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 브런치족’ 예술영화 떠받치다
  •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1.11.1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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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생활에 목마른 주부 관객들, 전용관 찾아 ‘북적북적’

▲ ⓒ티캐스트 제공

6만8천1백69명. 7월 개봉한 캐나다 영화 <그을린 사랑>이 모은 관객 수이다. 적어도 100만명은 보아야 적자를 면하는 여느 상업영화 입장에서는 보잘 것 없는 흥행 수치이다. 하지만 수입사는 입이 벌어졌고, 다른 영화사의 시샘을 불러왔다. 5만 관객이면 상업영화 1천만명에 해당한다는 예술영화 시장에서 일구어낸, 놀라운 흥행 성적이기 때문이다. <그을린 사랑>만 부러움을 사지 않았다. 6월 개봉한 덴마크 영화 <인 어 베러 월드>는 4만8천7백50명을 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그을린 사랑>이 ‘흥행 태풍’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올해 최고 흥행 예술영화 자리를 예약했다고 평가받은 성적이었다.

1만명이 흥행의 바로미터로 여겨지고, 3만명 관객 영화는 1년에 한 편 나오기도 힘들다는 예술영화 시장에서 ‘초대형 흥행작’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문화 생활에 목마른 주부 관객이 예술영화 전용관에 몰리면서 예술영화 전성기가 다시 열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월부터 예술영화 시장은 심상치 않았다. 이탈리아 영화 <아임 엠 러브>가 예상을 넘어 3만4천3백79명의 관객을 모으며 바람을 일으켰다. 일본 영화 <고백>(4만3천3백74명)이 흥행 바통을 이어받더니 <음모자>(3만4천7백92명)와 <북촌방향>(4만4천7백56명) 등이 연이어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올해 개봉해 1만명 관객 고지를 넘어선 작품도 여느 해보다 두드러지게 늘어났다. <세상의 모든 계절>(1만7천4백23명), <사랑을 카피하다>(1만7천4백80명), <헤어드레서>(1만3천6백76명), <일루셔니스트>(1만5천6백51명), <샤넬과 스트라빈스키>(1만2천2백77명), <윈터스 본>(1만1천8백37명) 등이 흥행 대열을 형성했다.

예술영화 흥행 바람을 일으킨 데에는 중년 관객층, 특히 40대 여성 관객이 힘의 원천으로 꼽히고 있다. 멀티플렉스체인 CGV 자료에 따르면 CGV의 예술영화 전용관인 무비꼴라쥬의 40대 관객 비율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다. 2006년 40대 관객은 10.96%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22.69%에 달했다. 40대 여성 관객의 증가세는 더욱 놀랍다. 2006년(9.31%)에서 지난해 22.01%로 늘면서 13%포인트의 증가를 보였다.

“조조 관객이 다른 시간대 관객 총합보다 많은 경우도”

여느 극장보다 높은 예술영화 전용관의 첫 상영(조조 상영) 좌석 점유율도 주부 관객층의 급증을 간접 증명하고 있다. 강북의 한 예술영화 전용관의 조조 좌석 점유율은 20~25%로 일반 상영관의 1년 평균 좌석 점유율(25%)에 근접해 있다. 조조 상영은 하루 중 관객이 가장 적어 대부분 극장이 할인 혜택을 주는 최악의 시간대. 반면 예술영화 전용관에서는 관객이 가장 붐비는 황금 시간대로 여겨진다. 주부들이 브런치와 영화 관람을 묶어 즐기는 새로운 관람 문화가 생기면서 비롯된 현상이다. 강북의 한 예술영화 전용관 관계자는 “조조 상영 영화 관객이 다른 시간대 관객의 총합보다 많은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2007년 개관한 압구정CGV 무비꼴라쥬관의 경우 주부 관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강남을 대표하는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떠올랐다. CGV 관계자는 “인근에 있는 백화점에서 문화강좌를 듣고 극장에서 영화를 본 뒤 카페에서 차 한잔 하는 관람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백화점 인근 극장을 중심으로 예술영화 바람이 불었던 일본의 경우와 유사한 상황이 서울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영화가 릴레이 흥행을 하면서 덩치를 키워 개봉하는 예술영화도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트리 오브 라이프>는 예술영화로서는 드물게 전국 80개 스크린에서 대대적으로 개봉했다. 예술영화 시장에서는 20개 안팎에서 개봉해도 ‘판을 크게 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와 숀 펜이 출연한다는 점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최근에 분 예술영화 바람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이다. 9일까지 4만3천6백91명을 동원하며 선전하고 있지만 마케팅 비용 등이 많이 들어 손익분기점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난해 칸 영화제 최우수 남자배우상을 받은 <비우티풀>(1만3천8백21명)도 여느 예술영화보다 손익분기점(2만명)이 높다. 이 영화의 수입사 관계자는 “1만명이 성공 기준이 되는 예술영화 시장의 관객층을 넓히고 싶어 마케팅비 등을 많이 사용했다. 목표 달성이 쉽지 않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푸치니의 여인>은 20세기 초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의 숨겨진 사랑을 담은 영화이다.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 푸치니의 오페라는 대단히 연극적이며, 여주인공의 캐릭터와 심리 묘사가 핵심을 이룬다. 푸치니는 작품을 쓸 때마다 새로운 여성과 사랑에 빠졌고, 그 여성을 모델로 캐릭터를 구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선술집 여주인과 도둑 청년과의 사랑을 그린 오페라 <서부의 처녀>는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지 불분명하다고 한다. <서부의 처녀>가 작곡되던 1909년 푸치니 집 하녀가 자살했다. 푸치니와의 불륜을 의심받아 쫓겨난 하녀는 불륜의 소문으로 억울해하다가 자살했는데, 부검 결과 처녀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서부의 처녀>의 여주인공과 전혀 닮지 않아서 다른 연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푸치니의 여인>의 감독은 푸치니가 살았던 이탈리아의 ‘토레 델 라고’ 지방에서 6년간 수소문해 당시 푸치니가 만났던 여성의 유품과 유족을 찾아낸다. <푸치니의 여인>은 감독이 발굴한 푸치니의 은밀한 사랑을 재현한 영화이다. 영화는 첫 장면의 희미한 빛과 어둠부터 마지막 그림자 계단 장면까지 미학적인 촬영과 조명 기법으로 가득하다. 부감 쇼트를 비롯한 다양한 앵글과 감각적인 미장센도 돋보인다. 해마다 푸치니를 기리는 오페라 축제가 열리는 ‘토레 델 라고’ 지방의 그림 같은 풍광과 은은한 피아노 선율도 아름답다. 푸치니와 오페라를 사랑하는 관객에게는 당연히 매혹적인 영화이다.

그러나 푸치니도 오페라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관객에게는 어떨까? 어차피 한량이었다는 푸치니에게 숨겨진 여인이 하나 더 있다 한들 그것이 무슨 대수이며, 대사도 거의 없고 오페라 장면 하나 서비스해주지 않는 잔잔함은 몽롱함을 부르는 가운데, 주인 모녀의 모함을 받아 죽은 하녀의 억울함만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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