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만능’에 꽂혀 날뛰는 우리 안의 ‘악’을 들여다보자
  • 이나미│신경정신과 전문의 ()
  • 승인 2012.07.02 23:1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의식에는 위험한 본능 내재해…죄의식 못 느끼는 사람들 증가

ⓒ honeypapa@naver.com

화가 나면 “죽여 버릴 거야” “너 죽을래?” 같은 말을 일상에서 무심히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무심히 하는 말이지만, 사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상황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지옥이다. 사람을 죽인 이들은 일반적인 짐작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괴물들이 아니다. 오히려 약하고 순진해서 어떻게 그처럼 흉악한 죄를 짓게 되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꼭 산후 우울증 등의 심각한 정신병이나 사고 때문이 아니라 계획적인 살인자들도 그렇다. 물론 죄책감과 자기혐오, 혼란감으로 인한 아노미 상태, 무기력, 불안, 불면, 우울 등 다양한 증상이 감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냥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다. 실제로 보통 사람들도 정말 누군가가 너무나 미울 때, 그 사람이 없어졌으면 하고 소망할 수 있다. 혹은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감행해 아주 은밀하게 그 사람을 없애버리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복수를 주제로 하는 잔인한 영화나 연쇄 살인범들을 다루는 영화가 수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우리 무의식에도 그런 은밀한 파괴적 본능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살해 욕구는 어디까지나 판타지의 영역일 뿐이지, 대부분은 이성이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어 꼭 죽일 필요까지 있느냐 하는 판단을 하게 된다. 예컨대 이혼 과정 중에 속 썩이는 배우자가 밉기는 하지만, 정 안 되면 모든 것을 주고 몸만 빠져 나오겠다고 생각하지, 그 사람을 죽여서 내 인생도 끝내겠다고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완전 범죄만 보장된다면 배우자나 주변 사람을 죽이겠다는 이들을 실제로 면담한 적은 있다.

평범한 사람이 끔찍한 살해 욕구 느끼는 까닭

청소년들은 더 솔직하다. 뇌의 성장이 아직 완벽하게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이 요동을 치면 마치 정신병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조종하고 간섭하며, 때로는 언어·물리적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오랜 병치레나 노인 수발에 지친 가족들도 아무도 모르게 환자를 죽이고 좀 편하게 살았으면 하고 희망할 수 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남들 앞에서 큰 모욕을 주거나, 혹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게 한 상사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잊을 만하면 미국에서 터지는 직장이나 학교의 총기 난사는 그런 은밀한 소망의 행동화(Acting-out)이다.

이렇게 끔찍한 살해 욕구를 평범한 사람들도 한 번쯤은 품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이 생각하는 것처럼 합리적이지만은 않다는 반증이다. 맹자나 순자보다 정보가 많은 현대인들은 인간이 뼛속 깊이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환경과 교육에 따라, 끔찍한 연쇄 살인범이 되기도 하고, 엄청난 성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나치나 크메르루즈 등에 가담했던 전쟁 살인범들도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했다. 무차별적으로 민간인까지 살해하는 근본주의자들은 테러리스트이자 살인범이지만, 그들에게는 영웅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살인범들마저 나름으로 자신들을 합리화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학대를 당했다, 버림받았다,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등등 때로는 동정심이 들 만한 이유를 대기도 한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살해 욕구를 인간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악한 면에 대한 접근으로 이해한다. 법이나 도덕이 죄를 묻는 것으로 악을 해결하는 것과는 다른 입장이다. 하느님의 자녀인 인간은 선한데, 사탄의 유혹 때문에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기독교 이론과는 많이 다르다. 일단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는 엄청나게 어둡고 위험한 본능이 원형적으로(archetypally) 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분석하면서, 자신과 타인의 어두운 부분을 인정하고 이해하라고 격려한다. 짐승보다도 못한 충동적인 측면, 끔찍한 파괴적 욕구, 감당하지 못할 성적 욕구 등을 무의식 속에 있는 우리의 그림자(Shadow)라고 말한다. 이런 어두운 부분을 직면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자기(Self)를 성취해낼 수는 없다.

삶의 목표가 돈이 되어버린 시대에 가족까지 죄의식 없이 죽인 사건들

문제가 생기면, 남 탓·사회 탓이고,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회에서는 자신의 끔찍한 범죄에 대해 죄의식을 지니지 못하는 이들의 숫자도 증가한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같은 성군의 시대에 비해 부패한 왕조의 말기에 돈을 노리고 피붙이나 친구를 잔인하게 죽이거나 모함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건들이 증가했다. 보험금을 노려 피붙이들을 몇 년에 걸쳐 죽이고 자신의 눈까지 멀게 한 여성이나, 부모·형제·배우자를 차례차례 죽이는 사건들이 최근 자주 보고되는 것을 걱정하는 이유이다. 미국에서도 보험금을 노리고 살인하는, 선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이 많이 보도되고 있다. 장애자를 돌보는 척하고 보험금을 타기 위해 살인한 목사의 사건, 노숙자를 집에 데려다놓고는 결국 보험금을 노려 살해한 할머니들의 사건이 유명하다. 물론 개척 시대에도 겉으로는 청교도 정신을 내세웠지만 인디언을 잔인하게 죽이고, 은행 강도를 일삼는 악당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때의 살인과 최근의 보험 살인이 다른 점은 생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물질적 욕심 때문에 죄 없는 이들과 가까운 가족까지 죄의식 없이 죽인다는 사실이다. 삶의 목표가 사랑이 아니라 돈인 시대인 것이다.

한때 만인의 공분을 사는 보험 광고가 있었다. 남편이 갑자기 죽은 후, 그림같이 아름다운 집과 자동차를 지닌, 행복하고 아름다운 부인과 아이 그리고 충분히 새로운 애인이 될 만한 근사한 외모의 남자 보험설계사가 등장해,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계획하는 장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사라졌지만, 지금도 많은 이들의 머리에는 그 광고가 기억될 것이다. 만약 땀 흘려 일하는 것은 싫고 돈은 실컷 쓰고 싶은 이들이라면, 그 광고처럼 죄 없는 누군가가 죽고 보험금이라도 탈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꾸지 않을까.

요새 아이들을 면담해 보면 10억원이라는 돈이 갑자기 내 손안에 생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옥에 가겠다고 말한다. 커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예외 없이 “돈 많이 버는 일이요!”라고 합창을 한다. 과거처럼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어린이다운 순수함을 이제는 만날 수가 없다. 이런 아이들이 성장해 더욱 현실의 때가 묻으면, 과연 무슨 일들을 벌일까. 물론 돈을 바라고 사람을 죽이는 극단적인 몇몇 사례를 가지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입시 기계로 자라면서 배려와 사랑을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 커서는 역시 돈 버는 기계가 되어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을 그동안 너무 많이 만난 것 같다.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악을 물리치는 힘은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다. 요즘 벌어지는 돈을 노리는 끔찍한 흉악범들의 사연을 그저 이야깃거리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과연 우리 안의 ‘악’은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마음을 제대로 알아야 행동을 이해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다. 끔찍한 살인자들도 불과 몇 달, 몇 년 전까지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과연 왜 그런 살인자가 되었는지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해 예방하지 않으면 앞으로 비슷한 범죄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 같다.   

 


[시사저널 인기 기사]

▶ ‘아버지 유산’의 질긴 굴레, 비켜갈 수 있을까

▶ 진화된 해킹에 비상 걸린 언론사들

▶ ‘반값 부동산’ 시대 다가오는가

▶ 대기업, 국공립 병원 매점까지 탐낸다

▶ 압박 주고 사람 잡은 SC제일은행의 ‘실적지상주의’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