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경제 정책 취할까
  • 유승경│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
  • 승인 2011.12.2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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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부문은 통제하는 체제 여전히 유지…핵문제 푼 후 대외 관계 개선해야 ‘호전’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11월15일 평양 지하상점에서 개막했다고 보도한 가을철 상품 전시회. ⓒ 연합뉴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김정은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전면에 등장했다. 국가 경제 부문이 지배적인 국가의 경우, 최고 지도자의 교체는 대개 경제 발전 전략의 전환을 동반한다. 이 때문에 북한 김정은 체제의 경제 정책 노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김정은이 서방 세계를 경험한 젊은 지도자이고 북한 경제가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북한이 개혁·개방 노선을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최고 지도자의 정치적 의지만으로 경제 발전 전략의 전환 여부와 방향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인 제반 여건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인 정치 상황도 주요한 결정 요인이다. 또한 경제 노선의 전환은 기존 노선의 완전한 폐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변화도 단절성과 연속성이라는 두 속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북한의 경제 체제도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북한도 제한적이지만 내부적인 개혁과 대외적 개방을 추진해왔다. 북한 경제 체제는 1990년대와 2000년대를 비교해보면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1991년 이후 북한의 경제 개혁 과정과 주요 내용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북한은 1991년 12월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설치한 뒤 동북아의 중계 무역과 수출 가공 기지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1997년 6월에 자유 시장 개설, 자영업 허용 등의 개혁 조치를 실시했다. 투자 유치가 잘 되지 않아 발전이 극히 부진한 상태에 있었으나, 최근 들어 러시아가 나진항 사용권을 획득했으며 중국이 도로 건설 등에 투자를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 개혁과 개방 조치에 큰 진전이 있었다. 개방 조치로는 2002년에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특구 지정을 들 수 있다.

개혁적 조치도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2002년 7·1 경제 관리 개선 조치가 대표적이다. 실리 보장 원칙을 내세우며 기업소의 실적 평가 기준으로 번 수입(이윤+임금)을 도입했으며, 성과에 따른 분배의 원칙을 확립하고 인센티브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계획에 따라 배분되는 것이 원칙인 생산재도 기업소 간에 현금 거래를 허용했다. 농업에서는 가족분조제를 확대했다. 2003년 3월에는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전환시켰다. 종합시장은 상설 시장으로 평양 시내에 11개 외에 북한 전역에 조성되고 있다. 2005년부터는 국유 기업이 생산 정상화를 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시장 판매를 위한 계획 외 생산을 허용했다.

남북 교역 등 대외 무역은 크게 증가해

북한이 중국과 손잡고 개발에 나선 황금평 특구. ⓒ 연합뉴스
이러한 조치에 힘입어 대외 무역은 크게 증가했다. 북한의 대외 무역은 2000년 19.7억 달러에서 2010년 41.7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남북 교역도 2000년 3.3억 달러에서 2010년 19.1억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대외 무역과 남북 교역을 합칠 경우 60.8%로 사회주의 진영 붕괴 이전의 최고치를 크게 상회했다.

하지만 북한이 일관되게 개혁·개방을 확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 당국도 7·1 조치 직후인 2002년 7월 농민시장을 일시적으로 폐쇄하고 사적 거래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2005년부터 시장 억제책이 점차 강화되었고 2008년 말에는 2009년부터 종합시장을 농민시장으로 다시 되돌린다는 정책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말 화폐 개혁 조치와 함께 종합시장을 폐쇄하고 개인 영리 기업을 몰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한은 아직 사적 부문을 통제하는 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치를 중국과 비교하면, 협동농장을 가족농으로 전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나지만 1978년부터 1984년까지의 개혁 조치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북한이 개혁·개방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북한이 한국과 미국 등 자본주의 진영과의 관계 개선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북한의 개혁·개방은 남북 관계와 대서방 관계의 전면적 전환을 필요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중국이 개혁·개방을 단행한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북한 김정은 정권의 향후 경제 노선을 추론해보자. 중국의 개혁·개방은 덩샤오핑의 권력 장악이라는 정치적 계기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그 이전 여러 해에 걸쳐 여건이 성숙되는 과정이 있었다. 미국은 1968년부터 베트남 전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 안전한 철군과 소련 봉쇄를 위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중국 역시 1969년 중·소 국경 분쟁으로 소련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면서 미국이 내민 화해의 손을 잡았다.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양국 관계는 빠르게 개선되었으며, 1978년 말 개혁·개방이 공식적으로 결정되기 이전에 미·중 간의 경제 협력은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낳은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핵 무장에 따른 자주적 국방 능력의 획득이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한 이후 오랜 기간 민족적 수난을 겪었던 터라 국가 지도자들은 핵 전력을 확보하는 것을 주권 수호의 관건이라고 여겼다. 1964년 처음 핵실험에 성공한 후 지속적으로 노력해 1970년대 말에는 독자적으로 핵 전략 실행 능력을 확보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하게 된 배경에는 서방과의 관계 개선이 가능한 상황이 조성된 것과 외세 침략을 우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국가 안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 있다. 이같은 조건에서 마오쩌둥 사망 이후 개혁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역사적인 전환이 시작되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북한이 외부 세계로부터 개방·개혁에 나섰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핵문제를 해결하고 남북 관계와 대미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은 김일성 탄생 100년이 되는 2012년을 ‘주체 100년’이라 지칭하며 강성 대국의 원년이 될 것이라고 선전해왔다. 북한의 대내외 정책 흐름을 살펴볼 때, 김정일은 2012년에 권력 승계를 완결 짓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 같다. 김정일은 최근 여러 차례의 방중과 경제 협력을 통해 북·중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켰으며, 지난 8월에는 러시아를 방문해 북핵 문제에 대한 러시아 발언권을 높여주면서 북·러 관계를 복원했다.

이와 동시에 2011년 들어 북한은 강온 양면 정책을 구사하며 미국과의 대화 재개를 다각적으로 모색해왔다. 미국도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온건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어 북·미 관계 개선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지난 12월19일에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대규모 식량 지원을 발표하고, 북한은 수일 안에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의 임시 중단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북한의 이러한 외교 전략은 김정일 자신이 주도해온 미국과의 핵협상을 자신의 시기에 마무리 지음으로써 김정은에게 대외적 고립에서 벗어난 상태의 북한을 물려주려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은 권력 승계를 단순한 권력 이양에 한정 짓지 않고, 대외 정책의 포괄적인 전환이라는 맥락에서 진행해왔다.

따라서 김정은 정권은 새로운 정책 노선을 취하기보다는 이미 설정한 정책 방향, 즉 핵 카드를 쥐고 북·미 관계를 개선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핵을 대결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외 관계 개선에 중점을 둔다면, 북한은 외부로부터의 고립에서 벗어나 내부 개혁과 대외 개방을 좀 더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명실상부한 개혁·개방의 길에 접어드는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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