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박사들 줄줄이 한국 땅을 떠난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2.05.1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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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미국 영주권 받은 한국 고급 인력 1백50명 달해…미국 이민 정책과 맞물려 해마다 증가

ⓒ 시사저널 전영기

고급 두뇌가 한국 땅을 떠나고 있다. 고급 인력이 외국으로 유출된다는 소식은 케케묵었다. 그만큼 인재 유출에 손을 쓰지 못했다. 과거에는 유학·연구 등 일시적인 목적으로 혼자 외국으로 향하던 고급 인력이 지금은 가족들과 함께 이민을 떠난다. 특히 30대 젊은 박사급이 이민을 떠나기 시작했다. 미래 국가 경쟁력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고급 인력은 석·박사 등 단순 고학력자가 아니다. 같은 박사라도 특정 분야에서 낭중지추와 같은 재능을 보이는 인재를 의미한다. 이런 사람은 세계 각국이 탐낸다. 특히 미국은 인재를 유치하는 데에 대통령이 나설 정도로 적극적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국익에 도움이 되는 외국의 전문 인력을 적극 유치하는 이민 정책을 강조했다. 이 조치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의장의 끈질긴 요구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2011년에 미국 영주권을 받은 한국의 고급 인력(석사 학위 이상 특기자)은 1백50명이다. 이 가운데 85%는 박사 학위 소지자로 추산된다. 미국 이민국의 자료를 보면, 미국 영주권을 받은 한국인 석사 이상 고학력자는 2009년 77명, 2010년 1백46명 등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미국 영주권을 취득한 전체 한국인 10명 중 두세 명은 고급 인력이다.

영주권을 신청했지만, 내세울 만큼 특출한 능력이 없어서 거부당한 사람까지 합하면 이 수치는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미국에서 박사 학위(이공계)를 받은 사람 10명 중 7명은 현지에 눌러앉기를 희망한다는 통계가 있다.

고학력자 이민 전문가인 홍영규 미국 변호사는 “미국은 NIW(고학력자 이민) 제도를 통해 한 해 약 4만명의 세계적인 두뇌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중국, 한국, 일본의 고급 인력이 미국으로 향하는 추세이다. 자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적극 영입하려는 것이다. 즉, 같은 박사라도 자국의 경제·문화·교육·의료·과학·예능 등의 분야에 기여할 능력을 갖춘 사람을 가려 뽑는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자국에 도움이 되는 인재’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국 이민국은 국제 논문, 특허, 수상 경력 등을 심사해서 미국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하면 조건 없이 영주권을 승인한다. 일정 금액을 투자하거나, 일정 기간 취업해야 하는 조건이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백수 생활을 하더라도 미국에 있어달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인재가 미국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 셈이다.

교수·의사 떠나는 이유, ‘삶의 질과 자녀 교육’

이민박람회는 미국 등지로 이주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 국제이주개발공사

한국 이민자들 중에 고급 인력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들의 직업은 전문직이 대부분이다. 한 이민 관련 업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영주권을 신청한 고학력자 중에서 공대 교수가 30%, 의대 교수가 30%, 석사 이상 연구원이 25%, 일반 의사나 예체능인이 15%를 차지했다. 게다가 이들의 나이가 예전보다 젊어지는 흐름이라는 점이 최근 두드러져 보인다. 홍순도 국제이주개발공사 대표는 “박사가 흔하다 보니 뚜렷한 업적이 없는 박사는 고학력자 이민에 끼지도 못한다. 그러나 미국이 원하는 자격을 갖춘 박사라면 파격적일 만큼 신속하게 이민 신청을 받아들인다. 영주권을 신청하면 심사하는 데에 보통 1년 정도 걸리지만, 자국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하면 서류를 접수한 지 1~3주일 만에 승인한다. 또, 최근 미국 영주권을 신청하는 국내 고학력자의 나이가 점점 젊어져서 과거에는 40~50대가 주류였다면 지금은 20대부터 30대가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땅에서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 말이 다르고 물이 선 외국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에는 먹고사는 문제 등으로 이민을 떠났지만, 지금은 삶의 질, 사업, 복지, 자녀 교육 등에 대한 갈망이 한국을 떠나는 주된 이유로 꼽힌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은 한국의 인재 정책이 이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탓이다.

전자통신 분야 국가 연구원에 근무하는 김 아무개씨(38)는 정보통신 박사이며 대학에서 겸임교수이기도 하다. 국내외 특허가 있고, 국제 논문도 10편 냈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이다. 그러나 고물가, 세금, 사교육비 등으로 몇 년째 빠듯한 생활을 이어왔다. 연구에 전념할 수 없는 환경이 늘 그를 괴롭혔다. 그는 최근 이민을 결심했다. 

흔히 박사 처우에 인색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13개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이공계 박사 초임이 대기업 4년제 학사 초임 수준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나마 꾸준한 지원을 받기도 쉽지 않다.

외국 대학에서 이공계 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인 유학생 10명 중 7명은 현지에 눌러앉기를 원한다. 사진은 미국 한 대학의 학위 수여식 장면. ⓒ 미국 이민국
불안한 노후도 이들을 국내에 정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국내 대기업 연구소에 근무하는 김 아무개씨(36)는 서울대 박사로 해당 분야에서 인정받는 엔지니어이다. 그런데 평일에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주말에도 특근이 이어지는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그렇다고 정년이 보장된 것도 아니어서 40대에 들어서면 앞날을 걱정할 일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는 60대까지 자신의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외국 이민을 결정했다.

박소연 국제이주개발공사 이사는 “젊을 때 힘들더라도 세금을 낸 만큼 노년에 복지 혜택으로 돌려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선진국에서 높은 세율에 대한 국민의 조세 저항이 심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노후를 보장받기 때문이다. 노년 문제로 이민을 결심하는 고학력자가 늘어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아무개씨(52)는 한양대 공대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공대 교수인 그는 자신의 연구에 결실을 보기 위해 벤처기업도 설립했다. 퇴임 이후에는 기업을 운영할 계획이다. 우수한 기술력이 있지만, 생각만큼 성장 속도가 붙지 않았다. 대기업 위주로 편중된 산업 구조 때문이었다. 우연히 이 기술력을 알게 된 미국 기업 관계자가 스카우트를 제안해왔다. 이씨는 사업을 키우기 위해 미국 이민을 결정했다.

자녀 교육 목적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한국 학생의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4년 연속 최하위권이다. 왕따, 자살, 입시 부담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5년 전 미국 이민 길에 올랐던 안 아무개씨(50)는 “아이 교육 때문에 미국으로 오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자녀 교육 때문에 미국으로 왔다. 자연 친화적 교육 환경, 외국인이나 장애인에 대한 배려, 창의성 위주의 교육, 직업 교육 등이 잘 갖춰진 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은 것이다. 단순히 학업 성적만으로 인재를 평가하는 한국 사회에 아이를 내던질 수가 없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다”라고 말했다.

한국도 외국 인재를 영입한다. 그러나 그 수가 미미하다. 기자가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요청해서 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 3년 동안 한국 영주권을 취득한 고급 인력(첨단 학·석·박사)은 모두 94명에 불과하다. 이 중에 박사가 61명, 학사와 석사가 23명이다. 올해 3월 현재, 한국 영주권을 딴 전체 외국인 7만명의 1%도 안 되는 비율이다. 대부분 중국·러시아 출신자이며 미국 등 선진국에서 유입된 인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브레인 리턴 500’ 실효 거둘지 주목

교과부는 2017년까지 우수 두뇌 5백명을 영입하기로 했다. 이른바 ‘브레인 리턴 500(brain return 500)’이라는 계획이다. 외국에 퍼져 있는 한국계 석학을 다시 불러들이겠다는 것이다. 석학들에게 연간 100억~1백50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연구팀 구성과 연구 과제 선정에도 전권을 부여할 예정이다. 연봉도 5천만~1억원까지 책정했다. 교과부는 지난 2월 미국 보스턴에서 설명회도 열었다. 재미 한국인 석학과 유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김창경 차관은 “애국심에 호소하며 인재를 영입하던 시대는 갔다. 최상의 대우와 연구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고는 한국으로 들어올 석학은 없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1960~70년대, 외국에 있는 한국계 과학자들을 불러모을 때에도 애국심에만 호소한 것은 아니다. 경제적인 대우 외에도 야간 통행금지 시간에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권리 등 파격적인 혜택을 주었다. 이와 같은 환경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학자들 사이에서 높다. 각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계 석학을 한데 모으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잡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특정 분야를 주도적으로 연구할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재 유출이 심한 인도와 중국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자국 출신 학자들을 안식년에 자국으로 초대해, 경험하고 선택할 기회를 주는 사례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한국에 있는 아시아계 유학생만 1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자국에서는 엘리트이지만 한국에서 인종 차별을 당하기 일쑤이다. 외국인 인재를 품지 못하는 한국의 인식 변화도 필요하다.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기에…세계는 ‘인재 유치 전쟁’ 중  

인재 유치전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인재의 이동에는 기술과 자본이 따라다니므로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 일부 국가는 고급 인력이 사라지는 이른바 인재 공동화 현상으로 산업이 쇠락하는 등 국가 위기를 맞고 있다. 첨단 과학의 시대로 진입하는 현재, 인재 확보는 국가의 운명이 달린 문제이다. 전쟁으로 국가가 사라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벌어지는 셈이다.

영국은 지난 3월 런던 인근에 ‘테크시티’를 조성했다. 지난 2010년 24만명의 자국 인재가 외국으로 떠나자 영국 정부가 인재를 외국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취한 조치이다. 유럽의 실리콘밸리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1억 파운드 이상을 투자한다. 그곳에 구글·페이스북·인텔 등 세계적인 기업의 지사뿐만 아니라 IT 벤처기업들을 유치했다. 현재 약 7백개의 기업이 모여 있다.

지난해 12월 실업률이 20년 만에 가장 낮은 6.8%를 기록한 독일은 폐쇄적인 이민 정책을 버렸다. 정부가 그리스 아테네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기업설명회를 열고 인재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병원과 자동차회사들도 외국 현지에서 인력을 채용하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지난해 상반기에만 43만5천명의 외국 인력이 독일로 향했다. 이 중에 절반 이상이 고급 인력이다. 또,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자국 학생들을 파악해 장학금 등을 제공하며 예비 인재 영입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중국에는 ‘천인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1천명의 인재 확보 프로젝트이다. 중국은 이를 위해 ‘국가외국전문가국’을 설치해 노벨상 수상자 등 해외 인재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 10년간 채용한 외국 전문가에게는 생활보조금을 1억7천7백만원씩 주기로 했다. 미국 공영방송 NPR은 중국의 첫 스텔스 전투기(젠-20) 개발이 해외 두뇌 유치로 가능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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