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60년 동안 ‘죽은 형’을 방치했나”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2.03.1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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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피해자 가족, 대통령 등 상대로 소송 제기

박치융씨가 한국전쟁 때 대전형무소에서 사망한 형 치선씨의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 시사저널 전영기

한국전쟁 때 친형이 행방불명된 박치융씨(65)의 가족은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 박씨의 눈에서는 60년 동안 눈물샘이 마를 날이 없었다. 실종된 형을 찾아 전국을 몇 번이나 헤매고 다녔다. 그런 박씨의 눈물은 가슴에 피맺힌 한을 남겼다. 지금은 국가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박씨 가족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박치융씨 가족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당시 박씨 가족은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서 부모님과 4남매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가 연탄회사에 다니는 등 벌이가 괜찮아 부유한 편에 속했다. 박씨의 큰형인 치선씨는 일제 강점기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어학원을 다니다가 조선호텔에 입사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 시민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박씨 가족이 피난을 떠나기도 전에 인민군이 서울로 들이닥쳤고,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부모님은 당시 열아홉 살이던 치선씨가 전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해 경기도 여주로 피신시켰다. 장남인 치선씨는 효자였다. 부모님과 가족들 걱정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는 가족이 있는 곳에 가기로 마음먹고 인민군이 쫙 깔린 서울에 몰래 잠입했다.

가시밭길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박씨 가족에게 앙심을 품은 한 이웃이 있었다. 일명 ‘광자 아버지’였다. 그는 박씨 가족을 표적 삼아 오랫동안 감시했다. 치선씨가 서울로 들어온 것을 알게 된 ‘광자 아버지’는 그를 인민군에 밀고했다. 곧바로 인민군 병사들이 집에 들이닥쳤고, 다락방에 숨어 있던 치선씨를 끌고 갔다. 그는 붙잡힌 지 3일 만에 탈출을 감행해 성공했다. 그리고 다시 집을 찾았다.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듯

그의 집 주변에는 늘 감시하는 눈초리가 있었다. 바로 ‘광자 아버지’였다. 그는 치선씨가 집에 돌아오자 이번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인민군에게 알렸다. 인민군에게 끌려간 치선씨는 이전보다 몇 배나 힘든 고초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호시탐탐 탈출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다 다시 한번 탈출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부상이 심했다. 이가 세 개 부러지고 온몸에는 상처투성이였다.

두 번이나 인민군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치선씨는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자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하지만 한번 엮인 ‘악연의 고리’는 질기고 질겼다. ‘광자 아버지’는 치선씨가 두 번이나 인민군에게 잡힌 것을 두고 ‘부역자’라고 모함했다. ‘작은 부역 혐의’만 있어도 잡아들이던 서슬 퍼런 시대였다. 치선씨는 국군에 의해 연행되었고, 서대문형무소로 보내졌다.

그 후 그의 행방이 묘연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어디론가 이송된 뒤 소식이 끊긴 것이다. 가족들은 치선씨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시립농대(현 서울시립대) 교수 한 명이 찾아와서 치선씨의 소식을 전했다. 그는 “대전형무소에서 같이 수감 생활을 했는데, 착하고 성실하며 죄목도 가벼워 같이 나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미루어졌다. ‘곧 나올 테니 염려마시라’고 치선이가 꼭 전해드리라기에 찾아와서 알려드린다”라고 했다. 큰아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던 가족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가족들은 치선씨가 곧 돌아올 것으로 굳게 믿었다. 금방이라도 ‘어머니!’라고 부르며 대문에 들어설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치선씨의 소식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가족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걱정과 그리움도 깊어만 갔다. 그렇게 혹시나 했던 ‘희망’은 ‘절망’이 되고 부모님은 화병까지 생겼다.

박씨의 가족에게는 ‘부역 혐의자’라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늘 기관의 감시를 당해야 했고, 숨을 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그래도 치선씨를 찾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온 가족이 나서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작은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가세는 기울 대로 기울었고, 집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박씨 아버지 명의로 답십리 근처에 땅이 있었으나 이마저도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박치선씨(원 안)가 열여덟 살 때 지인들과 촬영한 사진. ⓒ 박치융 제공

큰아들을 찾지 못해 화병을 얻은 박씨의 아버지는 1958년 1월4일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실종된 아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박치융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쯤 우리 가족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가산도 모두 탕진한 상태였다. 그래도 답십리를 떠나지 못하고 경미극장 앞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국의 용하다는 점쟁이들은 모두 찾아다녔다. 그런데 열에 아홉은 ‘아직 살아 있다’라는 점괘를 내놓았다. 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편이 죽자 박씨 어머니의 기력은 날로 쇠약해졌다. 곡기도 끊고 큰아들의 이름만을 불러댔다. 그런 얼마 후 그녀 또한 한 많았던 이승을 등지고 말았다. 그때가 1962년 9월27일이다. 남편이 죽은 지 약 4년 만이며, 그때 나이 51세였다. 박씨 어머니도 어린 자식들에게 “치선이를 꼭 찾으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박씨 가족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치융씨의 바로 위 형님도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천수를 누리지 못한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일이 많았다. 결국 생활고까지 겹치자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자살을 선택했다.

박치융씨는 이후 전화번호부를 끼고 살았다. 틈만 나면 전화번호를 뒤적이며 ‘박치선’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일일이 전화해서 자신의 형이 아닌지를 확인했다. 그러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 1982년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실시했다. 박씨는 누나와 함께 방송에 출연했다. 방송국 주변의 벽보에도 사진과 이름을 붙여놓았다. 실종된 형의 소식이라도 있을까 기대했으나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죽음의 실마리 찾았으나 의문만 커져

2000년에는 KBS 뉴스에 ‘대전교도소 학살 사건’이 보도되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박씨는 “바로 저것이다”라며 다음 날 누나와 함께 대전교도소를 찾아갔다. 교도소측은 “자료가 없다”라며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번에도 허탕을 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들은 지쳐갔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세상을 원망했다. 그럴 때쯤 희소식이 전해졌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1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발족한 것이다. 박씨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음 해인 2006년 5월 진실화해위원회에 ‘한국전쟁 당시 대전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형을 찾아달라’라는 내용의 민원을 제출했다.

박씨는 “위원회는 무성의로 일관했다. 관련 자료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계속 항의를 하니까 ‘상급 기관에 탄원서를 넣으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때부터 청와대 등에 탄원서를 넣었다”라고 말했다.

2010년 9월 드디어 치선씨의 행방이 밝혀졌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표한 ‘대전·충청 지역 재소자 희생 사건’ 조사 결과 보고서에 치선씨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치융씨는 이름, 본적, 주소 등을 일일이 대조한 후에야 한국전쟁 때 실종되었던 큰형이라는 것을 알았다. 60년 만에 형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치선씨는 1951년 1월4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망 원인은 ‘고문사’였다. 박씨 가족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살아 있다는 희망을 품고 60년을 찾아다녔으나 전쟁이 발발한 후 7개월여 만에 죽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욱이 유해를 찾을 길도 없어졌다. 

큰형의 죽음을 알고 난 후 박씨는 국가를 원망했다. 새로운 의문도 생겼다. 치선씨와 함께 죽은 ‘1백21명’은 누구냐는 것이다. 박씨는 “‘고문사’라고 된 것도 믿을 수가 없다. 기록을 보면 형을 포함한 1백22명이 고문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대전 사람 두 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서울에서 끌려왔다. ‘학살’을 ‘고문사’로 조작한 것이 분명하다”라며 분개했다.

그나마 2010년 12월에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체되면서 치선씨의 죽음에 대한 비밀은 미제로 남아 있다. 박씨는 국가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진행하고 있다. 3월6일에는 이명박 대통령 등을 상대로 해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박씨는 “국가는 아직까지 형의 사망 사실을 통보하지 않고 있으며 유해를 인도하지 않고 있다. 사망한 형을 교도소에서 출감시키지도 않았고, 명예 회복 등을 위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국민의 모든 기본권을 박탈하고, 행정 독점주의를 남용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국가는 유족에게 사망 통보를 하고, 명예 회복과 사과를 해야 한다. 아울러 고문이 아닌 ‘학살’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라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민족 분단과 한국전쟁이 낳은 또 하나의 슬픈 가족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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