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힘든데 ‘돼지들(PIGS)’은 힘 받았네
  • 서호정│스포츠 칼럼니스트 ()
  • 승인 2012.06.24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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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 잔치인 유로2012에서 재정 위기 관련 국가들 ‘승승장구’

포르투갈의 호날두, 8강 진출 확정 짓고 환호하는 이탈리아 선수들, 그리스 선수들, 스페인의 알바(맨 왼쪽부터).

6월의 유럽이 두 가지 이슈로 시끌시끌하다. 하나는 금융 위기, 또 하나는 축구이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17개국, 이른바 유로존은 재정난으로 흔들리며 붕괴 위기에 몰리고 있다. 진원지는 그리스이다. 계속되는 경제 위기로 무려 3천3백억 유로의 빚을 지고 있는 그리스가 유로존 탈퇴나 디폴트를 선언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세계적인 금융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2008년 미국발 리먼브러더스 사태에 이은 또 한 번의 세계적인 경제 침체의 예고이다. 그리스뿐만이 아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남유럽 3개국에 아일랜드까지, 재원 확보를 위해 발행한 국채가 너무 많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며 차례차례 구제금융을 받았다. 만성적 재정 적자와 높은 실업률, 부동산 거품 붕괴 등 유럽 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지목받는 이들은 각 국가의 첫 이니셜을 따 ‘돼지들(PIGS)’로 불린다.

6월 초 그들이 한자리에 집결했다. 유럽의 새로운 성장 동력 국가로 꼽히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였다. 하지만 경제 위기 탈출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유럽의 월드컵’이라 불리는, 폴란드-우크라이나 공동 개최의 유럽축구선수권(이하 유로2012)이었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아일랜드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로2012 본선에 모두 출전했다. 그리고 아일랜드를 제외한 ‘돼지들’이 국가 경제 위기의 어려움에도 모두 8강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같은 기간 그리스는 국가의 운명을 책임질 2차 총선을 진행했다. 스페인이 크로아티아를 꺾고 조 1위로 8강에 진출하는 날 유럽 언론들은, 스페인 국채 금리가 위험 수준을 넘어섰고 신용 위험 수준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8강전, PIGS 4개국과 비(非)PIGS 4개국의 맞대결로 압축

하지만 축구장 안팎에서만큼은 그런 위기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4년 사이 유로2008과 남아공월드컵을 제패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스페인 대표팀의 플레이는 희망이 안 보이는 경제 상황과는 정반대로 가장 화려하고 정교했다. 포르투갈은 자신들의 주 채권국인 덴마크와 네덜란드를 꺾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스는 미국, 중국과 함께 세계 경제를 흔드는 강국 러시아를 1-0으로 꺾고 극적으로 8강에 올랐다.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찾은 각국 응원단에서도 경제 위기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일랜드에서는 무려 3만명이 넘는 대규모 응원단이 넘어와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른 나라들도 1만명 이상이 동유럽을 찾아 축구와 함께하는 휴가를 즐기고 있다. 축구팬인 스페인의 라호이 총리는 이탈리아와의 첫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가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과거 IMF 구제금융 당시 한국이 박찬호·박세리 등 스포츠 스타의 활약에서 위안을 찾았듯이 그들도 축구를 통해 자존심을 찾으려는 듯하다.

불황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고 축구를 탈출구 삼아 승리를 즐기는 PIGS의 모습은 유로존의 다른 국가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서유럽 언론들은 “자기 나라가 망해가는데 축구를 보겠다고 와서 유럽 최고 성장률을 기록 중인 개최국의 호황을 도와주는 멍청한 축구팬들이다”라며 질타를 퍼부었다. 그에 대해 PIGS의 언론들은 ‘배고프다고 축구도 못해야 하나? 스포츠는 다른 개념이다’라며 맞불을 놓았다.

실제 축구는 위기에 놓인 경제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어쩌면 축구야말로 진정한 유럽의 통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통화를 쓰지만 엄연히 국경이라는 선을 긋고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경제와 달리 축구의 경우에는 선수의 이적, 투자에서 국경이 사라졌다. 여전히 파운드화를 고집하고 있는 잉글랜드조차도 축구에서 만큼은 유럽축구연맹(UEFA)의 규정을 따른다. 자국 경제는 무너졌지만 축구 대표팀의 스타들은 자국, 혹은 타국에서 최상의 조건 아래 기량을 쌓았다. 스페인 대표팀에는 사비, 이니에스타, 실바 등 후일 축구 역사에 남게 될 미드필더들이 동시대에 등장했다. 포르투갈의 호날두는 세계 최고 이적료(9천4백만 유로, 약 1천4백억원)를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자본, 산업, 공장 수, 인력 등 경제 여건에서는 확연히 밀리지만 소수 정예의 특급 선수들로 경쟁력을 발휘하는 축구에서 만큼은 다른 향방의 승부가 펼쳐지는 것이다.

유로2012 8강전은 흥미롭게도 PIGS 4개국과 비(非)PIGS 4개국의 맞대결 구도로 치러진다. 전세계 축구팬은 물론 경제계와 주요 투자자들의 이목까지 집중되고 있다. 포르투갈은 체코, 이탈리아는 잉글랜드를 상대한다. 유로존의 두 기둥인 스페인과 프랑스의 격돌도 빅매치. 그러나 가장 관심을 모으는 것은 역시 8강전 두 번째 경기인 독일과 그리스전이다. 그리스는 경제 위기의 주범이고 독일은 유럽연합 내 사실상의 경제 수장이다. 그리스는 독일의 최대 채무국이기도 하다. 최근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 등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은행 동맹과 유로 공동 채권 도입에 반대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한마디로 빚보증을 서지 않겠다는 것이다. 경제 문제로 인해 상할 대로 상한 양국의 감정이 그라운드 위에서 어떻게 전개될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듯하다.

4강에 들어서도 PIGS 국가들 중 최소 2개국의 진출이 유력하게 점쳐지는 상황이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유럽 유명 도박사들이 예상한 결승전 대진은 독일과 스페인이 맞붙는 것이다. 두 팀은 4년 전 유로2008 결승에서도 맞붙었다. 결승전 시기에 즈음해서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유로존 주요 4개국 정상이 이번 경제 위기를 놓고 머리를 맞대 최종 결론을 내려놓을 예정이다. 유로2012에서 벌어지고 있는 PIGS의 분전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는 이래저래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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