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수부가 휘저으면 선거판이 휘청휘청
  • 감명국 기자 (kham@sisapress.com)
  • 승인 2012.03.06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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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각종 선거 때마다 대형 사건 수사로 판도 바꾸어 심재륜·안대희 전 중수부장은 ‘살아 있는 권력’에 칼 들이대

2004년 3월8일 대선 자금 수사 결과에 대해 중간 발표를 하고 있는 안대희 당시 대검 중수부장. ⓒ 시사저널 사진팀
‘대검 중수부’의 정확한 명칭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이다. 이름이 갖는 무게감만큼이나 휘두르는 칼끝의 울림이 세다. 정국을 뒤흔들어놓고, 때로는 정권의 운명까지 좌우한다. 정치권력이 ‘검찰 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중심에 중수부가 있다. 일단 중수부에서 대형 사건을 맡았다 하면, 그 사건을 다시 한번 더 들여다보게 될 만큼 정국 전반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지난해 정치권에서 검찰 개혁을 명분으로 ‘중수부 폐지’를 들고 나오면서부터 정치권력과 검찰 권력의 정면 충돌은 사실상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이어지는 선거 정국이어서 그 파열음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징조는 이미 드러나고 있다. 

역대 중수부장 가운데 ‘최고’를 평가할 때 으레 꼽히는 이가 심재륜 전 중수부장과 안대희 전 중수부장(현 대법관)이다. 둘의 공통점은 바로 ‘살아 있는 권력’에 칼을 댔다는 점이다. 심 전 중수부장이 중수부 수장에 전격 발탁된 1997년 3월 당시 정국은 극도로 어수선했다. 전임이었던 최병국 중수부장(현 새누리당 의원)이 숱한 비리 의혹에도 현철씨를 무혐의 처리한 데 따른 비난 여론이 비등해지자 임명된 지 불과 두 달 만에 전격 경질되었고, ‘대타’로 심중수부장이 나선 것이다. 당시 중수부 3과장이었던 이훈규 변호사는 “재수사 의지를 강력히 내비쳤지만, 당시 검찰 지휘부는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라고 기억을 되살렸다.

‘심통’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외곬으로 유명한 심중수부장은 임명된 지 두 달 만인 1997년 5월17일 현철씨를 알선 수재 및 조세 포탈 혐의로 구속시켰다.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15대 대선을 7개월여 앞둔 대선 정국이었다. 이 수사 이후 김영삼 정권은 급격한 레임덕에 빠졌고, 결국 그해 12월 대선에서 야당인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는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중수부장 재직 시 ‘국민 검사’라는 별칭까지 얻을 정도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던 안대희 전 중수부장은 2003년 불법 대선 자금을 수사하면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씨와 최도술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구속했다. 특히 당시는 노대통령이 취임한 첫해로, 그야말로 ‘펄떡펄떡’ 살아 있는 권력이었다. 안 전  중수부장의 불법 대선 자금 수사는 해를 넘겨 2004년 4월 총선 정국까지 최대 이슈가 되었다. 수사 결과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재벌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불거진, 이른바 ‘차떼기’ 논란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한나라당은 총선 참패를 면하기 위해 천막 당사로 옮기며 참회하는 모습을 연출해야 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대검 중수부와 경쟁

이처럼 대검 중수부 수사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에 정국을 강타하는 대형 수사를 통해 선거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가 많았다(19쪽 표 참조). 13대 총선을 앞둔 1988년 3월, 출범한 지 불과 한 달도 안 된 노태우 정권은 대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총선까지 승리하며 강력한 집권 여당이 되는 것을 꿈꿨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당시 있었던 대형 비리 사건이 불거졌고, 결국 전 전 대통령의 동생 경환씨가 새마을운동본부 비리로 전격 구속되었다. 이 사건을 진두지휘한 이는 강원일 대검 중수부장이었다. 한 달 뒤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은 과반수 이상 의석 획득에 실패하며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졌다.  

1995년 5월, ‘제1회 동시지방선거’를 불과 한 달여 앞둔 선거 정국 때 대검 중수부는 이형구 노동부장관을 수뢰 혐의로 전격 구속했다. 현직 장관이 검찰 수사에 의해 구속된 최초의 사례로, 당시 ‘깨끗한 정부’를 내세우며 첫 지방선거의 승리를 노렸던 김영삼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안겼다. 실제 한 달 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민자당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하는 등 전국 15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5개 지역만 당선되는 완패를 당했다.

2002년 제3회 동시 지방선거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6월13일 있을 지방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의 삼남 홍걸씨가 구속되었다. 당시 중수부는 ‘이용호 게이트’와 ‘최규선 게이트’를 수사하던 중이었다. 모두 당시 현 정권의 권력 비리였다.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 차남 홍업씨도 구속될 정도로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 의혹이 정국을 뒤덮었다. 지방선거를 앞둔 여당에게는 최대 악재였던 셈이다. 결국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민주당은 16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텃밭인 호남 3곳과 제주를 제외한 12개 지역에서 모두 낙선하는 참패를 당했다.

17대 대선을 앞둔 2007년에도 선거 정국은 검찰이 주도했다. 특히 ‘도곡동 땅 및 BBK 의혹’ 사건은 당시 유력 대권 주자인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 직접 연관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 사건은 대검 중수부가 맡지 않고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맡았다. 이때부터 대형 사건 수사를 둘러싸고 대검 중수부와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간에 묘한 경쟁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대신 대선 정국에서 당시 중수부는 ‘신정아 게이트’ 사건을 수사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의 신씨 비호 의혹이 불거지면서 이 또한 임기 말의 노무현 정권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고, 대선을 앞둔 한나라당에는 큰 호재로 작용했다.


ⓒ 연합뉴스
17대 대선을 불과 2주일 남겨둔 2007년 12월5일. 전국의 시선은 서울중앙지검청사 기자회견장에 집중되어 있었다. 취재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김홍일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BBK 주가 조작 및 횡령 개입 의혹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실상 대선 판도를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결과는 ‘무혐의’였다. 일부 기자들의 날 선 질문이 이어졌다. 취재진과 김홍일 차장 간의 질문과 대답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계속되자, 배석해 있던 최재경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은 기자들을 향해 웃으며 “우리 인상 좀 펴고 합시다”라고 말해 잠시나마 웃음을 흐르게 했다.  

당시 기자회견장을 나서면서 기자들 사이에서는 “최검사는 다음 정권에서 대검 중수부장 자리는 떼어놓은 당상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실제 현 정부에서 그는 대검 수사기획관과 서울중앙지검 3차장을 거쳤다. 모두 중수부장으로 가는 코스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는 지난해 8월 중수부장에 올랐다.

경남 산청 출신이지만 대구고를 나온 탓에 그는 ‘PK(부산·경남)’라기보다는 ‘TK(대구·경북)’ 인맥으로 분류된다. BBK 수사를 통해 민주당으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몰린 데다,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최구식 전 한나라당 의원과 친인척 간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최중수부장의 이미지는 ‘친여’ 성향으로 각인되었다. 본인 역시 이런 이미지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작 검찰 내에서는 “정치색이 진짜 없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검사이다”라는 평이 대세를 이룬다. 4·11 총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두고 최중수부장은 또 한 번 정치권력과 검찰 권력이 충돌하는 정중앙에 서는 운명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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