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현대그룹 흔든 막후 정치 권력 있었다”(3)
  • 이철현·이석 기자·홍재혜 인턴기자 ()
  • 승인 2012.03.0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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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김정일 위원장(왼쪽), 정주영 회장(가운데), 정몽헌 회장이 기념 촬영했다. ⓒ AP 연합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현대측 협상단 구성원으로, 나중에는 북한의 경제 고문 자격으로 김정일 위원장을 여러 차례 면담했다. 이 전 회장은 김정일 전 위원장에 대해 “안하무인하고 포악한 인물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예의범절, 유연한 사고, 유머 감각까지 갖춘 쾌활한 지도자였다”라고 평가했다. 이 전 회장은 가까이서 본 김 전 위원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정몽헌 회장은 북측에 장전항에 인접한 절벽 위쪽에 골프장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김용순 아세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은 대경실색했다. 정몽헌 회장이 지목한 곳에 군사 시설이 들어 있다고 하면서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정몽헌 회장은 김위원장과의 면담에서 “(장전항 인접 절벽 위쪽은) 미국 캘리포니아 몬테레이에 있는 페블비치 골프장에 비견되는 명문 골프장을 조성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췄다”라고 말했다. 북한군 대장 한 명이 말문을 열려고 하자 김위원장이 막았다. “정몽헌 회장이 요청하는 대로 해줘라. 너희가 그 시설을 다른 곳으로 옮겨라. 제대로 관광지가 되려면 위락 시설이 있어야 해. 산만 보러 오나? 금강산이 아무리 명산이라도 술도 있고 여자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옮기고 골프장 지을 수 있도록 해드려라.”

김정일 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을 깍듯이 예우했다. 기념 사진을 촬영할 때 김위원장은 중앙 자리를 정주영 회장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왼쪽에, 정몽헌 회장은 오른쪽에 세웠다. 정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김위원장이 1994년 아버지 김일성 주석 서거 이후 4년 동안 외부 활동을 자제한 것도 아버지에 대한 예를 지키는 것으로 정회장은 생각했다.

지난 1998년 10월30일 두 번째 방북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정주영 회장 일행을 김위원장이 찾아왔다. 김위원장은 현대측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백화원초대소에 찾아와 “금강산 사업은 나누지 말고 정주영 회장이 모두 추진하기 바란다. 발해만에 석유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 석유가 생산되면 남쪽에 주겠다”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김위원장은 정주영 회장, 정몽헌, 김영주(정주영 회장 처남), 정희영(정주영 회장 여동생)과 사진을 찍으며 “공산당수와 사진 찍는 것, 보안법 위반 아닌가?”라고 말하며 웃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현대측 일행에게 “북측은 미군의 남측 주둔에 반대하지 않는다. 미군이 계속 남아서 북과 남이 전쟁하지 않도록 막아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언급된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1992년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미국 공화당 행정부에게 미군이 (남쪽에) 계속 남아서 남과 북이 전쟁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내용과 워낙 다르다 보니 정주영 회장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김위원장은 지난 1999년 6월15일 일어난 제1차 서해교전(연평해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김위원장은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우리측(북한) 희생이 너무 컸다. 해군 쪽에서 육군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내가) 더 이상 확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해군은 남측과 상대가 안 되지요”라고 말했다. 북한 해군의 전력은 동해와 서해로 나뉘어져 있어 장비와 인력 같은 군사력 이동이 힘들어 남한 해군과의 전투에서는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 정세영 회장(왼쪽)이 아들 몽규씨와 함께 1999년 3월 현대차 회장직에서 퇴진하겠다는 요지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 시사저널 임준선
고 정세영 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은 지난 1967년부터 32년간 현대차를 이끌어왔다. 현대차 대표이사로서 인생 대부분을 현대차와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1999년 현대차 경영진에서 물러났다. 후임자로 정몽구 현 현대차그룹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당시 언론에서는 ‘나흘 만에 끝난 정세영 쿠데타’라는 제목의 보도가 잇따랐다. 정 전 회장은 2월26일 주주총회에서 자신과 가까운 인사들로 이사회를 구성하고 현대차의 경영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 시도가 무산되자 정세영 회장은 나흘 만에 사표를 제출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서전에서 “정세영 회장이 사표를 제출한 것은 쿠데타가 아니다. 정세영 회장이 정몽구 회장에게 현대차를 넘기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협화음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회장 자서전에 따르면 정주영 회장은 지난 1999년 초 정세영 회장을 만나 개성공단 내에 20만대 규모의 소형차 생산 공장을 건설할 것을 지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개성공단 조성을 약속받은 터여서 어려움은 없었다. 정세영 회장이 주저주저하니까 자동차의 경영을 정몽구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당시 정세영 회장은 “정몽구는 절대 안 된다. 정몽헌에게 넘기라고 하면 기꺼이 내놓겠지만, 정몽구는 안 된다”라고 버텼다. 영어를 못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주영 회장은 “몽구가 부족한 게 있으면 내가 뒤를 봐주겠다.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 시키는 대로 해”라고 말했다. 형의 단호한 지시에 정세영 회장은 결국 현대차 경영권을 정몽구 회장에게 내주어야 했다.



정주영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가 1992년 12월 부산 유세장에서 청중에게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1997년 11월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사장은 계동 현대그룹 본사 사옥 15층에 자리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실로 다급하게 뛰어들어갔다. 창덕궁이 내려다보이는 계동 15층에 자리한 그룹 명예회장실에서는 정회장이 화를 삭이지 못하고 분노에 떨고 있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30년 동안 정주영 회장을 모셨지만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본적이 없다. 분을 삭이지 못해 잘못하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정회장은 이익치 사장을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하고 나서 10분 넘게 입에 담기 힘든 온갖 욕설로 이내흔 현대건설 사장을 욕했다. 이내흔 사장은 정회장이 내린 특명을 이행하지 않고 잠적한 상태였다.   

정회장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고 나서도 대권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지난 1997년 가을 이익치 사장은 명예회장실에 불려갔다. 정회장은 이 자리에서 무소속으로 15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무소속으로 출마하려면 6대 지역에서 각각 5천명씩 총 3만명의 유권자 추천서를 받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해야 했다. 정회장은 이 업무를 현대건설 대표이사이자 최고위 경영진 7인으로 구성된 현대그룹 운영위원회 멤버인 이내흔 사장에게 시켰다. 유인균 당시 고려산업개발 사장도 차출되었다. 유사장의 부친이 민주당 춘천 지역구 국회의원과 강원도당 위원장을 지내 정치 감각이 있었고 민주당 실세인 박관용 비서실장, 이원종 정무수석, 김운환 의원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이내흔 사장은 정몽헌 회장에게, 유인균 사장은 정몽구 회장에게 각각 명예회장의 출마 의지를 보고했다.

그 뒤로 정몽헌 회장 방에서 이내흔 사장, 박세용 그룹 종합기획실장이 모이는 횟수가 잦아졌다. 이병규 현대백화점 사장까지 명예회장 비서실을 보강하기 위해 차출되었다. 6개 지역에서 5천명씩 추천을 받으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하는 이내흔 사장은 어찌된 일인지 계동 사옥 6층 현대건설 사장실에 머무르면서 12층 정몽헌 회장 방에만 들락날락했다. 유인균 사장도 가끔 명예회장의 동선만 물어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흔 사장과 유인균 사장이 정회장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것이다. 이익치 전 회장은 “당시 실무자 회의에서는 명예회장의 건강과 현대그룹에 몰아닥칠 정치권의 태풍이 염려되어 명예회장의 지시를 이행할 수 없다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라고 말했다.

정주영 회장은 1997년 11월29일 저녁 청운동 집에서 YTN 방송을 보고 대통령 입후보자 명단에 자기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바로 이내흔 사장을 찾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정회장은 폭발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정몽헌 회장, 이진호 회장, 유인균 사장, 이병규 사장을 호출했다. 이 자리에서 이제 기업인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며 유인균 사장은 춘천에서, 이병규 사장은 서울 강남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라고 지시했다. 명예회장 지시를 거역한 이내흔 사장은 현대건설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현대통신 사장에 취임했다. 현대통신은 정몽헌 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 ‘명예회장 특명 거부’가 이내흔 사장 단독 행위가 아니라 정몽헌 회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97년 1월20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현대그룹 신년 하례회에서 손님을 맞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정몽구 회장. ⓒ 뉴스뱅크이미지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지난 1998년 가을 정주영 회장에게 ‘기아자동차 공개 입찰’ 관련 사항을 보고했다. 기아차는 실적 악화 탓에 1997년 법정관리를 거쳐 1998년 4월 회사 정리 절차에 들어갔다. 기아차는 1998년 10월 국내 제3자를 상대로 공개 입찰 매각을 앞두고 있었다. 보고를 마치자마자 정회장은 바로 정세영 현대차 회장을 불렀다. 다음은 배석한 이익치 회장이 전하는 정주영 회장과 정세영 회장 사이에 나눈 대화 내용이다.

 “기아차 매각 입찰이 곧 있다면서?”

“국내의 제3자에게 매각한다고 합니다.”

“자동차는 어떻게 하고 있어?”

“기아차 노조가 너무 강성이고 김선홍 회장이 수십 년 동안 기아차를 경영하면서 속이 너무 썩어 있는 것 같아서 자동차는 이번 매각 입찰에 불참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삼성이 지금 자동차 하고 있지? 닛산하고 하고 있나?”

“부산에서 닛산차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많이 고전하고 있습니다.”

“삼성이 기아차 인수하면 어떻게 돼?”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삼성은 돈도 많고 인재도 많아. 지금 삼성전자 반도체도 한국반도체인가 조그만 회사 인수해서 세계적인 회사로 키웠다. 삼성이 (기아차를) 가져가면 어떻게 되겠어?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전부 머저리만 앉아 있는 것 아냐? 내일모레 제 회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멍충이들만 있잖아.”

“삼성이 가져가면 심각해지죠.”

“그래서 내가 말하는 거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경솔하게 불참한다고 결정해? (중략) 꼭 가져오도록 해봐. 삼성이 가져가면 되겠어?”

“안 되죠. 경쟁자 키울 필요 없죠.”

“이제 제정신 돌아오는군.”

“하여튼 꼭 성공하겠습니다.”

정세영 회장은 기아차 매각 입찰에 참여했다. 기아차 인수가 확정되고 나서 정주영 회장은 기아차 화성공장에 방문했다.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회장은 50만대 생산 능력을 갖춘 기아차 화성공장을 방문해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이 세운 주행장, 공장 시설, 연구실을 둘러보고 너무나 좋아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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