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기씨는 왜 재산 몰수에 반대했나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12.02.26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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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기씨, <진주지> 등에 김지태씨 재산 몰수 과정 등 상세히 기록

최근 정수장학회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사장을 지낸 정수장학회 반환 청구 소송에서 고 김지태씨의 유족이 패소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국가의 강압으로 재산을 넘긴 사실은 인정했지만 시효가 지나 반환 청구는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사저널은 지난 2004년 정수장학회 탄생의 비밀을 담은 문건을 단독으로 입수해 보도한 바 있다. 이후 문화방송의 기부 승낙서가 변조된 사실 등을 밝혀내는 등 정수장학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최근 불거진 정수장학회 문제는 긴 기간동안 진행된 복잡한 문제다. 선거의 해인 2012년 정수장학회 문제가 이슈로 떠오른 지금,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2004~2005년)의 기사들을 소개한다.

박씨는 <義岩萬壽(의암만수)>라는 잡지 1999년 봄·여름호와 2000년 4월 나온 경남 진주 출신 인사들이 낸 <晉州誌(진주지)>에도 당시 사건의 전모를 상세히 기록했다.

두 자료에서 박씨는 ‘일부라도 진실을 기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어 글을 썼다’라고 배경을 설명하며 ‘막대한 개인 재산이 몰수되고 인격적으로 흠집이 나 지금도 음지에서 살고 있는 다수의 명사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김씨 유족을 위로했다. 그는 또 ‘오늘날의 정수장학회가 어떤 경로로 탄생하였는가를 관계 임원들께서는 각별히 성찰·명심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라는 바람을 밝혔다.

<시사저널>은 박씨의 증언(15~16쪽 참조)과 함께 이 자료들이 정수장학회 탄생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주요 내용을 전재한다. 
 

 

박용기씨는 (왼쪽)와 라는 잡지에 ‘김지태 사건’의 전말을 기록했다. 오른쪽 사진은 5·16 석 달 뒤인 1961년 8월15일 한자리에 모인 ‘혁명 주체’들.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가 박씨이고, 그 옆이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이다.

 

 

 

김지태 재산 강제헌납(몰수)은 공산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절대 있을 수 없고 중앙정보부에서 구속 수사한 사람을 중앙정보부 수사 책임자에게 헌납 날인을 받으라는 것은 중앙정보부가 개인 재산을 빼앗는 기관이 아닌 만큼 절대 못함.

1962. 정초(1월2, 3일) 연휴.

(가) 당시 박정희 장군은 부산에 자주 왔음. 해운대 철도호텔(후에 극동호텔로 이름이 바뀜)에 유숙. 부산에 오면 본인과 단둘이서 말을 나눈 후, 기관장들을 만나 식사 또는 주연을 하였음. 식사는 주로 남포동 ‘향원’이란 일식집에서 하고, 주연은 ‘동래별장’이란 요정에서 했음.

(나) 당시 독대시에 김지태씨에 대한 조사 지시.

박장군이 (5·16 이전 부산에서)군수기지사령관(으로 근무할) 당시 김지태씨에 대한 인상은 부산일보 및 문화방송을 미끼로 부정축재 및 탈세자로서 인식, 혁명 사업에 비협조적 등등 철저하게 조사 지시.

당시 국회의원은 중정법상 본부장의 승인을 득할 사항임으로 내사 후 정식 수사 착수 주장.

사건 내용(수사 내용)

1. 탈세:부산일보 산하에 부일장학회(장학회 면세)를 두고 모든 재산을 장학회를 이용해 탈세.

2. 김지태씨 부인이 자유당 시절 다이아몬드 반지를 밀반입한 것 등의 죄목으로 구속 수사하였음.

수사 중 김용순 장군이 자주 본인 사무실로 내방, 사실 내용을 타진하였음. 당시 김용순 장군은 군수기지사령관, 계엄사령관, 최고회의 의원 등을 겸임, 막강한 위치에 있었음. 그는 본인보고 현재 최고회의 의장(박정희)의 심정은 김지태씨 재산 중 부산일보(부일장학회 포함)·문화방송 등을 국가에 헌납하는 조건으로 본인이 절충·합의하자는 요지였음. 

본인은 전방에만 근무하고 이같은 사정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었음. 죄가 있으면 법으로 판명할 일이지 죄하고 재산하고 상쇄한다는 일이란 공산국가에서나 하는 일이지, 어떻게 민주국가에서 남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가. 더욱이 중정에서 수사하는 수사 책임자가 재산 헌납에 개재하다니…. 즉석에서 “이 자리 내놓고 못해”라고 소리치며 반대하였음. 박기석 대령을 재판장으로 결정해 재산 헌납과는 무관하게 군법회의를 진행시켰음. 당시 심정은 죄가 있으면 군법회의에서 결정하면 될 것이고 재산 문제는 별개 문제이니….

후일 최고회의 법률고문인 신직수(법무부장관·중앙정보부장 역임)가 교도소를 직접 방문해 재산 헌납에 날인을 받았다고 함. 3공 당시 서민호 의원이 국회에서 김지태씨 재산 환수에 반발, 환수한 재산을 돌려줄 것을 강력히 문제시한 일이 있음.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당시 상황을 알기 위해 담당관인 모성진(후일 중정 수사단장)을 보낸 일이 있으나 함구. 

후일 들은 바에 의하면 최고회의 의장이 내가 공산국가 운운하면서 재산 몰수에 반대하였다는 사실에 노발대발하였다고 함. <각하, 혁명합시다>(이석제 지음)에 박정희 장군의 성격은 한번 눈에 나면 끝까지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당시 본인은 눈 밖에 났음. 일선에서만 근무해 너무나 사회를 몰랐던 것이 요인. 부산 재직 중 박정희 장군을 혁명 동지요, 군 선배로 생각해 본인 생각대로 직언을 하였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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