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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이 키운 신흥 부자들, 돌아서서 푸틴을 물다

러시아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 숨은 ‘애증의 아이러니’

조홍래│편집위원 ㅣ 승인 2011.12.18(Sun) 20: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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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처음 보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부정 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90여 개 도시의 거리를 메운 시위대의 얼굴에는 치를 떠는 분노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환호와 웃음이 가득하다. 군중은 주로 젊은이들이고, 대부분 친구와 연인 혹은 가족들이다. 각목이나 파이프를 들지도 않았다. 이들은 대신 하얀 풍선과 꽃을 손에 들고 머리에는 흰 리본을 달았다. 모스크바 강이 감돌아 흐르는 광장은 시위인지 축제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형형색색의 인파로 가득 찼다. 대다수 군중은 시위에 처음 참가한 사람들이다. 은행원과 중견 기업인, 컴퓨터 프로그래머, 엔지니어, 변호사,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대부분 블라디미르 푸틴의 리더십 덕분에 성공한 신흥 부자들이다. 12월10일 토요일 소련 붕괴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에 참가한 수만 명의 군중이 한목소리로 외친 구호는 ‘푸틴 없는 러시아’였다. 시위를 촉발한 것은 12월4일 실시된 하원(두마) 의원 선거에서 푸틴이 이끄는 통합러시아당이 저지른 뻔뻔한 부정이었다. 푸틴 당은 이 선거에서 가까스로 50%를 얻어 5백석의 하원에서 겨우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은 집권당의 승리가 처음부터 관권에 의해 조작된 부정·불법 선거라고 생각한다. 오바마 행정부마저 부정 선거 규탄에 합류하자 평소 고분고분하던 시민들이 평생 처음으로 거리로 몰려나와 공정한 선거와 푸틴의 퇴진을 요구했다. 진눈깨비가 비로 변해 질척거리는 모스크바의 겨울에 마치 ‘아랍의 봄’이 온 듯했다. 시청에 근무하는 한 공무원은 자신의 친구 70명 중 겨우 두 명이 푸틴 당에 투표했는데 어찌해서 여당이 승리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전용차를 모는 운전사의 딸도 시위에 참가했다. 러시아의 시위는 여러 면에서 유별나고 이색적이다.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은 반체제 인사나 사회 불만 세력이 아니다. 1억4천만명인 러시아 인구의 3분의 1을 구성하는 중산층 젊은이들이다.

   
지난 12월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부정 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는 시위자들. ⓒ 연합뉴스

전문직 종사자 등 중산층 젊은이들 대거 참여

이들은 세계 도처를 여행하면서 국제적인 매너도 익혔다. 고급 선글라스를 끼고 옷도 잘 입었다. 얼핏 보면 재벌 2세들처럼 보인다. 트위터, 페이스북, 아이패드 등을 통해 세상을 알고 소통하는 점에서는 서방 도시의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일부는 부정 선거를 입증하는 자료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모스크바의 마천루와 석유가 가져다 준 부의 혜택을 가장 많이 입은 도시의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시위 참가자들은 공산당의 상징인 붉은색 대신 흰색 리본을 행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흰색 리본은 새로운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다. 헤어디자이너인 한 여성 시위자는, 시위의 목적은 혁명이나 폭력이 아니라 푸틴이 만든 썩은 정치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에 근무하는 한 청년은 멋진 주말을 보낼 계획이었는데 시위나 하고 있으니 속이 상한다고 말했다. 군중들에게서는 격렬한 반정부 감정이나 분노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존심’을 구겼다는 것이 시위의 직접적인 구실이었다. 왜 부정 선거를 해 세계의 비웃음을 사고 개인의 주말 일정을 망가뜨리느냐는 짜증이 얼굴에 묻어났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의 시위를 ‘모순(paradox)’이라고 정의했다.

이것이 사회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는 것이다. 푸틴 총리의 치세가 많은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주었고 바로 그 때문에 푸틴에게 불만이 많다는 역설적인 얘기이다. 가장 대표적인 불만 사유는 공무원들의 부패이다. 부패는 중산층의 부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부패가 싫다는 것이다. 마치 칠레의 피노체트가 중산층의 배를 불린 결과 그 중산층에 의해 권력을 상실한 경우와 비슷하다. 피노체트나 푸틴은 인간이 배가 부르면 자유를 원한다는 진실을 망각한 셈이다. 배고픈 인간에게는 빵을 주면 되지만 풍요를 맛본 인간의 욕구는 빵으로 달랠 수 없다. 결국 러시아의 문제는 빵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와 정치의 문제이다. 칠레의 거리로 나온 광부들은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풍요한 삶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누가 이들을 보고 시위에 나오라고 독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푸틴이 중산층을 망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이들은 20년 전 옛 소련에 항거했던 의식 분자들도 아니다.

혁명이나 정변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어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시위의 촉매제가 되었던 페이스북을 통해 부정 선거 문제를 조사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시위자들의 슬로건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사태를 진정시키기는커녕 악화시켰다. 그의 말에서 앞뒤가 맞지 않듯이 시위대의 목표 또한 다소 애매하다. 이들은 시위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냥 앉아서 볼 수만은 없어 거리로 나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푸틴을 상대로 한 게임에 승산이 없는 줄 알면서도 그냥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당혹스런 사람은 푸틴이다. 그는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대통령을 두 번 역임했고 3번째 연임을 금지한 헌법 조항 때문에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총리를 맡았다. 그가 내년 3월 대통령에 출마해 당선되면 6년 임기를 재임하고 재출마해 다시 6년을 추가하면 총 24년간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다. 지난 10년간 러시아인들의 임금은 인플레이션을 상쇄하고도 연평균 15% 상승했다. 임금은 지금도 오르고 있다. 다만 세계적 경제 위기 때문에 2009년부터 연 1.3%로 둔화되었을 뿐이다. 부동산은 2002년부터 2010년 사이에 세 배 올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졸부가 생겨났다. 그에 따른 법적 분쟁도 많았다. 부패한 판사들이 돈을 받고 편파적 판결을 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 국민들의 불만은 소득 상승과 비례해서 늘어갔다. 부에 상응하는 정직한 정치를 하라는 요구가 갈수록 강렬해졌다. 모스크바전략개발센터의 미하일 드미트리예프 소장은 크렘린에서 반경 16Km 지역에 신흥 부자 5백만명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정치적 불만을 생산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고 그는 분석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정치학 교수 다니엘 트레이스먼은 권위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사회적 부의 창출에 성공한 정치인들은 왕왕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푸틴과 피노체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과거 러시아에서는 빈곤이 시위의 원인이 되었다. 지금은 부가 원인이다. 그 점에서 러시아의 시위는 ‘아랍의 봄’을 유발한 시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문명화된 시위’라고 할 만하다. 이런 시위는 워낙 전례가 없는 것이어서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많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그것이 가능한 것으로 믿는 눈치이다.

러시아 시위는 시위자들 스스로 시인하듯 폭력적 혁명이나 정변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들은 삶의 질에 어울리는 격조 있는 정치와 그 속에서의 인간다운 삶을 바란다. 이들의 궁극적인 종착점은 자랑스러운 국가와 그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의 자존심을 구현하는 것이다. 푸틴으로서는 자기 덕에 부자가 된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사태가 야속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앞으로 새로운 러시아 역사를 써나갈 정치적 자산이다. 이 자산은 푸틴이 하기에 따라 그의 자산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그럴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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