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정주영 10만명 양성이 꿈”
  • 이철현 기자·정리│홍재혜 인턴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12.02.28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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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인터뷰 / “정주영 회장 말이라면 지옥이라도 갔을 것…후회는 없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69)은 갖가지 송사에 시달리는 사람답지 않게 혈색이 좋았다. 평생 술과 담배는 입에 댄 적이 없고 걷기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생활 습관 덕에 건강했다. 이 전 회장은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국립극장 1층 식당에서 4시간 동안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지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또 12년 전에 발생한 사건의 주역들과 시간을, 잊지 않고 꼼꼼히 기억해 냈다. 인터뷰에 앞서 이 전 회장은 의정부교도소에서 공책에 볼펜으로 쓴 자서전 원본 20여 권을 가져와 취재진 앞에 펼쳐놓기도 했다. 지난 12년간의 침묵을 깨고 이제 무엇이든지 공개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다음은 이익치 전 회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이익치 전 회장이 옥중에서 육필로 빼곡히 쓴 자서전 원본. ⓒ 시사저널 임준선

지난해 12월 ‘대북 송금과 현대 비자금 사건’ 수사가 8년 만에 재개되면서 이 전 회장도 검찰 조사를 받았다. 대북 송금 과정에서 이 전 회장이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현대 비자금 특별검사팀은 ‘이익치가 5억 달러를 북한에 송금했다’고 발표했다. 내가 현대증권을 통해 5억 달러를 송금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날마다 자금 흐름을 금융위원회에 보고해야 했다. 따라서 불가능한 일이다. 돈은 정몽헌 회장이 마련했다. 현금이 없어 산업은행에서 대출받아 보냈다는 내용은 이미 특검 발표로 밝혀졌다. 나는 대북 송금 과정에 개입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1999년 11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정주영 회장(왕회장)은 내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계동 사옥 15층에 있는 자기 사무실 옆방에 있으라고 말했다. 감옥에 가기 전에는 정주영 회장과 함께 안기부장을 비롯한 관계 부처 고위 관료를 만나고 다녔지만 감옥에서 나온 다음부터는 회사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내가 나서서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정몽헌 회장이 건넨 봉투를 박지원 장관에게 전달한 것뿐이다.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으니 무엇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정몽헌 회장은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 조사받다가 자살했다. 자살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정몽헌 회장은 내유외강형 인물이다. 검소하고 겸손했다. 입도 무거웠다. 정주영 회장은 그런 정몽헌 회장을 좋아했다. 나도 왜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희망을 잃었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당시 정몽헌 회장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현대건설, 현대전자, 현대상선 같은 계열사가 특검을 받으면서 다 날아갔다. 기업이 망하면 기업인은 살 희망을 찾지 못한다. 정몽헌 회장은 아버지 뜻을 이어받지 못했다고 판단한 듯하다.

ⓒ 시사저널 임준선

검찰 조사 과정에서 가혹 행위가 있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정몽헌 회장이 조사받을 때에는 변호사가 배석했다. 변호사가 있는 자리에서 검사가 피의자에게 가혹 행위를 할 수 없다. 검사도 재벌 총수는 대접한다. 우리 같은 고용 사장을 대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함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검찰은 내게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현대그룹이 당시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 발 벗고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그룹이 북한에서 사회간접자본 개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만나야 했다. 금강산에서는 큰 사고가 없었지만, 1천km가 넘는 고속도로를 깔고 지하 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예기치 못하게 불상사가 자주 일어난다. 이는 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협의해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양국 정상이 협정을 맺어 개발 주체를 보호해야 한다. 정주영 회장이 ‘DJ가 김정일을 만나서 그 얘기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정몽헌 회장이 양국 관계자에게 남북 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타진했다. 남쪽에서는 박지원 문화부장관을 수차례 만났다. 원래 안기부장과 상의해야 할 일이었으나 북한이 협상 창구에서 안기부를 빼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DJ와 가장 가깝고 잘 통하는 사람이 박장관이었다. 박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양측 관계자와 현대그룹 관계자가 실무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싱가포르 등에서 수차례 만났다.

이 전 회장이 만났던 김정일 위원장은 어떤 인물인가?

정주영 회장이 “김정일 위원장은 참으로 약다”라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우리(한민족)가 5천년 내내 주위 강대국에게 시달렸다. 그런데 남쪽에 세계 최강의 나라가 떡 하니 버티고 있는데 누가 우리를 건드릴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러시아나 중국을 믿지 않았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러시아는 대북 원조를 갑자기 끊었다. 중국도 원조 물량을 절반으로 줄였다. 지금도 줄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은 러시아나 중국, 그 누구에게도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북한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모두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한다. 특정 나라의 원조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다.

북한에서는 김정일 위원장 없이는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았다. 현대그룹 협상단은 당시 개성공단이 결정되는 과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개성은 판문점에서 4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지하에 군사 시설이 가득하다. 남측 기업에 공단 부지로 선뜻 내어주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왜 신의주가 아니라 개성이냐고 묻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나는 “물건을 만들어 남쪽에 팔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개성에서 만들어 남쪽으로 실어가 수출해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김정일 위원장은 맞다고 생각하면 바로 승낙하는 사람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배석한 아세아태평양위원회 관계자에게 “내일 당장 아침 일찍 모시고 현장을 보여드려라”라고 말했다. 그 다음 날 현대그룹 일행은 개성공단이 들어설 2천만평을 답사할 수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그런 모습을 보고 정주영 회장은 대북 사업에 자신감을 얻었다. ‘이 사람과 하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대그룹이 김정일 위원장과 합의한 7대 사업은 무엇인가?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과 벌인 청구권 협상이 타결되어 배상금과 차관이 들어올 것으로 기대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청구권 자금으로 100억 달러와 차관을 준다고 했으니 현대 양반들이 잘 해결해달라”라고 말했다. 정주영 회장은 ‘일본이 준 돈으로 고향을 발전시키고 현대건설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정주영 회장은 철도를 새로 놓고 고속도로를 까는 데 이 돈을 사용하기를 바랐다. 정주영 회장은 평양에서 원산,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10차선 고속도로를 뚫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평양에서 원주나 신의주 가는 길은 2차선이다. 그 밖에 있는 도로라고는 형편없는 해안도로가 전부이다. 철도도 다시 놓아야 했다. 철로 규격이 달라 지금 상태로는 남북한 철로를 연결할 수 없다. 통신 주파수 대역도 다르므로 통신 설비도 다시 깔아야 한다. 그것이 7대 사업이었다.

왜 첫 사업이 금강산 관광이었나?

처음에는 왕회장이 정몽구 회장에게 북한 사업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정몽구 회장은 당시 북한에 컨테이너를 마련하고 철도나 공장도 만드는 사업을 고려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금강산 관광을 첫 사업으로 선택했다. 정주영 회장은 탁월한 전략가이다. 정주영 회장은 “금강산은 평양과 멀리 떨어져 있어 이곳이 개방되어도 북한 정권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마침 내 고향도 금강산이니 안 할 이유가 없다. 관광객이 들어가면 북한도 필요한 돈을 벌 수 있다. 남측 사람들도 금강산을 얼마나 좋아하느냐. 꼭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대북 사업 창구가 처음에는 정몽구 회장이었다가 나중에 정몽헌 회장으로 넘어간 것인가?

정몽구 회장에게 맡겼다기보다 대북 사업을 한번 해보라고 지시한 것이다. 북한에는 인프라도 갖춰져 있지 않고 협상 작업이 만만치 않아 개발 사업을 추진하기 힘들다. 당장 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는 금강산 관광밖에 없었다. 금강산을 열기 위해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도 다녀가고 문선명 통일교 교주도 다녀갔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의욕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필요했다. 금강산 문을 열었는데 어떻게 가야겠느냐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군사 시설이 밀집한 육로는 힘들고 금강산 인근에 비행장도 없었다. 그 해답을 제시한 이가 정몽헌 회장이었다. 정몽헌 회장은 “속초항이나 동해항에서 배로 가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북한에 항구가 없으니 우리가 항구를 세워야 한다”라고 왕회장에게 보고했다. 그 뒤로 대북 협상 창구는 정몽헌 회장으로 일원화되었다.

차기 총수 자리를 놓고 정몽구와 정몽헌 사이에 갈등이 심했다.

차기 총수로는 일찌감치 정몽헌 회장이 낙점되어 있었다. 변중석 여사가 1980년대 유학을 떠나는 6남 정몽준을 배웅하는 공항에서 내게 “몽헌이 술 좀 적게 먹게 하세요”라고 부탁했다. 변여사는 당시 ‘아버지(정주영)가 현대그룹은 몽헌이한테 주고가면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왕회장은 현대그룹은 더 늘릴 필요도 없고 유지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변여사는 ‘몽헌이가 (현대를) 맡아야 분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벌써 두 분 사이에 합의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었다.

정주영 회장 부부의 바람과 달리 형제간 다툼은 ‘왕자의 난’까지 일으키고 3부자 퇴진 기자회견으로까지 이어졌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는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에게 현대전자와 현대자동차 경영을 맡기고 정씨 일가는 경영인이 엉뚱한 짓 하면 대주주 권리를 행사해 경영진을 교체하면 된다고 말했다. 정몽구 회장이 처음에는 못 하겠다고 했으나 그날 저녁 일가친척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는 아버지 뜻에 수긍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정주영 회장의 건강이 나빠지자 정씨 형제는 정주영 회장 뜻을 무시하고 재산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몽헌 회장도 정주영 회장의 지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었다. 정주영 회장의 뜻은 ‘(정몽헌 회장이) 현대그룹을 명실상부 오너로서 운영해라’였다. 경영에서는 물러나더라도 대주주로서 지배하면 된다는 뜻이다. 당시 공정거래법은 현대를 ‘정주영 집단’으로, 삼성은 ‘이건희 집단’으로 명명했다. 그룹 지주회사인 현대중공업의 최대 주주가 정주영 회장이었다. 나는 정주영 집단을 정몽헌 집단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몽헌 집단으로 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증여세를 포함해 5천억~6천억원을 마련해야 했다. 나는 현대그룹 계열사 주식을 담보로 외국 금융기관으로부터 7천억원을 빌릴 채비를 마쳤다. 정주영 회장 뜻을 그대로 평생 지키는 것이 내 목표였다.

정주영 회장이 2000년 9월 현대중공업 지분을 판 자금으로 현대차 주식을 매입하려고 했는데 공정위가 막은 이유가 무엇인가?

정주영 회장의 지시에 따라 현대중공업 지분을 판 자금으로 현대차 주식 9%가량을 인수했다. 김재수 그룹 종합기획실장이 현대차 주식을 매입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정주영 회장이 현대차 지분을 소유할 수 없다고 유권 해석했다. ‘정주영 회장이 왜 현대자동차 주식을 가지면 안 되는지’ 지금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또 공정위가 현대차 지분을 팔라고 한다고 다시 팔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현대차 지분을 팔아 현대건설 주식을 샀다. 하지만 현대건설 주식을 매입하자마자 현대건설 신용등급은 정크본드 수준까지 떨어졌다.

현대건설 주식이 떨어졌을 때 ‘뒤에 누가 있는지 뻔히 안다’는 말이 이 전 회장 자서전에 나와 있던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현대건설 신용등급이 강등되었을 때 정몽헌 회장은 ‘이건 누가 뒤에 있다’고 말했다. 얼마나 화가 났겠느냐. 현대건설을, 현대자동차 주식까지 팔아서 샀는데 부도가 난 것이다. 정몽헌 회장은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욕설을 뱉어냈다.

정몽구 회장을 일컫는 것인가?

그것은 나도 모른다. 남의 일이다. 그런 얘기는 할 것 없다. 하지만 나온 이름이 좀 다르다.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거기까지는 얘기할 수 없다. 아무튼 당시 현대건설의 신용등급이 떨어진 것은 말이 안 된다.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에 개입한 사실을 자백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백한 것이 아니다. 대법원 판결은 그렇게 났지만 사실 나와 관련 없다. 박철재 상무가 나에게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이 나를 부르시더니 “몽준이를 살려달라”라고 말하더라. 당시 다른 정씨 일가는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은 달랐다. 현대중공업이 현대전자 주식을 매매하면서 주가를 끌어올리는 와중에 정몽준 회장은 보유한 현대전자 지분을 내다 팔아 대규모 시세 차익을 거두었다. 내부자 거래가 분명했고 거래 규모도 너무 컸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정주영 회장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나는 검찰 조사에서 주가 관리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정주영 회장 말이라면 나는 지옥이라도 갔을 것이다. 서운하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이 오죽하면 그랬겠나. 정씨 일가가 계열사 자금을 동원해 현대전자 주가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리고 현대전자 주식 3천8백만주를 팔아 대규모 시세 차익을 거두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현대그룹이 살아야 했다. 정주영 회장은 그런 일을 시킬 사람이 아니다. 자식들이 돈에 미쳐서 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

‘리틀 정주영’ 10만명을 양성하는 것이 꿈이다. 창업투자회사를 차려 문화 콘텐츠나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창업하는 젊은이를 지원하고 싶다. 옛날에는 제조업 육성이 중요했으나 지금은 문화 콘텐츠나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제2의 정주영’이 나와야 한다. 전세계에서 유통되는 문화 콘텐츠의 50% 이상을 한국에서 생산할 수 있다. 그러면 해마다 3천억~5천억 달러까지 끌어올 수 있다. 그것이 국가와 청년을 다 함께 살리는 길이다. 청년이 취업하는 것에만 매달리면 희망이 없다. 직장이 없어야 살길을 찾는다. 1970~80년 대 산업 성장기 주역은 젊은이들이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 구글이나 애플은 모두 창고에서 시작했다. 젊은이가 모여 창조적인 실업자 집단이 되어야 한다. 젊은이가 아이디어를 내고 50~60대가 실현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밝힌 정주영·현대가 비화 관련 기사] 

   "2000년 현대그룹 흔든 막후 정치 권력 있었다"(1)

   “2000년 현대그룹 흔든 막후 정치 권력 있었다”(2)

   “2000년 현대그룹 흔든 막후 정치 권력 있었다”(3)

   의문에 덮인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나이 정주영’을 울린 세 여인

   끝나지 않은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 현대가의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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