수들의 기부 물꼬가 터질 것이라는 기대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기부 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한화 관계자는 “기부를 하는 것도 좋지만 현물이나 금액으로만 환산된다면 우려스럽다. 봉사 활동이나 사회 공헌 활동들도 함께 조명이 되면 좋을 것 같다”라며 다양한 기부 형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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