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교 20년…‘우정’은 살아 있었다
  • 타이페이·김세원│편집위원 ()
  • 승인 2011.10.0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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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방문한 한국 민간 경제문화사절단, 양국 교류 확대 필요성 절감…무역·관광 등에 기회 많아

올해로 중국의 신해혁명이 100주년을 맞았다. 100년 전인 1911년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한 민족 자산가들은 혁명을 일으켜 청나라 왕정을 종식시키고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이념으로 한 아시아 최초의 입헌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수립했다. 우창(武昌)에서 최초로 봉기가 일어난 10월10일을 중화민국(타이완)은 건국 기념일인 ‘쌍십절’(雙十節)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신해혁명 기념일’로 기념한다. 아편전쟁 이후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중국 사회에서 태평천국운동, 양무운동(洋務運動),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등 여러 근대화 운동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성공한 신해혁명은 봉건의 단절과 근대 중국으로의 전환을 알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필자는 쌍십절을 앞두고 중화민국 건국 100주년 기념 민간 경제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지난 9월21일부터 25일까지 타이완을 방문했다. 지난 9월23일 오후 마잉주(馬英九) 총통의 오른팔 격인 후웨이전(胡爲眞) 국가안전회의 비서장(총리급)도 타이베이 도심의 총통부 2층 접견실에서 만났다. 양안 관계와 외교 안보를 총괄하는 국가안전회의는 타이완의 핵심 권력 기관이다.

▲ 지난 9월21일부터 25일까지 타이완을 방문한 한국의 민간 경제문화사절단이 타이완 입법원에 초대받아 타이완 의원들과 환담을 나눴다. ⓒ김세원 제공

“경쟁 관계이기보다 보완할 점 더 많은 관계”

후 비서장은 작고한 부친과 한국의 인연을 소개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선친이) 광복군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오죽하면 중국 군인들이 ‘광복군의 처우가 우리보다 두 배나 좋다’라고 부러워했답니다.” 그의 부친은 장제스(蔣介石) 총통 휘하에서 4성 장군을 지낸 후쭝난(胡宗南)이다.

사절단장인 백용기 서울·타이베이클럽 수석부회장(거붕그룹 회장)이 옆에서 “후 장군이 1932년 4월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 전승 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폭사시킨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성공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라고 귀띔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도왔던 공로로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8월15일 후 비서장의 부친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1992년 8월24일 단교 이후 타이완인에게 수여한 첫 훈장이다. 그는 코팅을 해서 12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해온 서훈의 사본을 일행에게 보여주었다. 타이베이 사범대 총장을 지낸 후 비서장의 모친도 한국과 인연이 깊다. 재직 중 한국의 많은 대학과 자매결연했다. 후 비서장은 “한국과 타이완은 경쟁 관계이기보다 보완할 점이 더 많다”라며 문화·학술·예술 분야의 교류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동석했던 피엔중광(田中光) 타이완 외교부 동아시아태평양국장은 “몇 해 전 남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에 대사로 근무할 때 투발루 대통령 부인이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즐겨 시청할 정도로 한류가 전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라며 자신의 부인 또한 ‘소녀시대’의 팬이라고 소개했다.

타이완은 한류가 세계에서 가장 유행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타이완 주요 TV·신문·잡지들은 너무나 많이 한류 스타들에 대해 보도해, 한자만 아니라면 한국으로 착각될 정도이다. TV 방송사들은 <대장금> <꽃보다 남자> 등 여러 편의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으며 어느 쇼핑몰에 가나 한류 스타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양안 관계 해빙 이후 타이완 경제 급성장

▲ 후웨이전 국가안전회의 비서장현재 한국은 타이완의 5대 무역 상대국이고, 타이완은 한국의 9대 무역 파트너이다. 후웨이전 타이완 국가안전회의 비서장은 많은 분야에서 교류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세원 제공

사실 한국과 중화민국(타이완)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혈맹(血盟)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투쟁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협력하고, 건국 이후에는 공산주의와의 투쟁 전선에 나란히 섰다. 역사적으로도 한국과 타이완은 비슷한 궤적을 걸어왔다. 타이완은 과거 50년간 일제 식민 시절을 거쳤으며, 장제스(蔣介石) 및 장징궈(蔣經國) 총통 치하에서 체제 유지를 위한 독재를 겪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민주화 운동을 경험했고‘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반면 지역 갈등 현상도 두드러지고 최근 보수 및 진보 세력 간에 마찰이 심각한 것도 서로 비슷하다. 심지어는 회기 중에 벌어지는 여야 의원들의 치열한 몸싸움 때문에 타이완 입법원 회의장에는 명패를 비롯한 모든 집기를 못을 박아 고정시켜 놓았을 정도이다. 분단으로 인해 서해 해상에서 한국이 북한과 마찰을 빚는 것처럼 타이완 해협에서도 양안 분단 이래 수시로 중국과 군사적 긴장 수위가 고조되곤 해왔다.

건국 100년을 맞은 2천3백만 타이완인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중화민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 설정이 고민거리이다. 1971년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유엔에서 축출되었고, 현재 세계 주요국과 외교 관계를 단절당한 채 외교적 고립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타이완은 아프리카와 중남미 23개국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며 과거 국교가 있었던 1백30여 개국에는 대표부를 두고 있다. 중국 정부가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므로 중국과 국교를 맺으려면 타이완과 단교하는 것은 필수 전제 조건이었다.

그러나 2008년 양안 관계 해빙을 주요 기치로 내건 국민당의 마잉주 총통이 집권하면서 타이완 경제는 놀라운 도약을 보여주고 있다. 정경 분리라는 실용적 접근으로 중국과 체결한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자유무역협정의 일종) 덕분에 타이완 경제는 지난해 10.8%의 성장률로 2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출도 1979년 이래 가장 많은 34.7%가 늘어 무역 총액 5천억 달러를 돌파했다. 양안 무역 규모는 1천5백억 달러로 불어났고 최근 3년간 차관급 60여 회, 성장급 2백여 회의 양안 인적 교류도 이루어졌다. 타이완의 공식 외환보유액은 3천5백50억 달러로 한국을 앞서는 세계 4위 수준이다.

19년 전 한국은 ‘새 친구(중국)’를 사귀기 위해 ‘옛 친구(타이완)’를 버렸다. 1992년 8월24일 한·중 수교 발표와 동시에 ‘72시간 내에 서울 명동 대사관 및 부산 영사관의 국기와 현판을 철거하라’라고 매몰차게 통보했다. 서울-타이페이 간 여객기 운항마저 금지시켰다. 당시 우리 정부는 한·중 수교 일주일 전에 타이완에 특사를 보내 이를 통보했다지만, 타이완 사람들이 느끼는 비탄과 배신감은 어떤 나라보다도 컸다.

하지만 그때 의리를 지킨 한국인도 있었다. 백용기 단장은 당시 주한 타이완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던 타이완 해군 대령과 친분이 깊었다. 그는 타이완 대사관이 철수하기 직전 대사관 직원 수십 명을 저녁 식사에 초청해 새벽까지 통음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20년째 정부가 내팽개친 타이완과의 우의를 다지고 있다. 2002년 한·타이완 간 민간 교류 활성화를 목적으로 서울·타이베이클럽을 창립해 매년 두세 차례 민간 교류단을 이끌고 타이완을 방문했다. 또 타이완 정·재계 인사들이 방한하면 언제든지 달려가 이들과 변함없는 우정을 쌓아왔다. 중국문화대학은 9월22일 그에게 한국인으로는 10번째로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를 수여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현재 한국은 타이완의 5대 무역 상대국이고, 타이완은 한국의 9대 무역 파트너이다. 양국 간 관광객 교류는 60만명을 돌파했다. “양안 관계 개선은 우리에게 위협이 아니라 기회이다. 중국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타이완을 통해 중국에 진출하는 것이 중국 비즈니스에서 실패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다”라는 백회장의 말은 내년 8월로 단교 20년을 맞는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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