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현대그룹 흔든 막후 정치 권력 있었다”(2)
  • 이철현·이석 기자·홍재혜 인턴기자 ()
  • 승인 2012.03.0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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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영은 왜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했나

정주영 회장이 지난 2000년 5월 3부자 동반 퇴진을 선언하고 정몽구·정몽헌 형제와 함께 계동 사옥을 나오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금강산 관광사업은 전쟁 방지, 현대건설 살리기, 첫사랑을 만나기 위한 정주영의 일석삼조 카드였다.

정주영 회장이 금강산 관광 사업을 추진하게 된 계기는 1994년 전쟁 일촉즉발까지 갔던 미국에 의한 북한 영변 핵시설 폭격 시도였다. 정회장은 1990년대 중반 이진호 전 미국 연방수사국(FBI) 과장으로부터 미군 움직임을 1일 단위로 들을 수 있었다. 이 전 과장은 4남 몽우의 처남으로 정회장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FBI를 그만두고 정회장 경호실장을 맡았다. 이 전 과장이 수집한 첩보는 엄청났다. 미국이 영변 핵시설을 폭격할 것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 폭격은 전면전으로 비화해 서울 인구 25% 이상이 희생될 것으로 평가했다. 미국은 모의 공습 훈련까지 마쳤고, 미군 50만명을 동원할 계획까지 세웠다.

미국 시민권자에게는 한국을 떠나라는 소개령까지 내려졌다. 미국 시민권자가 집결할 장소까지 알렸다. 미국은 미군 전용기와 선박을 이용해 일본을 비롯해 제3국으로 미국 시민권자를 실어나를 조처까지 내렸다. 미국은 당시 남북한이 전쟁으로 입을 피해 규모를 1조 달러 이상으로 추산했다. 이 전 과장은 정씨 일가와 이익치 전 회장 가족이 집결할 장소까지 말해주었다.

이익치 전 회장도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있는 친구에게서 정보를 수집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이 미국 시민권자를 철수시키고 있다’는 첩보를 파악하고 경악했다. 김대통령은 주한 미국 대사와 주한 미8군 사령관을 불러 “미국이 우리 땅에서 전쟁을 벌일 수 없고 한국군 통수권자로서 군인 60만명 중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다행스럽게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한반도가 언제든지 전쟁의 잿더미로 변할 수 있는 화약고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1997년 초가을 정주영 회장은 이익치 회장을 불러 ‘남북한 간 전쟁 위험을 막고 평화통일로 가는 첫 번째 단추를 끼우는 사업으로 금강산 관광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정회장은 과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에 대해 언급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정회장과의 면담에서 “북한의 가난은 소련 책임이 크다. 한국과 소련 사이에 경제 협력이 이루어져 결실을 맺으면 그 결실 일부를 북한에 나눠주어 북한도 남한처럼 잘살 수 있도록 하자”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은 사업가였다. 명분도 중요하지만 실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97년 경제 사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당시 현대그룹의 총 부채액은 70조원에 이르렀다. 계열사 가운데 부채 규모가 가장 큰 곳은 현대건설이었다. 현대건설은 악성 부채 7조원을 떠안고 있었다. 현대중공업, 현대전자, 현대자동차, 현대정유, 현대석유화학 같은 계열사는 보유 자산이 부채보다 2~3배 되었으나 현대건설은 자산도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건설 부채 관련 주제만 나오면 금강산 관광을 빨리 성사시켜 북측 경제 개발을 앞당기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대건설이 북한 경제 개발을 주도하면 빚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금강산 관광 사업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하나 있다. 정회장이 고향 땅에서 만난 첫사랑을 찾고자 금강산 관광 사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익치 전 회장은 “정회장이 금강산 관광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첫사랑이다”라고 말했다. 금강산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북한 당국에 부탁해 통천 이장 집 딸을 찾았으나 아쉽게 2년 전에 죽는 바람에 첫사랑과의 재회는 실패했다(26쪽 딸린 기사 참조).

■ 이른바 ‘왕자의 난’의 전말을 밝힌다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1999년 12월 남북 통일 농구 경기에 참석한 정주영 회장에게 귀엣말을 건네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현대가의 피비린내 나는 재산 분쟁을 지켜보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현대’라는 이름조차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환멸을 느꼈다. 형제 분쟁의 시발점은 2000년 3월 터진 ‘왕자의 난’이었다. 정몽구 현대그룹 공동회장(이하 MK)이 현대증권 회장이던 이익치 전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 조치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당시 현대증권은 정몽헌 공동회장(이하 MH)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상선의 지배를 받았다. 인사 권한 역시 MH에게 있었다. MK가 MH와 상의도 없이 인사 결과를 언론에 발표하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언론에서는 형제간의 다툼이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당시 이익치 전 회장은 MH와 함께 싱가포르에 있었다. 북한의 송호경 아세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발령 난 사실은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귀국해서 정주영 회장을 만나 보니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당장 그룹 회장에서 MK의 이름을 빼라”라고 호통을 쳤다. 때마침 남북 정상회담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북한은 현대건설에 7개 사업권을 주기로 MH와 합의했다. 그 대가로 현대그룹이 4억 달러를, 정부가 1억 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남북 정상회담 날짜도 6월15일로 확정했다. 정회장은 이때 이미 후계 구도를 결정한 것 같았다. 합의문 발표 직후인 4월 중순에 MH와 나만 조용히 불러 유언장 작성을 지시했다. 정주영 이름의 모든 재산을 MH에게 상속하며, 현대그룹의 경영권 역시 MH에게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극비리에 후속 조치들이 진행되었다. 법적 절차를 마무리 짓기 위해 변호사단이 꾸려졌다. 서울 남부터미널 현장 앞에 있는 사무실에서 유언장이 작성되었다. 이때가 4월17일이었다. 당시 정회장은 두 명의 변호사 앞에서 직접 유언장을 낭독했다. 변호사 확인 후 유언장에 날인을 하면서 후계 구도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왕자의 난’이 발생한 지 한 달여 만이었다. 정회장은 장남인 MK를 끔찍하게 아낀 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았다. 정회장은 1999년 현대차를 장남인 MK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사석에서는 항상 “우리 몽구, 우리 몽구”라고 말하면서 술을 많이 마신다고 걱정을 했다.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이후로 기대가 더 커졌다. 김정일 위원장은 당시 김일성 주석 서거 이후 3년 동안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방북했을 때가 3년상을 치른 직후였다. 방북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정회장을 깍듯하게 대했다. 기념 촬영 때에도 정회장을 가운데 두고, 김위원장과 MH가 양쪽에 섰다. 김위원장의 예의 바른 모습을 많이 부러워했다. MK에게도 이런 모습을 기대했는데 왕자의 난이 터져 실망이 컸다.

■ ‘3부자 퇴진’ 발표 이전 전문경영인 체제 구상, MK 반발하자 국회의원 비례대표 제의

지난 2000년 5월25일이었다. 유언장 내용에 따라 정주영 회장이 보유한 현대중공업 주식이 MH에게 넘어갔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현대중공업 주식을 MH가 모두 증여받도록 했다. 이익치 전 회장 역시 ‘세금을 내더라도 MH 개인에게 증여되는 것이 현대가의 정통성을 잇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지주회사 격인 현대중공업 지분 17.85%를 모두 받아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MH를 설득했다. 하지만 MH는 현대상선과 현대건설 명의로 인수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현대상선이 12%를, 현대건설이 나머지 5.8%를 인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중공업 지분을 계열사에 판 돈으로 현대차 주식 9.3%를 매입하도록 지시했다. 자동차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자동차는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될 수 있도록 전문경영인을 영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판단은 달랐다. 현대그룹의 주가가 일제히 폭락하면서 정부와 채권단은 지배 구조 개선과 함께 경영진 문책을 요구했다. 정회장은 5월30일 ‘3부자 퇴진’ 계획을 언론에 발표했다.

당시 정회장이 3부자 퇴진 계획을 발표한 것은 정부나 여론의 압박에 밀려서가 아니었다. 정씨 일가가 모두 경영에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구상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다만 ‘현대아산’은 북한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MK가 등기이사로 남아서 대북 사업을 챙기라고 말했다. MH는 정회장의 뜻을 수용했다. 하지만 MK는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계동 사옥 회장실로 찾아와 “3부자 퇴진 발표를 거두어달라”라고 정회장을 설득했다. 정회장의 결심은 확고했다. 정씨는 주주로만 남고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경영자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현대의 이름이 영속할 수 있고,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신 MK에게는 국회의원 출마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비례대표의 경우 돈을 기부하면 가능하기 때문에 배당금 중 일부를 기부하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라고 했다. 당시 회장실에는 MK 부자와 MH, 정상영 KCC 명예회장 등이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가족 회의였기 때문에 나는 밖에 나가서 기다리려고 했다. 정회장이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해서 얘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었다. MK가 “말주변이 없어서 국회의원은 할 수 없다”라고 버티자 정회장은 “말은 못하는 것이 좋다. 괜히 구설에 올라 표적만 된다”라고 MK를 설득했다.

이익치 전 회장은 나중에 정회장으로부터 3부자 퇴진을 결정하게 된 배경을 들을 수 있었다. 현대차가 글로벌 기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였다. MK의 경우 영어가 안 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전문경영인을 앉힐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자식에 대한 애정도 묻어났다. 정회장은 현대그룹을 더 키우기보다 지키는 것을 원했다. 2세들이 자산가나 사회사업가로 살면서 자신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경영진이 잘못하면 대주주 권한을 행사해 더 좋은 경영진으로 바꾸면 되었다.

법적 책임 역시 없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구상도 현실화되지 못했다. 정회장이 현대차 주식을 매입하자마자 공정위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MH 역시 여러 차례 어려움을 토로했다. 정부로부터 압박을 많이 받는 것 같았다. 이익치 전 회장은 현재 상황을 아버지에게 보고하고 잠시 해외로 나가 있을 것을 MH에게 권유했다. 당분간 연락을 끊으면 답답한 사람이 스스로 나올 것이고, 그러면 주식의 주인인 정주영 회장을 만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MH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이 소유한 현대차 주식을 모두 팔아 현대건설 주식을 매입했다.

■ “7월26일은 현대건설 제삿날”… 정부 소식통 귀띔 한 달만에 정크본드 수준으로 신용등급 하락

현대건설을 매입하자마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7월26일이 현대건설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라는 얘기가 국정원 인사들 사이에서 나온다는 내용이었다. 이익치 전 회장은 정부의 핵심 정보통을 통해 이같은 얘기를 귀띔받았다. 정보를 전달해준 인사는 박정희 정권 때까지 중앙정보부 국장을 지낸 고위급이었다. 5공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국정원을 나왔지만, 정부 인맥은 여전히 막강했다. 국정원 후배들과도 가끔 어울려 식사를 하곤 했다. 이 자리에서 현대건설 신용등급이 정크본드 수준으로 강등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이 전 회장에게 전해준 것이다.

MH에게 말해 은밀히 조사를 해보도록 했다. 며칠 후 MH는 “잘못 알고 있는 얘기인 것 같다”라면서 가볍게 넘겼다. 지난 1997년까지만 해도 현대건설의 부채는 7조원 규모였다. ‘바이코리아 펀드’로 자금이 들어오면서 현대건설의 부채는 5조원 규모로 줄어들었다. 부채 비율 역시 4백%에서 1백90%로 낮아졌기 때문에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김윤규 사장도 당시 브리핑을 통해 “정부가 제시한 부채 비율 2백% 미만으로 줄여놓은 상태이다. 현대건설의 신용등급을 낮춘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라고 MH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현대건설의 신용등급은 정크본드 수준으로 하락했다. 날짜 역시 정확히 7월26일이었다. 5조원이 넘는 부채를 떠안고 있는 회사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은행관리나 법정관리로 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익치 전 회장은 현대차 주식을 정리해서 현대건설 주식을 사게 한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다 알면서 하나씩 조치해 나가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MH와 이 전 회장을 겨냥한 파상 공세가 주변에서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전자와 현대증권, 이 전 회장을 상대로 2천5백억원 규모의 소송을 제기했다. 금감원은 소송과 관련한 조사를 한다면서 이 전 회장과 현대증권을 압박했다. 모든 것이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터여서 배후 세력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 이근영 금감원장, “해외 나가 머리 식히고 오면 어떨까” 제의

지난 2000년 9월 평소 안면이 있는 언론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근영 금융감독원장이 이익치 전 회장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현대중공업 소송 문제로 금감원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원장을 만날 이유가 없었다. 한편으로 “지금이 어느 때인데 관치인가”라고 생각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서울의 모처에서 이원장과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원장은 “두어 달 회사를 떠나 해외에서 머리를 식히고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제의했다. 증인(동석한 언론인)도 있는 만큼 연말에 귀국하면 복귀할 수 있도록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이 전 회장은 미련 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원장의 제안에 솔깃해서가 아니었다. 피비린내 나는 형제간의 전쟁에 더는 발을 담그기가 싫어서였다. 이전에도 정주영 회장이 물러나면 현대를 떠날 생각이었다. MH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에게 사직서를 전달하도록 비서에게 시키고 여의도와 계동 사무실을 정리했다.

이근영 원장을 만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금감원은 9월10일 이 전 회장에게 해임 통보 상당의 징계를 내렸다. 이 전 회장은 이원장과의 신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현대가의 재산 분쟁 연장선에서 보고 있다. 이전에도 황당한 일이 많았다. 현대증권 주총을 하루 앞둔 지난 5월30일이었다. 당시 나는 3년 임기를 모두 마치고 연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정주영 회장과 MH의 결재까지 난 상황이었다. 야근하고 있는 직원에게 재정경제원 과장이라고 하면서 전화가 왔다. 이 과장은 “이익치 회장의 거취가 어떻게 되느냐. 다시 전화할 테니 확인해두어라”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재정경제원의 간부가 증권사 회장의 거취에 왜 관심을 가지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밝힌 정주영·현대가 비화 관련 기사] 

  “2000년 현대그룹 흔든 막후 정치 권력 있었다”(1)

   “2000년 현대그룹 흔든 막후 정치 권력 있었다”(3)

   의문에 덮인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나이 정주영’을 울린 세 여인

   이익치 전 회장 인터뷰 "난 리틀 정주영 10만명 양성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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